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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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에서 나오는 그것을 일심에다 놔라!
부처님의 대원경지란

내 주인공이라는 주장자 하나를 가지고 살라!


부처님의 대원경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다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화통하게 좀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이 닦지도 않고 그런 거부터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이라는 게, 내가 항상 얘기했듯이 모든 억겁 천 년 전서부터 자기 습을 짊어지고, 종문서를 짊어지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게 닿기만 하면 타 버리는 그런 이치에 도달해 있으면서, 그대로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그것을 모르니까 그것을 되집어서 그 높은 경지가 따로 있는 것처럼 자꾸 묻는다 이겁니다. 자기가 알아야 할 거를 알아야 ‘아, 이거는 높게 있는 게 아니고 얕게 있는 것도 아니로구나. 이건 바로 나한테 있는 거로구나.’ 하고 알 텐데 말입니다. 만약에 나한테 있는 걸 알게 되면 타의에도 내가 있는 걸 알고, 저 사람이 나 아님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또 나와 더불어 같이 나투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런다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말로 해서 아는 걸로 삼천대천세계의 근본, 그 본처를 갖다가 꿰뚫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게 물어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님으로써 우리가 학식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자기 주인공에서 만법이 나오는 것을 자기 주인공에 되놓는다, 맡겨 놓는다. 맡겨 놓지 않고는 도저히 그 습을 뗄 수가 없습니다. 또 그 습이 없다면 인간 자격이 없죠. 본래는 망상이 망상이 아니고 습이 습이 아니지만, 그 습이 있기 때문에 문이 가려졌고 눈도 가려지게 되고 자기 마음을 가리는 거예요, 본래 문은 없건만. 그러니까 일심에서 나오는 그것을 일심에다 놔라 이겁니다. 놓으면 홀연히 거기에서 다 알게 돼서 그때는 점검만 하고 돌아가면 될 걸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날까지 말이 필요 없으면서도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얘길 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쯤은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또 살아가면서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이렇게 묘한 법이 나와서 내가 움죽거리고 있는지 그것을 모른다면, 항상 얘기했듯이 내 몸 하나도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없는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거죠.
물론 부처님 법은 그대로, 우리가 아픈 것도 법 안 아픈 것도 법, 죽는 것도 법 사는 것도 법이라고 해서 ‘이것이 진리다’라고 얘기를 했지만,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에서 깊숙하게 자기 주관을 세워서 지혜가 넓은 사람들은 좀 유유하게 살아나가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아주 마음이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남한테 항상 이렇게 밟히고 또는 거절당하고 또 화목하지 못하게 되고 또 상대방하고도 거리가 생기고, 이렇게 함으로써 적합하게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가 없는 그런 걸로 인해 자꾸 싸움이 생기고 가정파탄까지 되는 이런 문제들이 많이 생긴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러한 문제들이 생기는 원인도 바로 자기거든요, 누구의 탓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우리가 아픈 것도, 공부한 부처님께서도 아프셨으니까, 중생들을 위해서 그것을, 그대로가 법이라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 보이셨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육신은 바로 내 주인의 거고 내 주인의 시자고, 내 주인으로 하여금 형성됐으니까 주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모든 일체 만물이 다 이렇게 변질되고 바숴지고 이러는 것이니라.’ 하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방편을 써서 잠깐씩 이렇게 하셨단 말입니다. 그건 방편으로 쓰신 거지 자기가 아파서 그런 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몇 년씩 아프다가 고통을 받고 만약에 옷을 벗는다면 그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평화롭고 참, 티끌 하나 묻지 않게, 내가 생동력 있게, 삶을 보람 있게 그렇게 살면서도 후딱 옷을 벗어 버려서, 잠시 잠깐 그것도 아프지 않게 아팠더라면 상대방들도 고통을 받게 하지 않고 나도 고통 받지 않고, 이렇게 진리가 이러하다 하는 것만 가르쳐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살아나가면서 야, 불법이 이렇고 저렇고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얘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도 다 옳죠. 그런데 옳은 건 뭣 때문에 옳다고 하느냐. 이 세상엔 자라는 애들이 있고 지금 나온 애들이 있고 또 미생물에서부터 거쳐 오는 생물이 있고 동물이 있고, 무정물이 있고 식물이 있고, 모두가 천차만별로 그런 생명들이 있는 거예요. 그 생명들이 있어서 점차적으로 올라오는 그 뜻을 볼 때 우리가 언제 적의 부모고, 언제 적의 자식이고, 언제 적의 친척이고 그랬던가. 모두가 이럭해서 차원대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 흩어졌다가 내가 깡통의 차원이라면 깡통끼리 모일 거고 넝마끼리 모이고 금대로 모이고 이렇게 모여서 살다가 또 흩어지는 거예요. 흩어졌다 모였다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것을 뭐 그렇게 잘됐다 못됐다, 이게 정법이니 사법이니 이거를 따지고 들어야만 하겠습니까.
어린애 적엔 모를 거고 좀 컸으면 철을 알 거고 더 어른이 됐으면 더 철이 나서 이 세상살이를 다 알 거고,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것이 늙었으면 애 노는 데서는 애가 돼 주고, 그럼 말썽이 없을 것 아닙니까? 젊은이들 노는 데는 젊은이가 노는 대로 젊은이가 돼 주고, 늙은이가 있으면 늙은이가 돼 준다면 얼마나 겸손하고 자비하고, 그 모두가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나도 몰라준다면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알면 아는 대로 나도 알아주고, 나 아님이 없는데 말입니다.
내가 항상 그러지 않습니까. ‘법당에 올라가도 그 부처님 몸이 내 몸이요, 바로 부처님의 마음도 내 마음이니 둘이 아닌 고로 거기에서 절을 삼 배를 올려도 자삼보에 그대로 하는 것이다. 글로 한데 합쳐도 되고 일로 한데 합쳐도 되고, 이리 가도 하나고 저리 가도 하나다.’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하게 되면 그 하나마저도 내세울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그것은 부처님의 뜻을 그대로 우리는 세존의 자리에 할 수 있다는 그런 결론입니다. 그것이 자유인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모든 것이 다 과정이고 아픔이 있어야 큰다고 하지만 아프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스님, 어떻게 공부를 해야만 이 시절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며 마음에 끄달림 없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게 나같이 미련스럽게 사시란 말입니다, 나같이 미련스럽게. 너무 세상이 복잡하게 많으니까 그냥 복잡하게 많은 걸 그냥 하나로 둥글려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복잡하게 사실 게 없단 얘깁니다. 그리고 또 복잡하지 않게 살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복잡하지 않죠. 이거는 그냥 어중이떠중이 너무 일어나는 게 많아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쩔쩔매니, 그냥 어디 서 있든 서 있는 것도 입선이고 앉아 있는 것은 좌선이고 드러누워도 와선이고 일을 해도 행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으로 둥글려서, 법당에 가면 한 번 이렇게 절을 할 때 내 자불이 있기 때문에 만 부처를 거기다 한데 합쳐도 된다 이겁니다. 그런데 만 부처를 한데 합치기보다도 더 정확한 것은 뭐냐 하면 일체를 다 그냥 빼놓은 사이 없이 해야 요만한 것 하나도 빠지지 않죠. 만약에 이것을 다 세어서 집어넣으려면 모르고 복잡한 놈은 못 살아요, 이거 이거 세어서 놓으려면. 셀 수도 없죠, 또. 그러니까 아주 나같이, 못난 나같이 그렇게 편안하게 사시란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죠. 법당에 올라가면 법당에 삼 배를 올리고, 또 급하면 일 배를 올릴 때에 둥글려서 올리고 둥글려서 또 여기다 놓고 나가라 이렇게 말하죠. 그걸 어떻게 들었습니까? 여러분이 5년이고 10년이고 됐다고 그래도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고 다녀요. 왜 법당에 들어가면 저 부처님도 내 모습과 둘이 아니라 하는지 그걸 모르는 겁니다. 그렇게 아시라고 노래도 만들어 놓고 그랬는데,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내가 진정코 믿는 곳에 딱 집어야 결정 나는 것이지, 딱 집지 않고 어떻게 결정이 납니까?
이게 보이는 데도 여러분이 계시고, 보이지 않는 데도 더 많다면 많죠. 그런데 그것을 양쪽 틈바구니에 이렇게 비싯비싯 다니면서 어떻게 사시렵니까? 내 주인공이라는 그 주장자 하나를 가지고서 살면 지나가다가도 좋은 일 해 주고 언짢은 일은 언짢은 일대로 좋게 펴 주고, 이렇게 그냥 살면 얼마나 편안해요? 세세생생, 아니 끝간 데 없이 가도 ‘저거 내게 원수야.’ 이러지도 않을 거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이름해서 부처예요. 그러니까 너라고 하는 자체가 없다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라 이런 말이에요. 너라는 게 영 없는, 그런 자체가 부처란 말입니다.
여러분, 공부를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 보세요. ‘왜 그렇게 주인공을 찾아도 별 볼일 없나.’ 이렇게 따지지 마시고요. 그리고 내 말을 편치 않게 해 놓으면 내 마음은 항상 편치 않아요. 그러니까 편치 않게 해 놓고 편치 않게 살지 마시고 편안하게 해 놓으세요. 이건 자기 죽을까 봐 미리 편안하게 못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죽으나 사나, 살다가 이따 죽는대도 편안하게 해라. 편안하게 말을 해라. 죽는 게 뭐 그리 아까우냐. 아, 사실이지 죽는 게 뭐가 그리 아깝습니까? 바로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이 모습 활짝 벗어 버리고선 내 갖고 싶은 대로 가질 텐데 뭐 걱정입니까? 하여튼 편안하게 거짓 없이, 큰 말이든지 작은 말이든지 야단을 맞든지 어떻게 되든지 죽게 되든지 그것을 생각지 말고 편안하게 거짓 없이 사시란 말입니다, 모두가. 이익하게 살릴 수 있는 거짓말이 있죠, 또.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금이라도 걸레처럼 짜서 이렇게 마루에다 놔두면 걸레로 그냥 쓰기 때문에 집어 가지 않습니다. 그걸 금이라고 갖다 감춰야 그게 집어 가지죠. 근데 감추지 않고 내놨으니까 즉, 금을 내놨으려니 이렇게 생각을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모두 편안하게 사시고 이 도리를 ‘아, 관하라는 게 다른 게 아니구나. 바로 내 원소로구나. 내 공체 원소구나. 그러니까 에너지 주장자구나. 내 자불성이구나. 내 자불성! 그러니까 꼭 나는 나를 믿어야 되겠구나. 누굴 믿겠느냐.’ 이렇게 하세요. 이 세상에 누굴 믿을 게 있습니까? 자기밖에 믿을 게 없어요. 그런데 그것도 마음으로 자기를 이렇게 믿는다는 건 믿는 게 아니죠. 자기 진짜 원소 말입니다, 생명력을 그대로 자불이라고 생각하고 믿으세요, 그냥. 진짜로 믿고 어떠한 통탄한 일이 생겨도 ‘너만이 그걸 해결할 수 있어!’ 하고 맡기세요.
마음을 나쁘게 하고 그걸 나쁘게 진행하려고 그런다면 막아 나가는 것도 부처님 법입니다. 잘못될 일이라면 막습니다. 잘못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막습니다. 근데 이걸 굳이 해야겠다 그러면 해야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도 속이지 말고 그냥 그렇게 정성스럽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또 넘어가죠. 넘어가게 되게끔 되겠죠.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고통이 있다 없다, 뭐 그러고 그냥 애쓰지 마세요. 알고 보면 하나도 나를 내세울 게 없는 거예요. 나 아닌 나가 있으니까요. 나 아닌 나가 나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체 만법을 가지고 있고 일체 화현의 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 나 아닌 나로 인해서 모든 것을 살게끔 하세요.

은산철벽을 뚫으려면


마음에는 문도 없고 벽도 없다고 했는데 왜 은산철벽을 뚫어야만 한다고 하시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우리가 꼭 이 공부를 해야겠다는 조건은 뭐냐. 우리는 회전을 못해요. 미지수의 세계의 그 뜻을, 무(無)의 세계의, 즉 말하자면 움죽거리지 않고 움죽거릴 수 있는, 손을 누르지 않고 손을 누를 수 있는 용(用)을 할 수 있어야만 되는데, 그래야만이 유(有)에, 무(無)에 이것이 걸리지 않을 텐데 우리는 유의 세계만 아니까 항상 벽이 있는 겁니다. 이 벽이 있는 것을 은산철벽이라고 해요. 말을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그냥 사방이 탁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걸 뚫어야 하느냐 이겁니다. 본래 막힌 것도 아닌데, 왜 막혔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그 사방이 다 막히지 않은 걸 알려면 네 마음부터 알아라 하는 겁니다. 네 마음을 내놔 봐라, 네 마음이 막혔나 안 막혔나. 네 마음을 내놔 보면 그것이 양쪽으로 막혔는지 두 쪽으로 났는지 알 거 아니냐 이겁니다. 그런데 내놓을 수 없는 반면에 막히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내놓을 수 없기 때문에 막히지 않았다 이거죠. 맘대로다 이겁니다. 막히게 하는 것도 자기 마음이요, 막히지 않게 하는 것도 자기 마음이다 이거예요.
그런데 사량으로만 그것을 알아서 아니 되니까, 살아나가면서 하루에 조용한 시간을 좀 갖는 것이 좋습니다. 때에 따라서 나는요, 언제나 이날까지 저녁에 12시가 되든 1시가 되든 그냥 눕는 법이 없어요. 왜? 나는 습관이 그렇게 됐어요. 늦든지 안 늦든지 그걸 상관할 것 없이 눕기 전에는 한번 음미해 볼 수 있는 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무슨 생각이냐. 그냥 조용히 앉아 있고 싶은 생각. 그래서 조용히 단 십 분이라도 앉아 있다 아주 홀가분한 그 마음으로다 눕거든요. 24시간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 한 십 분 동안 앉아 있는 동안에 다 훨훨 풀리는 거예요. 그러면 24시간이 10분이라는 얘기예요. 그럼 10분이 뭐냐. 10분이 또 1초도 안 되는 거예요. 홀가분하게 없어졌으니까. 하여튼 1초도 안 된 거죠, 24시간이.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초월하는 그런, 그것도 이름 없는 초월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 우리가 하루 동안 이렇게 지내는 것을 사량으로 그렇게 하지 말고, 이걸 처음에 일차적으로 할 때는 항상 모든 걸 거기다 맡기고 맡겨 놓고 믿고…, 그렇게 해나가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 안되니까 내가 이렇게도 가르쳐 줬거든요. 네가 만약에 남자라면 엄마를 생각하든지 즉, 사랑하는 사람을 찾든지, 하여튼 여보를 찾든지, 뭐 그래도 좋다 이겁니다. 그건 이름이니까요. 또 아버지 없는 사람은 아버지를 찾든지, 그게 제 애비니까. 자기 생기기 이전 자기 조상이니까 바로 제 애비죠, 뭐. 지금 여자들은 남편더러도 아빠라 그러죠? 애들도 ‘아빠’ 하는 거보다 ‘아버님’ 하면 정이 덜 드는가 봐요.
그래서 간절히, 여자나 남자나 아무 이름을 불러도 좋으니까, 그것을 좀 더 자기한테, 자기 마음에 진짜로 내가 아주 그리워하는 그것을 이름을 따서 자기, 참자기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서 불러라 이겁니다. 말로만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 생각으로 항상 그것을 사모하고 관하면서 진짜 진실로써 사랑할 수 있다면 거기서 샘물 터지듯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 모든 건 거기다 맡겨 놓는다. 모든 건 맡겨 놓는다는 얘기가 없어도 여러분이 지금 맡겨 놓고 가고 있어요. 맡겨 놓고 가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는 겁니다. 만날 여러분은 쳇바퀴 돌듯 하면서 놓고 돌고, 놓고 돌고, 놓고 돌고….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또 아침에 나갔다가 또 집으로 들어왔다, 요것만 봐도 아시지 않아요?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자 가섭이 웃었다잖아요? 그 웃은 것이, 우리가 만 가지 꽃이 피고 만 가지 향이 나고 만 가지 법을 우리가 그대로 응용하기 때문에 그대로라는 걸, 그대로 얼굴로써 그 꽃을 피운 거죠. 꽃을 든 분이나 꽃을 피운 분이나 똑같이 마음이 맞은 거죠. 그래서 제일착으로 그 법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믿고 놓고 간다. 모든 걸 착을 두지 말고 거기에다가 매사 걸 다 놓는다. 나는 그저 내 주인에 의해서 오고 갈 뿐이다, 달팽이처럼. 그러니까 그렇게 공부를 해 가지고 나, 참나가 탄생이 됐을 때 그때는 체험하면서 정말 미지의 그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진짜 공부가 나오는 것입니다. 본래 탁 터져 있는 그 이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나와 근본으로서의 나


이 몸을 가지고 있는 이것이 ‘나’라고 생각하면서 수십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몸을 이끄는 ‘근본 나’가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이 육신으로서의 ‘나’와 ‘근본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며 어째서 근본 나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지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에 당신이 어느 길을 가다가 당신 친구와 몇 달 만에 만났어요. 만나니까 아주 반갑죠. 반가워서 손을 탁 잡는데 손이 가서 손을 잡는 겁니까, 마음이 가서 잡는 겁니까? 마음부터죠? 그러면 손은 저절로 갔죠? 그러니깐 이 육체가 움죽거리는 건 주인공이 있으니까 그냥 움죽거리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모든 전체 일거수일투족이 다 주인공에서 나오는 겁니다. 주인공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거든요. 그러니깐 불성이다, 또 주인공이다 자불(自佛)이다 이러죠. 나라는 자체는 그저 응용하는 대로, 이 팔이 들리면 들리는 대로 들어 주고 다리가 들리면 들리는 대로 들어 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홈빡 그냥 심부름꾼이에요, 그냥. 절에서 따진다면 시자라고 그러죠.
그런데 따지고 보세요. 심부름꾼을 바깥으로 두었다면 다 못합니다, 시자 노릇을. 보이는 걸로 자기가 시자를 두었기 때문에 그 안 보이는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심부름을 다 하죠. 그래서 모두 안목이 있죠. ‘아, 이분은 정치에 나왔는데 좀 쓸만해.’ 하고, 어떤 사람은 또 누구나가 보면 ‘좀 가벼워서 좀 안됐어. 그 값어치는 좀 못돼.’ 이렇게 말들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벌써 여러분이 다 도인이에요. 그냥 부처예요.
먹는 것도 이게 내가 먹는다고 “아이, 맛있게 먹었어. 참 잘 먹었네.” 이러지만요, 그게 내가 먹은 게 아니라 모두 자기 역량대로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먹으려고 생각을 해 놓고 먹는 게 아니라 반찬이 쭉 있으면 이게 여기서 먹고자 하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그거부터 집어 먹게 되죠. 그게 여러 가지 이렇게 집어 먹게 되면 여기서 소화 기능이 제대로 되는 거죠. 그러면 또 안에서는 좋다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잘 먹었다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모두 할 말도 심부름해요. 말도 자기 말이 아니라 모두 거기의 말이에요. 근데 그걸 모르고 살기 때문에 ‘참 귀하구나. 내가 이렇게 귀한 줄은 정말 몰랐구나. 내가 이렇게 귀하게 부모의 은덕으로서 몸을 빌어서 받고, 내가 이 귀한 원소 자체, 자불(自佛)이라는 원소 자체, 그것이 에너지인데 그 에너지를 알았다.’ 그 에너지의 한 방울에 의해서 이 우주의 에너지를 다 같이 할 수가 있는 한 덩어리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지구에서 살면서 이제는 우리가 너무 써서 에너지가 없어서 살 수가 없느니 뭐 어쩌느니 하고 그러거든요. 근데 그게 얼른 쉽게 말해서 나부터도 못나서 그런 거예요. 내가 보이지 않는 운전수로 산다면요, 보이는 차로만 살지 말고 운전수와 이 보이는 나와 같이 다니면서, 보이는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보이게끔 돼서 이익을 주고, 또 그 안 보이는 데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려면 안 보이게끔 해야만 하죠. 안 보이는 것이 절반 이상 넘는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업을 짓지 마라’ 이렇게 했는데 나는 ‘업이 없다’ 이랬습니다. 업이 없다고 그런 것은 ‘컴퓨터에 업이 있어서 나오는 것을 거기다 그냥 놔라. 거기다 맡기고 그러면 그게 뒤집어져서 그 업이 없어진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생각하기에 달린 거니까 업이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거죠. 사람이 한생각을 잘하면 업이라고 할까 고통이라 할까, 그 고가 그냥 흐스런히 풀어지는 거고요, 한생각을 잘못하면 그냥 오그라지는 거죠, 뭐. 사람이 펼 수가 없고요.
인생으로 태어나서 한번 한 철 이렇게 살아나가는데, 누구나가 다 한 철 살고 죽지 않아요? 누구나가 한 철 사는 것이 탤런트들이 역할 하는 것과 똑같거든요. 그래서 막이 내리면 그건 다 지나간 과거가 되잖아요, 우리가 한 철 사는 게. 그러니까 그 한 철 살아서 어차피 죽고 어차피 남과 같이 똑같이 그렇게 할 거, 어차피 한 철인데 내가 열심히 해서 한번 뛰어넘어 보겠다, 그렇게 회향을 하겠다 한다면, 그렇게 결심만 한다면 그런 것들이 다 문제가 아니 될 겁니다.

한 번 죽을 때의 변화


스님께서는 저희에게 세 번 죽어야 하는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저희는 한 번 죽을 때의 변화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주인공 공부를 하여 단계적으로 죽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그 단계조차도 그냥 하나로 들어가야 되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내가 항상 얘기하죠. 나를 발견할 양으로 모든 걸 거기다 놓고 들어가면서 하는 것이, 모든 걸 한군데다 놓고 내가 고정된 게 없이 그렇게 돌아가니깐, 내가 쑥 없어지죠? 생각을 해 보세요. 아버지로 남편으로, 뭐 이걸로 저걸로, 한마음의 심봉으로 모든 게 매사에 돌아가니까 그 심봉을 따진다면 어느 편에 설 수도 없으니까 없는 거죠. 아이, 심봉은 어느 편에 설 수도 없죠. 그냥 돌아가는 맷돌에 의해서 그냥 우뚝 섰으니까, 어느 편에 선 곳도 없잖아요? 그러니깐 바로 거기까지 침투할 때까지 죽어야 한다. 그 어떤 걸로 세울 수 없는 것이, 그 도리를 아는 것이 죽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죽어서 나를 발견하는 겁니다.
또 두 번째, 내가 죽어서 둘 아닌 도리를 알고. 세 번째, 내가 죽어서 둘 아니게 나투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왜, 법신ㆍ보신ㆍ응신으로서 모든 그 나 아님이 없이 나투는 거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돼지를 건지시려니까 응신이 돼 가지고 돼지한테로 들어가서 너무 오래 있으면 물들까 봐 걱정이 된다는 그런 말도 있죠. 돼지를 건지려면 돼지가 돼서 들어가야 저항력을 느끼지 않지, 돼지가 아니라 사람이 들어가는 걸로 돼지가 알면 저항력을 느껴서 못 받아들이죠. 뱀도 그렇고 짐승도 그렇고, 곤충도 그렇고 저 목신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용신은 용신이 돼서 들어가야 용신이 째깍 받아들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체 응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죽어서 나를 발견하고, 또 두 번 죽어서 둘 아닌 도리를, 모든 전체가 둘 아니게 돌아감을 알고, 세 번 죽어서 모두가 나 아님이 없이, 내 아픔 아님이 없이 나투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세 번 죽어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이렇게 깨닫고 본다면, 이게 깨닫는 것도 수월합니다. 아주 편리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20년 30년 있어도 ‘이게 뭣고?’ 하고서, 예를 들어 수박을 놓고서 ‘이게 뭣고?’ 하고 의정을 내어 아무리 굴려 봐도 수박은 수박인데 맛을 모른다 이겁니다. 그냥 무조건 하고 죽고 사는 것을 버린 채 그냥 깨뜨려서 맛을 보는 것이 바로 일 단계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돈이 아니면 우리 전체 식구가 죽는다 하더라도 겁내지 않고, 돌 위에 세워놔도 살아요, 이 도리를 발견하면.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공은 어떡하든지 먹이고 입히고 어떡하든지 자기 몸을 건강하게 이끌어서 끌고 가는 겁니다.
잠시 산다 하더라도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면서, 갈 때는 콩깍지가 익어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툭’ 콩이 떨어지듯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를 잘못해서 익지를 않으면 콩깍지가 익지 않은 것과 같아서 죽을 때도 그냥 병고에 시달리고, 그 콩깍지 속껍데기가 붙어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냥 고생을 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잘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이 생에서 콩깍지가 툭 떨어지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각자가 다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006-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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