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라는 말이 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돈을 쓸 때는 그 의미를 헤아려서 조심스럽게 한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듣기에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정승같이 쓴다’는 말로 ‘개처럼 버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데 이 말이 악용되고 있는 듯해서 씁쓸하다.
물론 개처럼 번다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상징하는 뜻으로만 쓰인다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 다만 개처럼 번다는 것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돈을 버는 데만 관심이 있는 태도를 말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떻게 돈을 벌더라도, 사회에서 말하는 소위 바람직한 곳에 돈을 쓴다면, 그 돈을 버는 과정의 모든 비윤리적 행동을 용서할 수 있고 심지어 장하다고 박수까지 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들은 돈을 버는 과정에 잘못이 있고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이 좋은 목적으로 쓰인다면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개처럼 벌고 정승처럼 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정승처럼 쓰기 위해서는 먼저 번 돈의 양에 만족하고 쓰기 시작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언제부터 얼마만큼 돈을 벌고 나서부터 돈을 쓰게 될까?
참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벌만큼 벌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이제는 충분히 벌만큼 벌었다고 해도 정승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것도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소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만원을 쓰기는 쉬워도, 불우이웃 돕기에 만원 내기를 주저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니든가?
이것만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상처주고 힘들게 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단지 얼마의 자선 행위(실제로 일어나는 경우도 거의 없지만)를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일까?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개처럼 돈 버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는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좋은 일을 많이 할 것이라는 말로 얼마나 자기 자신을 기만해왔는지. 우리 모두는 개처럼 돈을 벌려는 많은 사람들과 매일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다. ‘개처럼 번다’는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표상이다. 그런 천박한 자본주의 ‘개처럼 벌자 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정승처럼 돈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코 돈을 버는 과정이 개처럼 될 수가 없다.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기약 없는 내일의 사랑을 위해 오늘 이웃과 사회를 힘들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처럼 번 사람은 개처럼 쓸 수밖에 없고 정승처럼 번 사람만이 정승처럼 쓸 수 있다.
개처럼 벌더라도 정승처럼 쓰면 된다고 하는 사고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도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개처럼 번 사람은 결코 정승처럼 쓸 수 없다. 정승처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돈을 버는 과정에서 개처럼 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일을 행하는 사람의 의도가 정작 그 일의 결과보다 중요하다고 설법하셨다. 우리는 뜻으로 업을 짓는다. 정승처럼 쓰겠다고 하는 마음이 우리 깊은 곳에 굳건히 있는 한 우리가 일하고 돈 버는 과정은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다.
비록 많이 못 벌어서 이웃에게 해줄 것이 정작 없더라도 우리는 더 큰 의미가 있는 선업(善業)을 짓는 것이다. 정승처럼 일해서 정승처럼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