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제가 찾아간 절은 마침 여러 법회가 봉행 중이었습니다. 평소 조용하던 절에 사람들의 왕래가 이어졌고 전각마다 목탁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대웅전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선원에서는 한참 안거중인 스님들이 점심 공양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느라 묵묵히 경내 이곳저곳을 포행 중이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절은 수행하는 스님들과 법문 들으러 온 신자들로 복닥복닥해야 절 맛이 납니다.
한바탕 야단법석이라도 치른 듯 회오리바람 일으키며 사람들이 떠나가자 후원 수돗가에는 설거지감만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대중들 점심 공양 챙겨주느라 정작 공양주보살과 도와주러온 신도들은 아직 식사도 하지 못한 채 저 태산같은 설거지를 어찌 해결하나 망연하게 손 놓고 있는데 누군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용감하게 설거지통 속에 두 손을 쑥 집어넣습니다. 주지스님이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아이고, 스님, 그만 두십시오.”
“제발 저리 좀 가 계십시오.”
신도들이 놀라서 황급히 달려들어 주지스님을 설거지통에서 떼어놓으려 하지만 스님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후딱 해치우세, 후딱.”
보다 못해 공양주보살은 와락 신경질까지 부릴 정도였습니다.
“저리 좀 가시라구요. 옷 버리시잖아요!”
그래도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 내가 도와줄 테니 어서 끝내고 공양들 드시게.”
맥 놓고 있던 보살님들은 주지스님 손에 그릇이 닿기 전에 얼른 얼른 빼앗아 일사천리로 설거지를 해나갔습니다. 순식간에,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많던 그릇들이 깨끗하게 씻긴 뒤 가지런히 엎어졌습니다.
주지스님이 체통도 없이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고, 공양주보살의 짜증을 받아주는 모습은 평소 ‘주지스님은 친견하기 어렵다’는 재가불자의 선입견을 단번에 날려버렸습니다.
게다가 선원에서 정진중인 젊은 스님들이 모습을 보일 때마다 행여 불편한 구석은 없는지 근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오가는 불자들에게 일일이 차를 대접하며 근황을 물어가면서도, 때맞춰 열리는 법회마다 가사 장삼 다 갖추고 여법하게 봉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지? 아이고… 그건 머슴 노릇하는 자리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스님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번거로운 일을 끌어안는 자리이다 보니 <선림보훈>에서는 아예 주지 노릇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요령을 일러주고 있을 정도입니다.
“주지는 세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일이 번거로워도 두려워 말고, 일이 없다 해서 굳이 찾지도 말며, 시비분별을 말아야 한다.”
“주지 소임을 사는 데에는 어짊·총명·용기의 세 가지 요령이 필요하다. 어진 자는 도덕을 행하여 교화를 일으키고 상하를 편안하게 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총명한 사람은 예의를 지키고 안위(安危)를 식별하며 훌륭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살피고 시비를 분별한다. 용기 있는 사람은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고, 한번 했으면 의심치 않으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이를 반드시 제거한다. 이 세 가지를 다 갖추면 총림이 일어나고 하나가 모자라면 기울 것이며, 두 가지가 부족하면 위태롭고, 세 가지를 하나도 갖추지 못하면 주지의 도는 폐지될 것이다.”
“훌륭한 주지는 덕을 길러서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베풂으로써 덕을 지닌다. 덕스러우면서도 은혜를 기를 수 있으면 굴욕스럽지 않고, 은혜로우면서도 덕을 실천하면 은택(恩澤)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덕과 은혜가 함께 쌓여가며 맞물려 시행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옛 성인께서 수행자들이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총림을 세워 그들을 머물게 한 뒤에 주지를 뽑아 통괄하게 한 것”이 주지 소임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지 소임은 사리사욕을 떠나 사찰의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허드렛일에 종일 힘을 쓰는 머슴노릇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불조(佛祖)의 맥이 청청하게 그 절속에 살아 숨 쉬도록 납자들을 맞아들이고 키우는 데에도 일가견을 지닌 CEO(최고경영자)의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요즘 불교계 신문에 연일 오르내리는 사찰의 주지 선출과 관련한 기사를 보자니 자못 기대가 커집니다. 묵묵하게 머슴 노릇할 청정하고 유능한 CEO인 ‘주지’-과연 어느 분이 제격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