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하고 승복 입은채 도시 곳곳서 구걸
정부 협조 요청에 불교계 자율규제 노력
말레이시아를 자주 방문하면서 그곳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그곳에 2년 가까이 근무하던 1980년대 초반과 1990년대 초반,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의 달라진 모습을 눈여겨보게 된다.
특히, 말레이시아 불교계를 이끌고 있는 담마난다 스님의 저서 두 권을 번역, 출판한 인연이 있으니 여행 틈틈이 그곳 불교의 흐름에 더욱 관심을 갖고 주목하게 된다.
지난 3월, 이 난을 통하여 간단하게 소개하기도 하였지만 말레이시아에도 ‘새로운 불교 바람’이 불고 있다. 식자층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무슬림을 비롯한 타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눈’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나무아미타불’을 새긴 스티커를 앞뒤 창문에 붙인 승용차가 많아진 것도 최근 몇 년 사이의 변화이다. 불자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긍정적 변화로 들어온다.
그런데 세상만사가 그러하듯이, ‘밝음 뒤에는 어두움’이 그리고 ‘긍정 뒤에는 부정’이 뒤따르게 되는 모양이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채 구걸을 하는 중국계 사이비 승려들을 도시 곳곳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것도 최근에 일어나는 변화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길가는 사람들에게 ‘관세음보살’님이나 ‘아미타불’ 상을 인쇄하여 코팅한 명함 정도 크기의 물건을 건네며 보시를 요구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고 해도 이들에게서 ‘승려’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지난 두 달 동안은 이들이 서울의 조계사 근처에도 나타나 똑 같은 구걸 행각을 벌이는 것을 본 적도 있다. 하긴 이들에게 한국보다 더 좋은 사업 조건(?)을 갖춘 나라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단순하게 보시를 요구하거나 구걸 행각으로만 끝을 냈으면 큰 문제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의 일간지 ‘베르나마(Bernama)’ 6월 18일자 보도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내무부 차관인 탄차이호(Tan Chai Ho)가 직접 나서, “외국에서 와서 불법적으로 보시를 요구하고 불교의 이미지를 퇴색시키는 사이비 승려들을 강력 단속하여 구금, 추방하라”는 지시를 전국 경찰과 이민국에 내렸다.
이 신문 기사에 따르면, 사이비 승려들은 사람들의 운수를 점쳐주고, 복권 번호를 예측해주거나 심지어 지방 신문에 광고까지 낼 정도로 대담해졌고,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언론에 대하여도 이들 사이비 승려들에게 광고지면을 할애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사이비 승려를 단속, 추방하는 것은 필요하고도 당연한 조치이다. 그곳에서 이런 조치가 가능한 것은, ‘사이비 승려(似僧)’와 ‘진짜 스님(眞僧)’을 구별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님들이 평소 수행자의 위의(威儀)를 갖추어 불자들뿐만 아니라 타 종교 신도에게서까지 존경을 받는 곳에서는 ‘사이비 승려’를 쉽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계에서도 정부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자율 규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배경도 한 몫 작용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진승’과 ‘가짜, 사이비 승려’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신심 깊은 신도들은 “부처님께 보시를 올리는 것이지, 스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다”며, ‘사이비 승려’임이 분명해 보이는 이들에게도 ‘도움’을 준다. 이 신도들은 ‘복을 짓는다’고 여기지만 실은 ‘부처님 가르침을 퇴색시키는 반-불교적 행위’일 뿐이다.
각 종단에서도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이들의 출가를 받아들이고 ‘계율 위반자’들에 대한 징계가 없다보니,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인데, 정부에서 나서서 이들을 단속할 생각인들 낼 수 있겠는가. ‘사이비 승려’ 단속에 나서는 말레이시아 정부와 불교계에 거는 기대가 큰 것도, 우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