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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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고 내는 모든 것을 자기 내공에 놓으라
게을리 생각 말고 부지런히 닦아서 벗어나야

왜 백종과 같은 절차가 필요한지?


한마음선원은 모든 것을 자신의 근본 하나로 돌려서 자기를 밝히는 공부를 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불 의식을 할 때 죽은 사람을 위해서 지장 정근을 해서 지장보살을 찾는 이유는 무엇이며 서양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래도 다들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굳이 천도재를 지내고 당대의 부모뿐 아니라 조상들을 위해서 백종과 같은 절차를 치러야 하는지요? 이 마음공부를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이론과 실제가 너무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 질문 올립니다.

우리 대중이 돌아가는데, 한 회사가 돌아가든지 한 나라가 돌아가든지, 공해서 같이 돌아가긴 하는데 같이 돌아가면서 이 사람은 이쪽 소임을 맡고 이 사람은 여기 소임을 맡아야 하고 소임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이건 하나로 둥글게 돌아가는 동시에 이거는 이것대로 소임을 맡고 이건 이것대로 소임을 맡고 다 소임을 맡게 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 바닷물에는 주해신이라는 이름을 갖고 거기 소임을 맡고, 또 산에는 주산신이라는 이름을 맡고, 다 보살이 책임을 맡는 거예요. 또 주림신이라는 이름을 맡아 가지고 온갖 나무와 풀들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았다 합시다.
그러면 이 인간의 마음은 다 이렇게 똑같지만, 근본은 똑같지만 마음을 부리는 거는 다 각각이란 얘깁니다.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전부 마음을 내서 부리는 것은 다 각각이란 얘깁니다. 그렇듯이 지장은 지장, 관세음은 관세음, 이렇게 자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것이. 지장이라는 것도 그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지장이라는 이름이 있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만약에 20개든지, 12개든지 소임을 맡은 이름이 지장이다 관세음이다 칠성이다 뭐, 산신이다 해신이다 이렇게 모두 이름을 붙여 놓고 있는데, 우리가 그거 하나를 부리려면 “아무개야!” 하고 불러야 되죠? 아, 지금 당장 우리도 여기 주욱 있는데 누구 하나 이렇게 심부름을 시키려면 “누구야!” 하고 그 소임자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장 정근을 할 때는 그 소임을 맡아 가지고 하는 그 이름을 불러야, 이게 자기 이름을 불러야 대답을 하고 오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감독이면 그 감독 이름을 불러야 하고, 직원이면 직원 이름을 불러야 대답을 하고 오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두루뭉수리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또는 산신보살 또 해신보살 또 주림보살, 그냥 수없이 많죠. 지신, 이런 것도 다 거기 속해서 소임을 맡아 가지고 주욱 있는데 그 소임 맡은 대로 이름을 붙여 놓는 거거든요, 부처님께서. 그 붙여 놓은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대답을 안 해요. 그러니 소임 맡은 사람을 불러야 일을 시키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보이는 데서 하는 일도 아닌데, 보이지 않는 데서 보살이 일을 하는 건데 어떻게 이름을 안 불러요? 알지도 못하고 뛰는 사람들이지.
그리고 서양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잘 사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됐느냐 하면 유교가 번성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이게 원래 불교가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유교가 그냥 체인지가 돼서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불교가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미국에 가서 가만히 하는 걸 보니까, 예를 들어서 천주교라면, 다른 점도 있겠지만 그 믿는 사람들이 바깥으로 믿어서 그렇지 이게 안으로만 믿는다면 진짜로 최고란 얘기죠. 이렇게 미사를 드리고 할 때에 자기가 영혼을 불러 주고 영혼에 그 모든 것에 혜택이 있게끔 이렇게 하는 거는 우리 유교에서 제사 지내는 것보다 더 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안으로 하질 않기 때문에 맞아져 들어가질 않은 거죠. ‘하나님, 주님’ 하고 바깥으로 찾기 때문에. 그런데 형식은 미사를 드리고 꽃하고 뭐 이렇게만 하고선 그냥 지내는데, 원칙은 그게 맞는 거예요, 형식은. 근데 진짜 이 안에서는 맞지 않기 때문에 지금 그런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제사상은 왜 차리는가. 지금 우리가 사는 데가 물주머니라고 합시다. 그런데 물주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물주머니 안에서는 상 차려서 먹고 뭐 만날 똥 싸고 먹고 똥 싸고 잠자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근데 그것이 살아가면서 보니까 이 모두 습관이 돼 버렸지 않습니까. 사람이 사는 것에 대해서 습관이 되고. 지금 상을 차려 놓고 하는 거까지 습관이 돼 버렸죠, 오히려 습관을 만들어서. 그런데 이것은 이 주머니에서 넘어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을 차려 놓고선 영가를 불러서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겁니다. 우리는 그 주머니를 벗어나면 먹고 똥 싸고 하는 것도 다 그냥 벗어버리는 거거든요. 그런데 죽어서도 그렇게 한다면 거기에 관습이 더 생겨서 여기서 조상들을 더 꼼짝 못하게 만드는 거다 이겁니다. 지금 바깥으로 벗어나게 하려고 그러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절에서는 떡 하나 이렇게, 이 떡은 이름 그대로 우주떡입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먹고도 이 빵떡은 되남는다 하는 겁니다, 그냥. 그래서 방편을 복잡하게 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떡 해 놓고 과일이나 놓고 꽃이나 놓고 향, 초, 그리고 물 한 그릇은 이런 다기 그릇에, 요만한 작은 그릇에 놓지 말고 큰 그릇에다 놓아라 이랬습니다. 그리고 천도할 때는 또 딴 그릇에, 큰 그릇에다 놔라. 이런 건 지금 이 공간 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거든요.
그래서 재를 지내는데 우주떡 하나에다가 과일 세 가지를 한 접시에다가 놓고 향, 초, 흰 꽃, 위패하고 천혼문 쓰고 큰 그릇에 청수 한 그릇을 떠 놓고 그렇게 지냅니다. 그것도 없어도 되는데 방편이란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도 안 해 주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왜 꼭 해야만 되느냐. 그건 자손들에게 교훈도 주고 조상의 은혜도 알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그 영혼은 삼혼(三魂)이 항상, 하나는 태어나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돌아다니게끔 돼 있어요. 근데 조상이 몰라요? 보이지만 않을 뿐입니다. 아마 ‘이 괘씸한 놈!’ 그러곤 뒤돌아서서 후적후적 갈 거예요. 절을 한다 안 한다 이걸 떠나서 고개를 숙일 줄 모르면 자기를 자기가 승화시킬 수가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고개 숙이게 할 줄 알아야만 된다는 얘기죠. 벼이삭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사람이 권리가 많아질수록 고개가 숙여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돼요. 그래야만이 더 지혜롭고 더 풍부해지고 전체 바다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 물이 수증기로 올라가서 정화돼서, 하다못해 요만한 벌레, 요만한 풀 한 포기라도 남김없이 다 먹일 수 있는 바로 그런 청수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공부가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해서라도 이 마음의 도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절실한데 절에 가서 스님들께 “뭘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절에 간 색시란 소리 듣지도 못했는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될 거 아니냐.” 이렇게 말씀들을 하시는데요,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놓고 스님들 말씀처럼 해 나가게 되기까지가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학식이 부족한 저 같은 사람은 더더욱 공부가 어려워요.

이거 봐요. 바람이 불어서 만약에 갈대가 흔들리는 것처럼, 당신이 갈대라면 흔들리겠지만 갈대가 아니라 어떠한 폭풍이 친다 해도 그 뿌리가 패어지지 않는 그런 튼튼한 나무가 된다면, 장마가 들어도 괜찮아요. 끄떡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공부하는 건 스님들이든 스님이 아니든 똑같습니다. 마음은 똑같으니까. 그런데 이런 게 좀 다르다고 볼까요? 우리 인간들의 마음은 한데로 돌아가고 불성은 유생 무생이나 축생들의 불성이나 다 똑같지만 그 생각하는 차원에 따라서는 막이, 약간의 막이 있죠. 왜냐하면 짐승의 마음하고 우리의 마음하고 차원이 다르죠. 불성은 같지만, 즉 생명은 같지만 말입니다. 개미라는 그 생명은 똑같지만 차원이 낮죠. 아주 질이 낮죠. 뱀이라는 차원도 사람 차원하고 또 다르죠, 불성은 같지만. 그러니까 아주 천차만별로 차원이 다르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이것을 몽땅 쥐어서 이 불성이 똑같으니까, 개미나 풀의 생명이나 꽃의 생명이나 똑같으니까 전부 껴잡을 수가 있죠. 그래서 전체 그 생명들을 다 한데 합쳐서 꽃꽂이를 해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꽃꽂이를 하게 되면 우리가 그 꽃을 맘대로 꽂을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꽃꽂이라면. 여러분의 그 마음들이 꽃과 같으니까요. 그래서 그 천차만별로 돼 있는 꽃송이를 다 한데 묶어서 한번 꽃꽂이를 해 보세요. 꽃꽂이를 해 보시면, 이 꽃꽂이 속에는 천차만별로 돼 있는 꽃이 너무나 가짓수가 많은데도 나쁜 것 좋은 것을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왜? 조화가 되니까요. 그래서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의 유생 무생을, 전체 산천초목, 모든 물에 있는 가지가지의 그 생명들을 꽃으로 생각하고 한데 한번 묶어 보면 아주 찬란한 조화가 되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연기같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거지만, 이건 무너지는 거지만 그렇게 훌륭하게 능력 있게 할 수도 있다 이거죠. 연기를 두 가지로 사용하죠? 연기라는 것은 아주 불가사의한 능력을 말할 수도 있고, 이런 속세에서 연기를 쓰는 것은 허망한 것, 흩어지는 것 이런 것이 구름과 같이 흩어진다 해서 연기에 비유할 수도 있죠. 그러니까 이 연기라는 이것이 차원이 아주 낮은, 그냥 이렇게 불 때서 나오는 그런 차원의 연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기라는 건 이 능력으로 인해서 갖은 각색의 꽃을 조화를 이룰 수가 있는 연기 말입니다. 그렇게 조화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말한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라고 그렇게 못할 바가 없죠. 다 코 달리고 눈도 달리고, 나도 그렇게 똑같이 달렸잖아요. 만약에 역적의 집에 가서 고공(雇工)을 살면 역적이 되는 거고, 선지식의 집에 가서 살면 그 사람도 물이 들고 배우고 그래서 자연적으로 자기가 물들지 않으려야 안 들 수가 없이 그만 물이 들어서 선지식이 돼 버리더라, 이런 말이 있어요. 그러니 길잡이를 잘 만나야 한다 이 소리죠.
그러니까 자주 틈내서 절에 다니면서 공부해 나가세요. 자기가 변소에 가면 변소도 법당이 될 수 있고요, 자기 이 몸뚱이도 법당이 될 수 있어요, 축소하면. 자기가 있기 때문에 부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자기가 없다면 그게 우주가 뭐고 부처가 뭔지, 고가 뭐고 낙이 뭔지, 사랑이 뭔지 그걸 알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원인이에요. 이게 방편이자 원인이고, 원인이자 실상입니다. 그러니 공부가 어렵다 생각하지 마시고 지극하게만 해 나가세요.

영혼들을 벗어나게 하려면


절에 다니면서 영가 천도에 대해서 들으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걸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인터넷에서 ‘포르투갈 귀신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도 살아서 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시며, 만약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나 사람이 많이 죽은 곳에는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심어 놓고서야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그걸 보니까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정말 마음의 중심이 없다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일들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그런 영혼들을 벗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지금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영혼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영이라는 것은 이 사람들, 공부 못한 사람들이 죽었을 때 차원에 따라서, 즉 영체라는 것이 있는데, 말하자면 내가 맘대로 자유스럽게 못하는 영들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유체라는 것은 죽었으면서도 산 사람한테 매달려 다니는 것이고, 또 자기가 그냥 나타났다가 안 나타났다가 하는 유령으로 그저 돌아다니는, 어느 사람에게 고정적으로 이렇게 붙어 있는 게 아니고 아무 데든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붙어 돌아다니는 그런 유령이 있고, 또 악령, 이거는 자기의 인연에 따라서 그냥 다니면서 자기는, 얼른 쉽게 말해서 구더기가 똥이 있어야 그 배를 채우듯이 그 악령도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만 되는데, 그게 우리가 볼 때 악령이지 그 악령으로서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뛰는 거와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대의적으로 볼 때는 악령이 따로 없고 유령이 따로 없고, 유체가 따로 없고 영체가 따로 없고, 심체가 따로 없다. 즉 불성이 따로 없다 이 소리죠.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 마음에 의해서, 즉 말하자면 그 실상의 주인공에 의해서만이 천도를 할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같이 하고 있으니까, 항상 돌아가니까. 자기가 이날까지 억겁을 거쳐 오면서 생각하고 창조되고 이런 문제들이 그냥 쉴 사이 없이 돌아가니까, 우리가 한생각을 내서 코드 꽂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전기를 들어오게 하고 또 빼기도 하듯이, 또 저 문을 열고 닫듯이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를 들어서 ‘천도를 한다’ 이러면 향 한 개비하고 물 한 그릇 떠 놓으면 세상만사가 편안하지 않은가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죠. 이것은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얘깁니다. 그렇지만 이 공부를 해서 마음이 아주 떳떳해진 사람에 한해서는 향 한 개비나 또는 물 한 그릇이 필요 없습니다. 그건 형식에 불과하죠. 내 마음에 영원토록 흐르고 있는 물이 있으며 영원토록 켜 주고 있는, 즉 말하자면 자가발전소가 있으며 즉, 촛불이 있다 이 소립니다. 또 향이라는 것은 아주 모든 것에, 먹은 사이 없이 항상 충족한 걸 말하는 겁니다. 연기를 말하는 거죠, 연기. 즉 능력! 충만한 걸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영가들의 양식이 될 수 있다 이런 뜻이 될 수 있죠.
향을 피우는 것은 이쪽 사람의, 즉 말하자면 자비의 보시 있잖습니까? 그런 에너지를, 마음을 내면 그 에너지가 모든 데 향처럼 그 능력의 빛이 그렇게 퍼진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향이라고 우리는 표시를 한 것입니다. 그럼, 마음에 충족하게 있으니까 마음내는 것도 자유고, 불을 켜는 것도 자유고, 끄는 것도 자유고 같이 먹는 것도 자유입니다, 항상. 그러니까 그런 것을 형식으로 할 필요가 없다 이런 소리가 나오죠. 그러나 여러분이 모를 때에는 이 방편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마음으로 하는 방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공덕을 쌓는다 이런 거요. 동네에서 가난한 사람을 본다, 소가 도살장에 간다 또 가난한 사람이 병을 앓는다 이럴 때도 한생각 아무 조건 없이 방생을 해야 하는 거죠. ‘그 사람이 여기 절에 와서 주인공을 믿어야 되지. 이 공부를 해야 되지.’ 하는 거를 떠나서 방생을 하세요. 고집 세우고 안 오겠다는 거 우정 그렇게 애를 쓰지 말고, 남편이라도 안 오겠다는 거 굳이 오라고 그러면 부러지죠. 그러니까 좋게, 언제나 이익하게, 딸이 돼야 할 땐 딸이 되고, 동생이 돼야 할 땐 동생이 되고, 아내가 돼야 할 땐 아내가 되고, 아주 끝간 데 없이 친구로서 사랑을 느끼고 또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 말, 행 자체를 부드럽게 가져야 해요. 따뜻한 데로 고이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추우면 자꾸 나가죠, 따뜻한 데를 찾아서. 그래서 따뜻하게 해 놓으면 자꾸 들어오죠, 밖은 추우니까. 그러니까 사랑을 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것도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첨보해서 이익을 도모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 여러분은 자기 자성을 진실히 믿고 거기에다 모든 걸 놓는 공부를, 맡겨 놓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 좋게 생각을 하고 아주 좋게 생각을 해서 놓고, 언짢게 생각이 돼도 놓고 밉게 생각이 돼도 놓고 밉게 말하지 마시고요.

이 길밖에는 없는 것인지요?


사람들은 모두들 저마다의 꼭 해야 할 바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을 만나서 이 마음공부를 하게 된 저의 인연은 무엇일까요? 제가 마음공부를 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이렇게 이 길을 가고 있는 걸까요? 공부를 해 나가다가도 ‘꼭 이 길밖에는 없는가?’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스님께 여쭙니다.

지금 이 시대는 뭐든지 공중에서 탐지하고 공중으로 정보를 보내게끔 되어 있는 그런 급박한 시대입니다. 그러니만큼 우리가 어떻게 처신을 하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만 이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참작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무나 급박한 세월 속에서 수천 년 수만 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또 이름도 없이 말려서 여기에서 태어나고 저기에서 태어나고, 차원이 낮게 나고 차원이 높게 나고, 항상 몸을 받아 나와서 그렇게 애를 써야만 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부처님 되는 것이 십중팔구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자기를 부처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이 부처를 만드는 것이지 허공에서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형상에서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글자를 세워서 갖다 주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과 같이 한 도반으로서 여러분의 길을 인도해 드릴 뿐입니다. 그 맛을 아는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각자 그 맛을 알아야 되는 것이죠.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도 “사람이 살고 죽는 데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길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고 죽는 데서 벗어나야만 하는 일은 우리한테 너무나 큰일이며 너무나도 타당한 일이라서 게을리 생각하지 말고 부지런히 닦아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또 속임을 받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일 뿐이지 누가 속인다 또 안 속인다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만약에 귀를 꼭꼭 막고서 소리를 듣는다고 할 때는 안 들릴 겁니다. 또 그 귀 막은 것을 떼고서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다 듣게 됩니다. 역시 눈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보물이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눈을 감고 볼 때는 보이지 않지만 눈을 뜨고 볼 때는 보이듯이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면 그 도리도 모르거니와 우리가 그렇게 진기한 문제를 터득할 수도 없고 내가 나를 발견할 수도 없는 겁니다. 반면에 허망한 물질적인 문제들만 가지고 싸우게 되고 집착하게 되고 삼독을 빼 버리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쁜 것이 무엇이냐. 나는 항상 자기 내공에 모든 것을, 일체 들이고 내고 하는 것이 우리 생활이니 그 생활을 바로 자기 내공에 놓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법을 믿지 않는다면 놓지를 못하고 또 놓지를 못하면 편안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생활에서 얼마나 쪼들리고 방황하고 그렇게 애를 써야만 합니까? 한 번 와서 머물렀다가 그냥 가는 길에 말입니다. 이 세상에 나와서 잠시 잠깐 머무르는 동안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사는 것이지만 억겁 동안 말리느니, 억겁 동안 그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를 쓰느니 한 세상에 머물렀다 가는 이 길에서 우리는 터득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고 벗어나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모두들 물질에만 급급해하지 마시고 물질을 쓰되 하나도 씀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셔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날 때에 누구나가 다, 못생겼든지 잘생겼든지 자기가 형성시켜서 자기가 난 겁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형성시켜서 났으니까 바깥에서 구원을 받으려고 애쓰지도 말고 바깥에서 구하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바깥의 형상을 보고 남의 참견도 하지 마시고 오로지 나한테 인연이 있어서 닿는 일은 모든 것을 나한테, 그 상대방을 원망하고 상대방한테 말할 게 아니라 바로 내공에다가 믿고 놓고, 거기에서 굴릴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크나큰 일도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소한 일뿐이겠습니까. 생활이 불교고 불교가 생활이고 또는 마음이 부처고 부처가 마음인지라,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공부하는데 어디에 역점을 둬야 하느냐. 생활이라면 가정생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우주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다 생활인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에 이 공부를 해서 무엇을 하나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린 생활에서도 하나하나 말을 하지 않고 한생각을 먼저, 그러니까 상대방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한생각이 벌써 건너고 나면 그 마음이 내 마음과 둘이 아니어서 내 몸뚱이 움죽거려서 거길 갔을 때에는 이미 마음이 한마음으로 통해서 마음과 마음이 다 같아지니 이 육신도 같이 참 좋게 대화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것에서 이 법이 일상생활에 써진다는 것을 역력히 아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2006-07-31 오전 10: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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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