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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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후두후둑 장대비가 쏟아진다. 담장의 비에 젖은 능소화가 붉은 기운을 더하면서 오히려 더 찬란해진다. 땅바닥에 꽃잎 그대로 뚝뚝 떨어진 놈은 흥건한 빗물 속에서도 여전히 자기빛깔이다.
누군가 그랬다. 질 때의 초라함을 보이기 싫다고 한참 피어날 때 그 모습 그대로 뚝 떨어지는 것이라고. 그 늦은 봄날 남녘의 동백꽃이라 한들 이에 비기겠는가.
한참동안 그 꽃잎을 바라보며 빗소리에 함께 취했다.
경청도부(864~937) 선사가 비오는 날 시자에게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인가?”
“빗방울 소리입니다.”
선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리석은 놈이 전도(顚倒)되어 자기조차 잃어버리고 빗소리만 따라가는구나.”
이에 시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어떠신지요?”
시자를 힐긋 쳐다보며 알듯 말듯한 미소를 잠깐 내비치더니 말했다.
“나도 하마터면 나를 잃어버릴뻔 했다.”
그렇다. 깊은 산 속에서 문을 닫아걸고 여름안거가 한참 무르익어 갈 무렵 어김없이 장마철이 온다. 예민하고 명징한 의식 속에서 그 비는 나를 잃어버리게 할 만큼 매력적인 소리임을 인정하는 선사의 솔직함이 오히려 더 빛나 보인다.

앙산혜적(803~887)선사가 비 오는 날 어떤 납자에게 말했다.
“좋은 비(好雨)로구나.”
“네에~ 참 좋은 비입니다.”
또 걸려들었다. 바로 되돌려 다시 비수가 되어 그대로 가슴에 꽂힌다.
“그 좋다는 것은 비의 어느 부분에 있느냐?”
납자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추스렸지만 질문에는 여전히 묵묵부답.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답을 알고 싶으면 그대가 나에게 다시 묻거라.”
물론 이는 정해진 수순에 따른 것이다.
“좋은 비라고 하였는데 그 좋은 것이 비의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선사는 아무말없이 비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일 뿐이었다.
빗소리에 홀리면서도 그 홀림은 그저 단순한 홀림이 아니라 주객(主客)이 합치되듯 나와 빗소리가 둘이 아닌 경지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안거 제도는 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고타마의 제자들은 우기에도 아랑곳 않고 돌아다니며 나뭇잎을 상하게 하고 개구리 지렁이를 밟아 죽인다’고 비구들의 ‘무자비’를 비난했기 때문이다. 설사 사문들의 발밑이 아니더라도 개구리는 빗속에서 뱀을 만난다면 괴로운 중생이 된다.
경천 선사가 비오는 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물었다.
“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인가?”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소리입니다.”
“중생의 삶이 고(苦)라고 하더니, 정말 괴로운 중생이 있구나.”
이 이야기는 동산양개(807~869) 선사에 의해 버전이 업(up) 된다
“뱀이 개구리를 삼키고 있는데 구하는 것이 옳은가? 구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구하자니 (무서워서?) 엄두가 나지 않고 그대로 두자니 자비심 없는 짓이다. 생태계의 순환구조에 인위적으로 끼어드는 것이 과연 연기(緣起)법칙에 맞는가 하고 잔머리를 굴리기도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는 침묵이 제일이다. 그러자 선사가 대신 대답했다.
“구해도 두 눈이 멀어버릴 것이며, 구하지 않는다면 형체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구하겠다는 마음을 내면 이는 피아(彼我)를 분별하는 까닭에 내 지혜의 눈이 멀어져버릴 것이요, 구하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불쌍한 개구리는 결국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2006-07-18 오전 11: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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