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은 상품에 붙은 태그
길을 잘 쫓아가야 한다. 6장에서, “내가 설하는 설법은 뗏목같은 것”이라고 했고, 7장에서는 이어 “나는 아무 것도 설한 것이 없다”고 분명한 다짐을 받았다. 이처럼 <금강경>은 불교의 맨 꼭대기에서, “마침내 불교는 없다!”고 외치고 있다. 그것은 각자의 불성 속에 있거나, 혹은 아무데도 없다. 책은 뗏목이고 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진정 알아야 할 것은. 혜능의 표현을 빌리면, ‘무상지리(無相之理)’이지 ‘문자장구(文字章句)’가 아니다. 8장은 이 취지를 다시금 부연한다.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라도
-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냐. 사람들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를 보시로 기부한다면, 이 사람의 공덕은 엄청나겠지.” 수보리가 대답했다 “대단히 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겠느냐. 이 공덕은 공덕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은 바, 그래서 여래께서 매우 큰 공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世尊. 何以故. 是福德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무상(無相)이란 뻐김도 굴욕도 없다는 뜻이다. 일희일비(一喜一悲), 재물이든 명예든, 잃더라도 그런가 하고, 얻더라도 운이 좋았다고 여겨라. 그것들은 두루 네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연에 속하는 것, 불교식으로 연기(緣起)에 속하는 것을 남 준다고 생색낼 일이 아니다. 그때 비로소 ‘공덕’이란 것이 성립한다! 이 역설을 깊이 새겨야 한다.
여기 공덕의 ‘성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가치평가를 내린, 그 평가가 개입된 결과로서의 사물의 ‘특질’을 가리킨다. 가령 “내가 그것을 주었다”거나, “나는 너한테 손해를 입혔다”는 의식이나 기억이 그것이다. 이 분별(分別)을 지워야,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공덕이란 것이 성립한다.
육조의 해설을 듣는다.
“삼천대천 세계의 칠보를 끙차, 들어다 보시하면, 얻는 복이 많겠지. 그러나 진정한 ‘자기’에는 아무런 이익될 것이 없다. (물론, 손해될 것도 없다. 진정한 이익이란) 마하반야바라밀에 의거해 수행함으로써 자성(自性)이 여러 유(有)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것을 복덕성이라고 한다. 마음에 능소(能所), 즉 너와 나를 가리는 마음이 있으면 복덕성이 아니고, 그런 마음이 눈녹듯 사라진 자리가 복덕성이다. 마음이 불교(佛敎), 즉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의 삶과 행동을 따라 할 때, 그것이 복덕성이고, 그것을 믿지 않거나,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을 때는 복덕성이 아니다.”
혜능은 이렇게 마음의 능소(能所)를 경계한다. 마음이 너와 나를 가리면 이런 저런 유(有)에 떨어진다. 유(有)란 내가 누누이 말한 바 있듯이, 객관적 세계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유(有)란 심리적 분별(分別)의 이런 저런 결과를 말한다. 가령 “내가 택시에 동전 하나를 떨어뜨렸다.”는 객관적 사실인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런 사실은 없다! 불교는 내가 어떤 사태를 의식하고 기억함으로써 비로소 그 사태는 의미화되고, 존재성(有)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하나 유의할 것은, 문자적으로, 혜능은 ‘복덕성’을 나와는 다르게 해석했다. 그는 언제나 정통을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는 각자에게 맡긴다.
불교를 설하는 공덕
- “만약, 누가 있어 이 경전을 받아들이고, 지닌다면 나아가 이 경전의 핵심 몇 구절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준다면, 그 복덕은 (저기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를 조건없이 내놓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 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勝彼.
손에 쥔 다이아몬드보다 불교의 지혜 가르침이 더 소중하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누구나 재물을 좋아하고, 명예와 지위를 좋아한다. 우리네 평생이 그것을 추구하는데 바쳐져 있기도 하다. 삶의 어느 순간, 그래도 그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시간이 지나 역시 물질로 돌아가지만,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다. 허망(虛妄)을 엿본 자는 균형을 찾을 줄 안다. 추구에 절도를 갖게 되고, 전체와 이웃을 돌아보기도 한다. 또 삶의 가치를 연봉이나 조건 너머만으로 따지지 않게 되고, 그것을 괄호치고 ‘사람’을 보는 여유와 겸손을 배우게 된다.
삶을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치는 현자들이 소중하고 귀하다. 그리고 그것을 전통으로 갖고 있는 문화나 문명은 축복받았다. 우리가 꼭 그렇다. 20세기 초, 열강이 무력으로 침입해 올 때 불교의 산중 스님들이나 유교의 선비들은 무력하기 이를데 없었다. 영혼이 어떻게 총칼을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21세기 ‘마음’의 세기에, 우리는 그 시대착오적(?) 유산으로 하여, 삶을 다시 라인업할 보다 풍부한 자원을 갖게 되었다.
육조의 해설을 부연한다. “12부 (대장경의) 가르침, 그 핵심 취지는 사구(四句) 가운데 다 들어있다. 어째서 그런 줄 아는가. 경전들이 찬탄들하고 있는 사구게는 ‘반야바라밀다’이고, 마하반야는 제 부처의 어머니였다. 삼세의 제불이 모두 이 경을 의지하여 성불할 수 있었다. <반야심경>에도 ‘삼세제불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 않던가. 스승을 따라 배움에 나선 것을 ‘수(受)’라 하고, 가르침을 이해하고 수행에 몰두하는 것을 ‘지(持)’라고 했다. 내가 이해하고 내가 실천하는 것이 자리(自利)라면, 남을 위해 풀어 설명해주는 것은 이타(利他)이니, 그 공덕은 광대(廣大), 넓고 커 한량이 없다.”
이 경으로부터 부처가
- “어째서냐, 수보리야. 일체 제불과 그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이 다 이 경전으로부터 나온 까닭이다.”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及諸佛阿 多羅三 三菩提法, 皆從此經出.
물론 여기 ‘경전(經典)’이란 책에 쓰인 문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혜능 또한 그렇게 썼다. 그것은 말하자면, 삶을 이해하고(方便), 바깥의 유혹과 마음의 장애물을 걷어내어(決斷)…. 언제 어느 때나 성성한 깨달음의 빛을 발하고 있는 ‘지혜’이다.
- “수보리야, 이른바 부처의 진리 혹은 깨달음이란, 실은 진리도 깨달음도 아니다.”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다시금 불교가 종국적 진리가 아니고 방편설화임을 확인했다. 잠깐 나갔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 원효의 어법을 빌리면, 세웠다가 다시 부수었고(立破), 주었다가 다시 빼앗은(與奪) 셈이다.
육조의 부연설명을 듣는다. “(불교의) 일체 문자는 이를테면 ‘태그’ 혹은 ‘손가락’같은 것이다. 태그와 손가락은 그림자요 메아리란 뜻이다. 태그를 통해 상품의 종류와 가치를 알고, 손가락을 따라 달이 있는 곳을 알지만, 유의할지니, 달은 손가락이 아니고, 태그는 상품이 아닌 것을…. 경전 또한 진리를 알리지만, 경전이 곧 진리는 아니다. 경전의 글자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진리는 혜안(慧眼), 즉 지혜의 눈으로서만 볼 수 있다. 경전만 보고 그 진리를 캐치하지 못한 자는 붓다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그는 종내 불도를 이루지 못한다.”
六祖: 此說, 一切文字章句如標如指. 標指者是影響之義. 依標取物, 依指觀月. 月不是指, 標不是物. 但依經取法, 經不是法. 經文卽肉眼可見, 法卽慧眼能見. 若無慧眼者, 但見其經, 不見其法, 卽不解佛意. 旣不解佛意, 終不成佛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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