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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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비의 음료② 커피의 수난과 승리/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커피가 발견된 이후 몇 세기 동안 커피는 일반인들에게는 단지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용에 불과했으며, 일상생활에서 마실 수 있는 음료는 아니었다. 다만 특권 계층인 철학자와 수학자들이 밤새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마신 지적 음료이자 부자들의 사치품이었으며, 이슬람 사원에서만 향유된 값비싼 이용품이었다.
이런 커피가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고조시킨 것은 1517년 메카(Mecca, 사우디아라비아 서부의 도시)의 카이르 베이라는 젊은 총독에 의해서다. 그는 커피 애호가와 반대론자들이 며칠간 설전을 벌이게 해 커피 음용을 금지하기 위한 종교적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의 대부분은 “커피의 검은색은 나무의 죽은 부분으로 숯과 같다하여 죄인의 음식으로 여겼고”, “의식을 2배로 또렷하게 한다하여 악마로 규정한다”는 것이었다.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격렬한 폭동으로 커피 하우스가 불에 타 사람이 죽기도 했다.
결국 총독은 이것을 계기로 커피 금지령을 내린다. 그러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커피에 매료된 사람들은 습관처럼 커피를 마셨다. 금지령은 아무런 효과 없이 철회되었다.
이 소식은 메카를 중심으로 상인과 종교인들에 의하여 여러 나라에 퍼져나갔으며, 이슬람지역의 간이식당에는 와인 대신 커피를 판매하게 된다. 이로 인해 기독교인에 대한 선교차원으로 커피의 음용을 권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옛 이름)에서는 와인 상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1554년 터키의 골든혼의 번화가에 멕테비이르판(mekteb-i-irfan) 즉 ‘문화 학교’라는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이에 따라 커피는 ‘소매가 넓은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들이 체스를 두며 마시는 우유’라는 인식이 확대되어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으며 새로운 풍속이 만들어졌다.
상인들에 의해 마르세유에 유입된 커피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마실 수 있는 약으로 규정됐다. 의사들은 커피에 유해한 성분이 있음을 선언하는 한편 의사들 사이에서 약리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마르세유에는 노래를 부르며 집집마다 커피를 팔러 다니는 외국인 행상이 있었으나 대중적이지 못했다. 이는 커피에 대한 논쟁이 수십 년간 계속되는 동안 아직도 ‘커피는 약’이라는 인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촛대와 거울, 대리석 탁자로 꾸민 프랑스식의 새로운 커피하우스인 ‘카페 프로코프’가 탄생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것은 사람들의 검증을 통한 기호식품으로서 커피의 대중화를 예고한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비엔나식 커피 음용을 유행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이슬람 민족이 1683년 비엔나까지 진입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후 낙타 수십 마리와 커피콩 수백포대를 남기고 퇴각한 것이다. 낙타의 먹이라고 여겨 커피콩 포대를 불에 태우기도 하였다. 콜쉬츠키(전쟁 중에 비엔나를 위해 공을 세웠다)의 요청으로 그에게 선물로 주어진 커피는 비엔나 사람들 기호에 맞추어 지기 시작했다.
입천장에 달라붙는 커피 찌꺼기를 여과기에 걸러내고 꿀과 우유를 가미해 검은색을 연하게 하고 맛을 부드럽게 한 비엔나커피는 대중에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투르크와의 전쟁동안 포도밭이 파괴되어 와인을 생산할 수 없게 된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커피 향기는 수난 속에서도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며 마르세유와 비엔나를 정복하며 유럽으로 퍼지게 된다.
2006-07-31 오전 10: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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