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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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소동파 (중)/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이 산승이 질문을 하나 하겠소. 대답하면 앉게 해주겠지만 대답을 못하면 그 옥대를 풀어주시오.”
법거량으로 내기를 하자는 것이다. 이미 나름대로 전 분야에 걸쳐 일가견을 갖춘 그였기에 자신있게 뭐든지 물어보라고 했다.
“거사는 조금 전에 이 산승의 육신을 빌어서 앉겠다고 하셨는데, 육신이란 본래 공(空)이며, 오온(五蘊) 역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사는 도대체 어디에 앉겠다는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옥대를 풀어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불인 선사가 좀 미안했던지 행각할 때 입던 누더기를 그에게 선물했다. 벼슬의 상징인 옥대를 버리고 수행을 의미하는 납의를 얻어간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사람의 위치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소동파가 경구(京口)에 왔을 때 금산사 주지인 불인 선사가 강을 건너 찾아갔다. 이번에는 동파가 역공을 했다.
“조주 스님은 왕이 찾아와도 선상(禪床)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금산사 스님께서는 무슨 일로 강까지 건너면서 찾아 왔수?”
속마음을 들켰을 때는 에둘러 표현할 수 밖에 없다. 글쟁이에게는 글로 대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순발력은 필수.
“그 옛날 조주 스님은 겸손이 부족하여 선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두 임금을 맞았지만 이 모든 세계를 선상으로 여기고 있는 금산의 무량한 모습만 하겠는가?“
문맥으로 보건대 무슨 화주할 일이 생기신 것 같군. 손 벌리러 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라니까요.
소동파가 1094년 가을 남화사(南華寺)를 지나게 되었다. 절에 간 김에 편안히 쉴 겸해서 관복을 벗어놓고 승복으로r갈아입었다. 변(辯)장로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공식손님이 찾아왔다. 다시 관복을 입고서 맞이해야만 하는 공무로 온 관리다. 하도 다급해서 승복을 속옷삼아 그 위에다가 그대로 관복을 걸쳤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변 장로에게 사과하듯 변명하듯 말했다.
“속에는 승복을 입고 겉에는 관복을 걸쳤으니 마치 양민을 억눌러 천민을 만든 꼴입니다.” 절에 와서 제대로 단월노릇도 못하고 도리어 관료 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빗댄 말이다. 자상한 변 장로는 오히려 위로를 해준다.
“외호도 적은 일이 아닙니다. 영축산에서의 부처님의 부촉을 잊지 마소서.”
관리란 반드시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잘 나갈 때야 나는 새도 떨어뜨리지만 추락할 때는 날개가 없다. 동파라고 해서 유배에서 자유로울 수는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1097년 담이국( 耳國)으로 귀양을 가게되었다.
그에 앞서 1904년 사주(泗洲)대사 초상화에 찬(讚)을 써준 적이 있다. 그 찬의 마지막 구절이 쬐금 ‘오버’ 된 것 같다. “… 동파의 찬(讚)을 보는 수많은 사람이 모두 성불을 하리라.”
그런데 유배갈 때 그 고을 수령이 직접 와서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자기 아내의 꿈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아내 심씨가 정성껏 사주대사를 섬기는데 하루저녁 꿈에 사주대사가 이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72일 후에 소동파와 함께 간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72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어찌 정해진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위로를 하는 건지 염장을 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 마음을 비운 동파는 말했다. “세상일이란 어느 것 하나 정해진 인연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공덕을 지은 것이 없는 내가 사주화상과 동행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전생의 인연 아니겠습니까?” (계속)
200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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