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예문>은 1748년(영조24년) 간행된 <범음집(梵音集)>에 실려 있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그녀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것 자체가 그녀의 신심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관음예문>속에서 수행자의 모습도 동시에 읽어낼 수 있다.
지나간 겁동안 쌓고 지은 죄/ 홀연히 한 생각에 없어지이다/ 블꽃이 마른 풀을 태워버리듯/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지이다
소소매의 선시 실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소동파와 황산곡(黃山谷)이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놀고 있었다. 산곡 황정견은 황룡조심(黃龍祖心)선사의 법을 이은 시인거사인지라 법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소소매가 등장했다.
둘 다 아연 긴장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심심하면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서 사람 떠보기를 좋아한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밝은 달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윽고 시를 읊기 시작했다.
산들바람에 가녀린 버들(輕風□細柳)
으스름 달빛에 매화(淡月□梅花).
그러고나서 두 사람을 보고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며 한 수 가르침을 청했다. 네모 안에 어울리는 글자를 넣어달라는 거였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실력테스터용 시험문제에 가깝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먼저 황정견이 ‘무(舞)’와 ‘은(隱)’을 이용해 답안을 작성했다.
산들바람에 가녀린 버들이 춤추고(舞)
어스름 달빛에 매화가 숨었네(隱).
하지만 돌아온 소소매의 평은 “너무 통속적이다”는 것이었다. 점수를 제대로 받지 못한 그 광경을 보고서 오빠인 동파가 몇 번 잔머리를 굴린 끝에 ‘요(搖)’와 ‘영(映)’을 넣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搖) 가녀린 버들
으스름 달빛에 비치는(映) 매화.
누이동생은 이를 보고는 더 혹평을 했다. “매우 실질적이군요. 이전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많이 쓴 글자라 새로운 맛도 없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입맛을 다실 뿐이다. 또 당했군. 그럼 네가 한번 해 봐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扶)’와 ‘실(失)’을 넣었다
산들바람은 가녀린 버들가지를 붙들고(輕風扶細柳)
으스름 달빛은 매화를 사라지게 하네(淡月失梅花).
두 사람 모두 “절묘하다” 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소소매가 보탠 두 글자는 보통사람의 눈에도 소동파와 황정견의 안목보다도 문학적으로, 선적(禪的)으로 한 수 위였다. ‘부(扶)’자를 사용한 것은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바람의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었고 ‘실(失)’자를 이용하여 담담한 달빛과 매화를 하나로 만들어 버린 솜씨를 보였다. 영락없이 드러내면서 숨기는 현은(現隱)의 중도법문이 된 것이다.
소소매를 생각하니 난설헌(蘭雪軒) 허씨(許氏)가 떠오른다. 작은오빠 허봉은 어린 난설헌에게 글을 가르쳤고 출가이후에는 붓도 선물하고 두보(杜甫)의 시집도 보내주곤 했다. 소설 <홍길동>의 저자인 동생 허균은 ‘자기보다 누나가 더 글을 잘 쓴다’ 고 한 바 있다.
그는 누나가 요절한 후 남아있는 시들을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보냈다.
중국에서 난설헌 시집이 간행되었다. 1711년에는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朗)에 의해 일본에서도 시집이 나왔다. 이미 그때 아시아 문화권을 아우르는 대 시인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현재의 서방 만난 것을 원망하며 한 생애를 스스로 마감했다. 주변사와 가족사가 받쳐주지 않으니 소소매처럼 여유있는 선시(禪詩)까지 남길 여력은 없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