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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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2부 51강 언어에 대한 몇 가지 단상/한국학중앙연구원
길은 늘 옛길이다

1. <장자>에 실린 이야기이다. 제환공이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당에서 수레바퀴를 깎던 노인이 마루 위로 다가서면서 물었다.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습니까.” 제환공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다.” 다들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잘 읽지도 못하는 <타임>지를 옆구리에 끼고 전철을 탄다든지, 아주 어려운, 가령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같은 철학책을 펴들고 누가 보아주기를 기다리던 경험이…. 제환공도 그런 우쭐한 마음으로 수레따위나 깎는 노인에게 자기 수준을 과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수레깎는 노인의 응수는 뜻밖이었다. “그럼, 성인이 남긴 찌꺼기겠군요.” 이 발칙한 대꾸에 제환공이 불끈했다. “네 놈이 감히 나를 능멸해…. ” 황황히 자세를 가다듬은 노인의 대답이 이랬다. “성인의 핵심 노하우는 말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수레바퀴 하나만 해도, 너무 깎으면 헐거워지고, 너무 안 깎으면 빡빡해서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깎는 그 노하우는 저만 알 뿐 자식에게도 가르치지 못해, 이 나이가 되도록 손수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2. 나이가 들수록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크고 깊다는 것을 깨닫는다. 말 이전에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것에 닿으려는 촉수가 길고 날카로와졌다. 입을 믿지 않고 눈을 보며, 눈을 보지않고 전체에서 풍기는 풍채 혹은 기품의 언어를 듣게 되었다.
모든 것은 이미 말 이전에 결판난다. 순수한 정보, 객관적 의미란 없다. 언어는 커뮤케이션을 시작하는 현장에서, 이미 전달자와 수화자의 몸과 함께 전해지는 것이니, 사전에 적힌 죽은 의미는 격화소양, 언발에 오줌누기나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그러니 말을 한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그러자면 그의 삶과 닿아야한다. 그 모든 것이 마음과의 교호, 거기서 이루어진다.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감정에 이입하는 성향이 다르다면, 그리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이 마음의 교호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때 교환되는 말들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공허하게 허공에 떠돌다가 그만 비온 날의 낙엽처럼 땅에 젖어 뒹군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가려가며 말을 해야 한다.
공자가 말했다. “말해야 할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잃을 것이고, 말하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 그 말을 하면, 그 말을 잃게 될 것이다.”
3. 말은 쉽게 버려지기도 하고, 또 쉽게 피상과 왜곡, 오해에 취약하다. 이것이 동서양의 지혜 전통의 공동 인식이었다. 말은 역시 위태롭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붓다의 경험 또한 말로 전해지기 어렵다. 그는 차라리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범천 사함파티가 간곡히 설득하는 바람에, 그는 경험을 말로 전해보기로 작심한다. 그로써 붓다의 가르침, ‘불교’가 있게 되었다.
중생에 대한 그의 자비심이 평면적 언어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법의 바퀴를 굴리게 했다. 그는 이 노파심의 자세를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어가 경험을 피상적으로 혹은 불완전하게 전하거나, 심각하게 외곡할 수 있다는 우려는 불교 집단에 널리 퍼진 것이었다. 그 이후, 불교사의 전개는 말에 대한 불신과 희망이 엇갈린다. 반야 중관은 불신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선은 그 극단적 불신의 논리적 귀결이다.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자는 제자들에게 그것이 어찌 진정 붓다의 마음과 경험을 담고 있느냐고 소리쳤다. 화두를 표방하는 현재 조계종은 따지자면 전형적인 ‘언어 불신’의 계열에 서 있다.
원효는 그것이 편파적이라고 생각해서 일심(一心)의 긍정 설법을 폈다. “진여는 언어를 떠나있지만, 또한 언어에 의지하고서야 드러난다(離言眞如, 依言眞如)”고 썼다. 그것이 원효를 일류가 되게 했다. 언어를 세우고 부수는 입파여탈(立破與脫)이 종횡무진 자유자재해야 큰 교화의 방편을 열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언설을 진리 그것으로 동일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뗏목은 저쪽 강 언덕을 넘는데는 필요하나, 넘고 나서는 필요가 없다! 병이 없다면 약은 없으니, 건강한 몸에 약은 곧 독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불교’ 없이 사는 법이다! “너희들 비구가 내 설법이 뗏목같은 것임을 알면, 법도 오히려 반드시 버릴지어니….” (<금강경> 6장)
뗏목이 필요없다는 것도 틀렸고, 뗏목을 지고가는 것도 우습다. 이 참에 말하자면, 중생들은 앞의 것을 경계해야 하고, 선사나 목사들은 후자를 경계해야 한다.
4. 그러기에 불교는 도그마일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절대적인 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말씀마저도 방편일 뿐이다. 그는 다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뗏목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폈다. 그는 고통을 떠나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나마도 그는 이 길을 자신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는 천만에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 오래된 길’을 다시금 발견했을 뿐이다. 불교의 트레이드마크인 관용과 포용적 정신은 이같은 인식과 풍토의 산물이다. 옛 경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큰 나무들이 빽빽한 숲 속을 헤매던 사람이 옛날 옛적에 고인(古人)들이 지나가던 길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대의 도시가 나타난다. 고대 사람들이 살았던 그곳에는 정원들이 있고, 숲고 연못과 성벽의 기단이 남아있다. 그 길을 따라갔던 사람은 돌아와서 왕과 신하들에게 말할 것이다.
‘왕이시여, 저는 큰 나무들이 빽빽한 숲 속을 헤매다가 고대인들이 다녔던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다 옛 적의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왕과 신하들은 그 도시를 복구하여 그 도시는 다시 번성할 것이다. 나도 그와 같이 옛길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발견한 옛길이란 옛날에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이다.”
길은 오래되었다. 누구나 그 길을 따라간다. 새로운 길 같지만 길은 늘 옛길이었고, 때로 그것은 덤북쑥에 덮여있다.
불교뿐만 아니라 노자도 유가도 그렇게 생각했다. 노자는 ‘옛날의 성인들께서는….’이라고 말끝마다 외쳤고, 유가는 옛적의 문화적 지성적 영웅들을 사모하고 그들을 본받으려 했다. 퇴계는 그 생각을 다음과 같은 시에 담았다. “고인도 날 못 뵈고 나도 고인 못뵈, 고인은 못 뵈고 여던 길 앞에 있네. 여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쩌리(도산십이곡).” 이같은 상고(尙古)적 정신은 지혜의 특징인 바, 유의해야 할 것은 새로운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느림의 미학, 혹은 속도 사이를 간파하는 힘이 필요하다. 근대의 정신은 인류 역사를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동서 현자들은 거꾸로 타락의 역사라고 말한다. 유교는 시대가 흘러갈수록 하류로 더러워지는 시냇물처럼 풍속이 퇴락하고 각박해졌다고 말한다. 불교 또한 말법사상을 통해 지혜는 사라지고 교단과 설법만 남다가, 그나마도 사라지는 때가 오고야 만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럼, ‘지혜’는 멸실되는가. 지혜의 전통도 함께 까마득한 망각 속에 묻혀버리고 말 것인가. <금강경>은 그 회의를 망치로 깨두드리며 말한다. “그렇지 않다, 수보리야, 붓다가 떠나고 후(後) 오백세, 그 오랜 쇠퇴의 시간을 거쳐도 붓다의 말씀은 바래지 않고, 그것을 가슴 깊이 붙들 사람이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불성에 뿌리박고 있어서 인위적으로는 바꾸거나 조작하지 못한다. 불교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류가 또 다른 생물종으로 돌연변이 하지 않는 한, 영원한 가르침으로 법계를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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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8 오전 11: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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