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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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부 47강 자심여래(自心如來)의 자오자각(自悟自覺)/한국학중앙연구원
책에 쓰인 글이 곧 너는 아니다

지난 강의에서, 혜능의 ‘또 다른 사상(四相)론’ 가운데 첫번째 ‘자아의 환상이 없음(無我相)’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두번째는 ‘내 몸이 없음(無人相)’이다. 이 신체란 흙과 물, 불과 바람의 사대(四大)로부터 온 것이며, 이것은 이윽고 다시 본래 온 곳으로 흩어질 것들 아닌가. “아하, 어리석구나 내 몸 아닌 것을 그토록 애면글면했다니...” 그 연기법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세번째는 ‘중생의 징표가 없음(無衆生相)’이다. 혜능은 이를 “생멸심(生滅心)이 없다”로 정리했다. 이 말은 섬세한 유의를 요한다. 마음은 식은 재, 썩은 고목이 아니라서, 계기에 따라 정황에 따라 반응하고 행동한다. 살아있다면 그 ‘일어나고 멸하는 과정’은 당연하고 자연하다. 장자는 이를 숲 속의 바람소리, 그에 응해 일어나는 수많은 구멍과 악기들의 연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혜능이 말하는 ‘생멸심’은 이 자연의 반응과는 십만팔천리, 전혀 다른 것이다.

생멸심이란 무엇인가
요컨대 생멸심이란, 자아에 토대(住)를 두고 추동된(生) 상념과 정념(念)의 출몰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기적이면서 인위적이기에, 부자연스러우며, 결국 타자와 교감 없이 냉담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작은 일 하나에도 자기 이해관계를 고집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몰라라 한다. 빚진 것은 기억하고, 받은 것은 까맣게 잊는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사전에 까마득히 없다.
수도인은 생멸심의 출몰이 더디고, 성인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 그래서 언필칭 ‘고요하다’고 일컫는다. 수행과 더불어 상념이 줄고, 말은 느려지고, 행동에는 여유가 있다. 혹, 어지러운 상념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금강경>의 표현대로 일래(一來)라, 한번 왔다가 그만 스러질 뿐, 악착같이 들러붙어 있거나, 반복 강화되지 않는다. 이것은 뇌파 실험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보통의 관찰력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생멸심은 ‘중생’의 징표이고, 수행과 더불어 이 출몰과 번잡이 점점 가라앉다가, 마침내 이 부글대는 거품이 영원히 멈추는 경지가 온다. 원효가 <대승기신론>에서 ‘큰 바다’로 비유한 것이 이것이다.
네번째는 ‘나이란 없음(無壽者相)’이다. 내 몸이 없다면, 이땅에서 영위하는 생명의 길고 짧음이란 도무지 우스울 것이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있는 것은 순간의 영원뿐이다. <금강경>의 마지막 구절, “꿈같고, 환영같고, 물거품같고, 그림자같고, 이슬같고, 번개같고(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가 알리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삶에는, 그렇다, 시간이 없다.

불공(不空)의 반야바라밀
혜능은 덧붙인다. 사상(四相), 즉 이들 네 가지 ‘이미지’를 꿰뚫고 들어갈 때, 그 모든 것이 자아의 환상이요 그림자였음을 ‘깨닫는다.’ 지혜의 눈 법안(法眼)은 이미지와 소문, 매스컴과 선전,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는 차가운 통찰력이다. 불교는 이 곡절을 휘몰아 공(空)이라는 한마디말로 압축했다!
공(空)이란, 혜능의 표현을 빌리면, ‘유(有)와 무(無) 사이에서의 오랜 방황’을 끝내는 일이다. 공(空)은 이처럼 자신을 비우고 오랜 습관을 넘어서는 작업이지만, 또 한편 불공(不空)이라, 가득차 있기도 하다. <대승기신론>이 이 두 측면을 동시에 다루는 것을 기억할 것인데, 혜능은 이 불공의 반야바라밀을 특유한 돈교 어법으로 표현했다. “자심여래(自心如來)는 자오자각(自悟自覺)이라, 번뇌와 망념을 여읜 이 마음에서, 복락이 스스로를 무한히 펼쳐간다.”
혜능의 설법은 이어진다.

법상도 비법상도 없다니
“무법상(無法相), 즉 ‘법상(法相)이 없다’는 말은 이명절상(離名絶相)이라, 진리와 그 몸이 명칭을 떠나 있고, 이미지와 절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무비법상(無非法相), 즉 ‘비법상도 없다’고 말한 것은 ‘반야바라밀의 진리가 그럼 없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반야바라밀의 진리가 없다는 말은 진리를 비방 훼손하는 짓이다.”
- 이 반야바라밀의 축복에는 이름이 없다! 이 ‘대승법’에 이름을 붙이거나 이러쿵저러쿵 따지다보면, 그 축복은 자신을 떠나 껍데기만 남는다. 이는 흡사 생화와 조화의 차이와 같다. 맞선에 끌려나온 남녀와, 사랑에 빠진 남녀의 차이같은 것이라고 하면 비슷할래나. 제발 책에 쓰인 글을 자기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주변에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

<금강경> 5절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則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어째서냐, 만약 이들 중생들이 사물에서 이미지(相)를 취한다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편견과 고착에 빠질 것이다. 진리의 이미지(法相)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것에 고착되는 사람 또한 모종의 자의식의 착각과 편견에 빠진다. 그렇다고 진리가 없다는 판단(非法相)에 빠지는 것도 또한 또 다른 허무의 자의식이니라. 그래서 말하노니, 진리에도 빠지지 말고, 진리 없다는데도 빠지지 말라.”
(혜능의 해설)
六祖: 此三相, 竝著邪見, 盡是迷人, 不悟經意, 故修行人不得愛著如來三十二相, 不得言我解般若波羅蜜法, 亦不得言不行般若波羅蜜行, 而得成佛.
“이 셋, 즉 사물의 이미지(相), 진리의 이미지(法相), 그리고 ‘진리란 없다’는 판단(非法相)은 삿된 견해이다. 거기 빠진 사람들은 어둠 속을 헤메며, 경전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수행인들은 1) 여래의 삼십이상 종호에 애착 악착하지 않으며, 2) 내가 반야바라밀의 진리를 잘 안다고 자만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3) 반야바라밀법을 행치 않고도 성불할 수 있다고는 더더욱 말하지 않는다!”

<금강경> 6절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런 뜻에서, 여래는 늘 말하지 않더냐. ‘너희들, 비구들이여, 내 말은 다만 뗏못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진리(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진리 아닌 것임에야…”

(혜능의 해설)
六祖: 法者是般若波羅蜜法, 非法者生天等法. 般若波羅蜜法, 能令一切衆生過生死大海, 旣得過已, 尙不應住, 況生天等法而得樂著.
“여기 ‘법(法)’이란 반야바라밀의 법이다. ‘비법(非法)’이란 천상에 태어나는 등의 일을 가리킨다. 반야바라밀의 법은 능히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대해(大海)를 건너게 한다. 건넌 다음에는 그 법에 주(住)하지도 않는데, 하물며 천상에 태어나는 등의 즐거움에 악착하랴.”
- 혜능은 말한다. 진리의 수행이 ‘다음 윤회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한 적금이나 보험’같은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그야말로 지금 여기 마주친 생사, 그 큰 바다를 건너기 위한 뗏목이다. 한사코 부여잡되, 저 언덕 기슭에 닿았다 싶거든, 그만 버려라. 그래야 계속 길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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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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