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 종합 > 기사보기
내 한마음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불 밝혀야!
내 마음 안으로 모든 것을 놓고 믿으라!

칠석과 백종에 대해서


선원에 와서 법당에 삼 배를 드리고 도량탑에 와서 간절한 마음으로 탑돌이를 할 때마다 문득문득 스님께서 마음으로 새겨 놓으신 “칠성불은 만중생의 불을 끊어지지 않게 이어가 주시고 서천국의 아미타불은 그저 모든 중생들을 깨닫게 하소서.” 하신 그 뜻이 과연 뭘까 하고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칠석과 백종을 해마다 지내듯이 끊임없이 생하고 멸하는 가운데 정말 이 마음의 도리를 알아서 벗어나라고 하신 부처님의 그 자비하신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 언제나 한결같이 말씀해 주셨지만, 올해 또 칠석과 백종을 맞이하면서 저희들이 어떠한 마음을 내야 저 자신과 조상님들의 마음을 밝혀서 벗어날 수 있을지요?

칠석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낸다고 합니다. 또 백종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지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산 사람 죽은 사람’ 이렇게 나누는 게 아닙니다. 칠석이다 하면 칠(七)은 우리 몸 자체와 마음 자체를 말하고, 석(夕)은 그 마음이 깊은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밝힌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내가 형성된 날이나 죽는 날이라고 해도 되고, 아침 저녁이라고 해도 됩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불을 켤 때나 끌 때나, 이런 것이 바로 과거도 현재고 미래도 현재이듯이, 즉 말하자면 아침에 불 켜는 그 마음이나 저녁에 불을 끄는 마음이나 같이 엮어서 마음을 밝히라는 뜻입니다.
아침도 현재 내 마음 속에, 저녁도 현재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거. 내가 항상 이런 말을 하죠.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져야 불이 들어온다고요. 그래서 이 아침이나 저녁이나 없는 마음, 그 마음에서 발견해서 밝히면 칠석(七夕)이 칠성(七星)이 된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그 도리를 모르면 칠석이고 그 도리를 알면 칠성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칠석날은 내 마음을 모아서 과거 미래를 한데 합쳐서 내 마음에 깨달음을 밝게 가져오는 즉, 광력을 자재로이 쓸 수 있는 그런 중용을 말합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 한해서는 이런 얘기가 있더군요. 견우와 직녀도 그렇게 만나지 못해서 애를 쓴다고요. 일 년에 한 번씩 만난다고 그랬죠. 그런데 우리가 일 년에 한 번이라 하는 것도, 여기서 생각할 때는 일 년이지만 그 별성에서 생각할 때는 일 초, 하루를 뜻합니다. 즉 말하자면 여기에서 그 수명이 일 년이면 거기서는 하루라고 볼 수 있겠죠, 비유를 한다면. 아무튼 여기서 지어 놓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어 놔도 해당이 되게 지어 놓은 것입니다. 아무리 표현이다, 방편이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 년, 하루 이것을 비유하자면 우리가 여기에서 하루 동안, 24시간 동안에 한 번 만나는 것도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말입니다.
그러면 일체 사생(四生) 모두가, 천차만별로 돼 있는 모든 만물만생이 다 견우 직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있으면 인간이 있듯이 모두가 이렇게 인연이 돼야 생산이 된다는 뜻입니다. 납득이 안 가십니까? 이 모두가 인연이 없으면 생산이 되지 않습니다. 발전도 될 수가 없고요. 창조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으면 ‘칠성이 된다. 칠성 부처님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칠성 부처님이 명을, 또는 생산을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 소임을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이라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칠석(七夕)날은 칠성(七星)이 되기를 원하면서 내 마음을 다스리면서 밝힌다 이런 겁니다. 내 마음을 밝히지 않는다면 백종에 건질 수가 없어요. 왜 목련 존자를 비유해 놨을까요? 목련 존자가 그 깨달음을 가지고도 열반의 구경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는 지옥문을 열지를 못해서 어머니를 건지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가서 부처님한테 구하니 다시 정진하라고 그러기에 다시 정진해서 지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조상님들의 문도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칠석날은 항상 나한테 숨어 있는 그 마음, 깊숙하게 들어 있는 그 마음을 발견해서 불을 켜라, 밝혀라 이런 뜻입니다. 내가 깨달아야만, 칠석에 깨달아서 칠성이 돼서 그 마음의 불을 밝힌다는 뜻이죠.
백종은 아침과 저녁 이것이 한데 모아진 한마음입니다. 한마음이기 때문에 생각이 없는 중생이나 생각이 있는 중생이나, 산 중생이나 죽은 중생이나 할 것 없이 일체 만물만생의 모든 영령들을 건질 수가 있는 문이 열린다 이런 뜻입니다. 문이 열리는 것도 깨달음에 의해서 문이 열려야 건질 수가 있지, 깨달음에 의해서 문이 열리지 못하면 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북하면 백종입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백종을 그냥 돈이나 갖다 놓고 영령들을 어떻게 해 달라고 그러면 되는 줄 알지 마십시오. 스님들의 힘을 빌려서 한다 하면은 스님들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그 상대방에서도 내 마음을 알아야 한마음이 돼서 건져지지,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둘로 보고 그렇게 보니까 이 봉투에다 돈이나 넣어서 이름이나 써서 갖다 놓으면 영가가 천도되는 줄 아는데 이런 생각은 아예 마시고요.
항상 그렇게 얘기하죠. 예를 들어서 내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과 내 육의 조상들과 둘이 아니라고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자비라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마음과 내 부모들의 조상 마음과 둘이 아닌 까닭에 항상 내 한마음에 모든 거를 맡겨 놓고 마음을 내는 것이 그게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조상들의 마음도 내 한마음으로 하나가 돼서 모든 게 탄생이 되든지 승천을 하든지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마음 자체를 깨달아야만 된다.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항상 부모와 일체제불과 모든 일체 중생이 다 한마음 속에 있다. 한마음 속에서만이 빚어진다. 들이고 내는 모든 것이 전체 한마음에서 들이고 내진다.’ 이런 것을 강조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칠석에도 그 마음을 내 한마음으로 하나 되게 넣는다면 둘로 봐지지도 않고, 그렇게 한다면 바로 부모들이 자기가 되는 겁니다. 자기 속의 자기 마음을 훤히 다 알기 때문에, 부처님도 같이 이렇게 있기 때문에 거기서 툭 터져서, 삽시간에 물리가 터져서 승천을 하시는 겁니다. 칠석이 그런 마음의 도리지, 물질을 아무리 많이 갖다가 산더미같이 쌓아 놓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고 그렇게 공한 도리를 모른다면 아예 불도 밝게 일어날 수가 없거니와 조상들도 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여러분이 잘 아셔서 하도록 하시고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는데도, 아까 견우와 직녀 얘기 했는데 그게 납득이 됐습니까? 여러분이 다 견우와 직녀예요. 딴 데, 먼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견우와 직녀고, 견우와 직녀는 그렇게 울고 그렇게 사연이 많다지만, 그 만남도 즐겁게 만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즐겁지 못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게 해 두고요. 그렇기 때문에 그 견우와 직녀 속에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 공부하는 겁니다. 견우와 직녀 속에서도 벗어나게. 모두가 나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이 그냥 훌렁 벗어나게끔 지금 공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칠석도 아침 저녁이 한데 모아져서 공해 버렸다. 공했으면 그 공한 도리를 알 때는 그냥 무(無)다. 무조차도 무다. 이렇게 됩니다. 그 도리를 알았을 때는 바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정법인지요?


안녕하세요! 스님, 저는 불교에 관심 많은 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염불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지계 하고 염불 하면 극락왕생의 품위가 높아지고 청정한 극락세계에 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기의 참모습, 진짜 모습을 보려면 염불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스님께 질문을 드렸더니 정법은 그것이 아니라면서 다른 수행 방법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배운바가 부족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다 알지도 못하고 불교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정법인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우리가 불법을 배운다고 해서 다 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불자가 돼서 불자 노릇 하는 게 자랑거리가 아니고 진짜 불자 노릇을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한다 그래서 그런 거 보고 그대로 쫓아가서는 안 돼요. 지금은 너무 쇠퇴해져 있어요. 옛날 부처님 당시, 유마힐 거사가 있던 당시, 또 조사들이 있었던 당시, 달마 대사나 혜가 스님 모두 이런 분들이 있던 당시에는 절대로 기강이 죽질 않고 쇠퇴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고요. 지금처럼 이렇게 가르치지도 않았거든요. 사람이 말을 해서 그 말 한마디가 한데 떨어지게 한다면 부처님의 제자로도 취급을 안 했어요.
이 마음속에 수레가 있다면, 이게 쉬지 않고 돌아가는 수레라면 반드시 그 수레에 한 바퀴 돌려서 책정을 해서 말이 나와야 그게 정법인 겁니다. 그 수레를 거치지 않고 그냥 하는 말은 사사로운 삿된 말로 취급을 하죠. 그렇게 연결이 되질 않고요, 또. 그 수레바퀴에 한번 돌려서 나온다면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하고도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그 가설이 된 그 자체가 바로 수레거든요, 수레. 이 지구가 돌아가는 수레처럼. 그렇기 때문에 다 통신이 돼 버려요. 그러니까 돌에 올려놔도 산다고 하죠.
사람이 죽으면 송장 남겨 두고선 모두들 그 송장을 보고 울고 그럴 때에 자기가 자기 송장을 내려다보고 ‘참, 저렇게 껍데기인 것을 보고 우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씁쓰름하게 돌아서는 그것을 죽어서만이 알아서는 안 되죠. 살아서 알아야 돼요. 살아서 알고 살아서 터득을 해야지 그게 구경경지에 이른다고 그러지 그렇지 않으면 그게 공덕이 없다 하는데, 그것은 한마음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죠. 한마음이 돼야 공덕이 되는 거지, 공심과 공용과 그 모두가 한데 합쳐서 이렇게 돌아가야지 이게 공심으로 화하지, 만약에 이게 자기 개별적인 어떠한 생각으로서 돌아간다면 이건 공심이 될 수가 없잖아요. 천지가 다 말입니다.
그러니 이게 정법이다 사법이다 하기 이전에 그걸 다 놔 버리고 못났든 잘났든 문이 아니든 문이든 한번 엎드러져 보고 돌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큰 경험이며 보배를 크게 이루는 지름길이에요. 그러니 남의 말로 팔만대장경에 이렇게 해 놨으니까 요렇게만 가야겠다. 이건 모두가 착입니다.
예전엔 등대가 있고 등잔이 있고, 기름이 있고 심지가 있고 성냥이 있고 손이 있어야 했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 손도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손이 들어지지 억지로 들어지나요? 그리고 또 우리가 책을 본다 하는 것도 글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마음을 담습니까? 글자를 쓸 때 마음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 거지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글을 쓰나요? 그래서 글을 보지 말고 그 글 속의 백지의 마음을 봐라 이겁니다. 글씨가 나를 보고 내가 글씨를 보지 말라 이거예요. 우리는 글씨 써 놓은 대로 이름을 가지고 상징하지 말고 그 글씨 속에 있는 거, 그 속에 뭐가 있다는 거를 알아야 하는 거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아까 말씀드렸듯이, 자기 마음속에 있는 수레를 거쳐서 한번 돌아 나올 수 있는 그런 이치라야 모든 것이 부처님 법 안에서 돌아가는 그 공한 이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냥 무념무상 하면 되나요?


가장으로서 살아가려면 의식주가 필요한데, 그저 그냥 무념무상만 생각을 하면 되나요? 과연 무념무상은, 예를 들어 원초적인 원자도 아닌, 그러나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무도 아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유자재인가요? 쉽게 잘 설명해 주세요. 수행은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요?

지금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냥 무념무상으로 살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되 분별이라고 하지 말고 모든 거를 생각하되 함이 없이 해라 이겁니다. 함이 없는 줄 알아라 이거예요. 댁의 육체 속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들어 있죠? 그러면 더불어 같이 생각을 했지 왜 당신이 생각을 했다는 겁니까, 공(空)했는데. 그렇죠? 그럼 공체(共體)로서 공심(共心)으로서 생각한 게 아닙니까? 자기 혼자만이 그 생각을 한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자기가 봤다, 자기가 생각한다’ 이런 마음 자체를 떼라 이겁니다. 그냥 공심에서 공 생각을 한 거죠. 공심으로서 한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생각을 했다느니 안 했다느니 이런 이유가 붙을 자리가 못 되죠. 그러니깐 여러분한테 사랑을 하지 마라, 돈을 벌지 마라, 무슨 욕심을 내지 마라 이런 게 아니고, 하되 하지 말라 이거죠. 함이 없이 하라.
이 말을 해야 되겠군요. 어느 제자가 스승한테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산으로 올라가서 토굴을 묻고 공부하겠습니다.” 이러니까 “그럼 그렇게 해라.” 하고 선뜻 대답을 하고 난 뒤에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말할 게 있다. 네가 혼자 공부하러 가겠다면 네 몸 속에 있는 생명들 다 내놓고, 옷도 벗고 물도 먹지 말고, 밥도 먹지 말고 땅도 딛지 말고, 모든 걸 너 혼자 한다니까 다 내놓고 너 혼자 해 봐라.” 이랬답니다. 그러니까 그 말끝에 고만 무릎을 탁 치면서 하는 소리가 “아하! 내 몸뚱이도 그렇고 모두 일체가 둘이 아니게 같이 더불어 사는구나!” 하고선 “지겨워할 것도 없고 내가 바로 그고 그가 나니까, 내가 어디로 간다 안 간다 할 것도 없구나!” 하고 생각을 했더랍니다.
그랬듯이 그것은 사람의 생각으로써 자기가 지어서 업이 되고, 자기가 지어서 착이 되고, 자기가 지어서 악행이 되고, 자기가 지어서 뛰어넘지 못하고 이러는 거예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무한량인데 말이에요. 거칠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당신 혼자 살아야 그게 되는 거지 더불어 같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 혼자 물을 마셨다고 하고 물을 안 마셨다고 하고 이렇게 이유가 붙습니까? 공생(共生)이면서 공심(共心) 공체(共體) 공용(共用) 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가는 이 살벌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터득하고 어디다가도 착을 두지 않으면서도 어디다가도 사랑하지 않고 자비로써 베풀 수 있는 그 너그러움을 가져라. 이런다면 입에 붙은 사랑이 아니고 아주 정직하게 실천하는 자비죠.
지금 과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해서 발명을 하고 발표를 하고 이랬지만 이 부처님 법이란 아주 심오하고도 묘하고 광대하고도 무변해서, 즉 말하자면 내가 누구든지 하고 싶은 대로 그것이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연구해서 되고 어떤 것은 안되고 이런 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느 것 하나 건지지 못하는 게 없습니다. 왜냐?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도, 하다못해 물 한 방울도 안 돼 보신 분이 아니다 이겁니다. 물 한 방울조차 돼 봤던 분이기 때문에 물 한 방울에도 그 이름이 거기에서 솟아오른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그 천차만별의 이름들을, 천차만별의 모습들을, 천차만별의 마음으로서 연구하고 사는 그 모습들이 모두가 부처님 한마음에 들어 있으니, 그 마음 하나에서 다 천차만별의 가지가 가지가지마다 거기에서 풀리고 나온다. 우리가 뭐를 한 가지를 연구해서 발표를 하고 발표를 해서 남들이 다 알게 하는 그 어떤 조그마한 걸 하나 만들어서 놓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본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살기 때문에 본래 정수에 컴퓨터로, 자동적인 컴퓨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거든지 능히 주어지니까 내 마음을 마음대로, 내 마음이 마음대로 넘어서라 이거예요. 내 마음이 주저주저하지 말고 마음대로 넘어설 줄도 알아야 된다. 걸을 줄도 알아야 된다. 내 마음이 깊은 물속에도 들어갈 줄 알아야 된다. 내 마음이 우주법계를 돌 줄 알아야 된다. 그리고 다섯 가지 오신통이라는 거를 그냥 굴릴 줄도 알아야 된다. 이 모두가 전체, 바로 그 도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그대로 합류 돼서 돌아간다는 수레와 같은 그런 이치입니다.
우리는 지금요, 시공을 초월해서 살고 있어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살고 있다고요. 그런데 그것을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예가 여러분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산다, 넘어서서 산다 이런다면 우리가 정신이 아니라면 몸을 어떻게 이끌어 가지고 가겠습니까? 저 언덕이라는 그 자체가 바로 정신계거든요. 그리고 내가 항상 말했죠?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나툰다. 고정된 게 없이 화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그렇게 생활을 한다. 걸어오는 발자취가 앞으로 걷지 않았으니깐 없고 뒤는 자꾸 가니깐 없고, 현재에도 공해서 떠벅떠벅 떼어 놓고 올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생활을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대로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 이만하면은 아주 족한 것을….’ 하는 그런 말과 똑같은 얘깁니다. 그리고 또 고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저는 어려서부터 저의 존재에 대해 궁금증이 강했습니다. 그러다 대학 때 위파사나(바라보기 명상)를 하였는데 그때의 방법은 주로 마음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나의 인식 근원을 찾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흐르는 마음과 바라보는 주체자(나의 느낌)를 바라보며 그 모두를 인식하는 인식자를 찾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인가 갑자기 인식하는 주체자 또한 다른 생각과 같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최후의 인식자가 본래의 나이며, 본래의 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알 수 없는 것(시간과 공간 이전)이라는 걸 순간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짐이 내려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모든 관념의 허위성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저의 질문은 이 상태에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기에 그냥 관념의 허구성을 바라보며 살 뿐입니다. 스님, 제가 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도 ‘수행은 내 몸을 다루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거다.’ 하는 것을 항상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몸으로 아무리 수행을 해도 몸 떨어지면 수행도 떨어지고 다 떨어진다. 그러니까 마음을 닦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 뭣고’ 하는 것도 그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이 뭣고’라는 말에 착이 붙으면 끊어질까 봐 두렵고 또는 무기공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이 뭣고! 이게 뭘까?’ 하는 것에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리는 겁니다. 당당히 네가 있으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하는 것하고 ‘이게 뭣고?’ 하는 것하고, 수박을 놓고 ‘이게 뭣고?’ 하고 있는 거하고 그냥 칼로 탁 잘라서 먹어 보는 거하고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깐 놈의 거,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 것을 칼로 잘라서, 죽으면 어떻고 살면 어떻습니까? 이왕지사 배낭 지고 한번 나왔다가 이 모습은 원점으로 돌아갈 건데, 맛을 봐야 먹고 싶기도 하는 생각이 들지 맛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먹고 싶은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일체 만법이 벌어지는 이 세상이 전부 자기로 인해서 생긴 거니까, 자기만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 받아 가지고 세상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이 이치를 꿰뚫어서 알기 위해서는 또 놓고 뭉쳐 놓고 뭉쳐 놓고 그렇게 해 나가야 됩니다.
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그냥 나라는 존재를 세우고 그렇게 보임(保任)을 하지 않으면 역시 또 미(迷)해지니까요. 세상의 도리는 너무나 즐겁고 좋은 세상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기 이전에, 자기로부터 생겼다는 그 점을 상세히 아실 것 같으면 이 세상이 즐겁기만 합니다. 가다가 정히 그것이 사사로이 쓰이는 게 아니고 남이 불쌍해서 쓰인다거나 또는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 쓰인다거나 이런다면 가차 없습니다.
무(無)자 화두를 가졌다, 또 ‘이 뭣고?’ 화두를 가졌다. 어떤 화두를 가졌든지 간에 그 화두는 바로 이름인 것입니다. 또 내가 주인공이라고 부르라고 한 것도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낸 것은 내 마음 안으로 모든 것을 놓고 믿으라는 것이죠. 내 자아를 발견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니까요, 이 바탕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을 화두라고 생각하고 근본에 바로 들이대라. 이것이 근본의 지표가 될 수 있고 바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제사 지낼 때 위패 놓는 거와 마찬가지이고 우리가 또 부처님을 조성해 놨을 때에는 바로 저 부처님의 몸이 우리의 몸이요, 저 부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니 이렇게 알게 하기 위해서 모셔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은 그 화두 든 것은, 우리의 이 몸이 벌써 화두로,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화두로 정해졌는데 바깥에 또 화두를 쥐고 있으니 이거 용납이 되겠습니까?
이거를 비유해서 한번 들어 봅시다. 모든 기계가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쭉쭉 빠집니다. 그런데 기계 한 귀퉁이가 고장이 나 가지고선 만약에 막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뒤따라 나오는 것이 막히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파산이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인간 생활도 바로 놓고 그냥 돌아간다면 그렇게 밀리지 않을 것을, 밀려서 부닥치고 부닥치면서 사람이 고를 겪고 그러지 않을 것을 자꾸 만들어서 자업자득으로 생활을 해 나간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이 공부는 죽고 사는 게 없고 또 생사윤회에 끄달리지 않으며 우리가 자유권을 가질 수 있는 공부입니다. 자기가 뿌려 놓은 씨들도 자기 자석에 의해서, 그 자석의 위력에 의해서 딴 데로 새지 않는 마음, 올바른 마음을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여러분한테는 다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이 육신, 허수아비 같은 육신만 잡으려고 하니까 그것은 안 되는 법입니다. 육신은 개방시키면서 마음으로는 항상 그렇게 자석과 같은 마음으로 서로 잡아당긴다면 그것이 바로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부처님 법이 따로 있고 우리의 생활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부터는 그것을 고치십시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렇게 놓고 참선을 하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오손도손 얘기를 하는 것도 참선이요, 말다툼을 한다 하더라도 참선입니다. 만약에 그 근본을, 그렇게 돼 있는 근본을 아실 것 같으면 우리는 화가 나도 화를 자재할 수 있죠. 놓고 돌아가니까 말입니다. 싸움을 했다고 일 년 이 년, 생명이 다할 때까지 화가 나 있는 분이 있습니까?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웃음도 한계가 있고 우는 것도 한계가 있고 속상한 것도 한계가 있고 잘사는 것도 한계가 있고 못사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고정된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했다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2006-07-18 오전 11:33:59
 
 
   
   
2024. 5.1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