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5.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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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승(二乘)과 열반/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선가에서는 무명을 타파해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무명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먹장구름과 같다. 무명에서 비롯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연기법 자체가 공성(空性)임을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온갖 번뇌가 비롯되므로 무명을 ‘모든 번뇌의 근본’이라 말하기도 한다.
번뇌란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을 오염시키는 모든 시비와 분별이다. 불교에서 마지막으로 성취해야 할 것은 ‘깨달음’이요 ‘열반’인데, 이것을 성취하는데 방해되는 모든 시비와 분별이 다 번뇌가 된다. 번뇌는 그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생이 번뇌에 묶여 꼼짝 못한다는 뜻에서 ‘결박(結縛)’이라 부르고, 맑고 깨끗한 부처님의 마음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더러운 티끌[垢塵]’이라 하기도 한다. 또 바깥에서 잠시 다녀가는 손님과 같은 것이라고 하여 ‘객진(客塵)번뇌’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상황에 따라 무명조차 번뇌라고 한다. 이런 번뇌들이 생기지 않는 것, 이것이 열반임을 <선가귀감> 31장에서는 말한다.
斷煩惱 名二乘 煩惱不生 名大涅槃.
번뇌를 없애 나가는 것, 이것을 ‘이승’이라 하고 번뇌가 생기지 않는 것, 이것을 ‘큰 열반’이라고 한다.

번뇌의 근본인 이 무명을 뿌리뽑기 위해 간화선에서는 공부하는 사람이 화두와 하나가 되어 능소(能所)가 사라지게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한다. 이 깨달음이 ‘큰 열반’인데, 이것을 얻고자 번뇌를 없애 나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우리는 ‘이승(二乘)’이라고 한다.
이승(二乘)에서 승(乘)은 ‘사람을 태워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탈것’을 말한다. ‘중생을 태워 생사의 바다를 건너 주게 하는 법’을 비유한 것인데, 이 내용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서 이승이라고 한다. 이승은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말하기도 하고, 다시 소승을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으로 나눈 것을 말하기도 한다. <법화경>에서는 일승(一乘)과 삼승(三乘)으로 말한다.
부처님께서 평생 말씀하신 법을 ‘대승’과 ‘소승’으로 나눌 때, 성문과 연각을 위한 법이 소승이고 보살을 위한 법이 대승인데 이 대승을 보살승이라 하기도 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법을 직접 듣고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이치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성문승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홀로 십이인연의 이치를 관찰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연각승이라 한다. <법화경>에서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합쳐 삼승이라 하고, 법화회상에서 이 삼승을 한꺼번에 모아 바로 부처님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일승이라고 한다. <선가귀감> 31장에서 말하는 이승은 소승을 포함한 보살승까지이다.
열반의 본디 뜻은 ‘불을 훅 불어 끔’ 또는 ‘타오르는 불이 꺼져 재만 남은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이 ‘활활 타오르는 번뇌가 다 연소되어 사그라진 상태’의 뜻으로 바뀌어서 깨달음을 완성했다는 말로 쓰인다. 깨달음을 완성하여 더 이상 없앨 번뇌가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큰 열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최종적으로 실천되고 완성되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열반은 불교의 영원한 진리로서 변하지 않는 삼법인(三法印)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삼법인은 무상(無常), 무아(無我), 열반을 말한다. 불교 이외의 다른 교파에서 열반이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크게 다르다. 또한 불교 자체 내에서도 대승과 소승에 따라서 열반을 다양하게 해석한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斷者 能所也 不生者 無能所也.
번뇌를 없애 나간다는 것은 경계가 능(能) 소(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를 일으킬 ‘나[能]’가 없으므로 내가 일으킬 ‘번뇌[所]’도 없기 때문이다.

선종에서는 시비와 분별을 일삼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시비와 분별이 바로 번뇌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였더라도 시비와 분별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 ‘이승’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조사스님들은 이승의 분별을 바로 아시기에 단숨에 이를 뿌리 뽑으라 가르친다.
그래서 허상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그 근본 바탕을 바로 보라고 이른다. 그 근본 바탕에 마음을 맞추어서 그것과 하나가 되라고 한다. 근본과 하나가 되어 ‘나[能]’가 사라지고 ‘마주 보는 경계인 근본[所]’이 사라질 때, 비로소 능소(能所)가 사라져 모든 번뇌가 없어진다. 부처님의 광명이 드러나고 팔만사천법문 뜻이 온전하게 드러나 번뇌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마음 바탕에서 세상의 모든 법이 부처님 법으로서 같아진다. 이것이 깨달음이요 ‘큰 열반’이니, 너와 내가 조사스님이 되고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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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2 오전 1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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