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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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불성 주장자를 꼭 잡고 살아야!
모든것 내탓으로 보는게 눈 뜨고 푹 자는 것!

좌선시 근본을 증명 받는 방법


선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청년법우입니다. 좌선을 할 때 본래 있는 나의 근본을 느끼고 알고 싶다면 ‘네가 있다면 이 손을 한번 들어 봐라’든가 ‘주먹을 한번 쥐어 봐라’든가 하는 것을 실험적으로 해 보라고 하셔서 시간이 날 때마다 열심히 해 봅니다. 그런데 저는 되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그것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자기 이외의 사람이나 또 자기 이외의 경전이나 자기 이외의 어떤 신이나 이런 거를 가지고 공부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무의 세계의 정신계, 정신계는 자기 지금 주인공 불성이 있고 물질계에는 내 육신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정신계하고 물질계하고 똑같이 돌아가죠? 돌아가니깐, 얼른 쉽게 말해서 물질계보다 정신계가 한 단 위예요.
그러니깐 정신계가, 즉 말하자면 주지가 되는 거죠. 주추가 되는 거예요. 얼른 쉽게 말해서 이 물질계의 나는 정신계의 나를 진짜로 믿고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하고 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만이, 네가 형성시킨 몸이니까 네가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있고 너만이 지켜주고 해결사가 돼 주고 의사가 돼 주고 그러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애를 임신했을 때 탯줄에 앉아서 그 탯줄에 달린 젖병을 가지고 애가 똥 누고 잠자고 먹고 그러고 길러지거든요. 그와 같이 해라 이겁니다. 이렇게 탯줄이라는 것은 둥글게 이렇게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근본 자리를 말하는 거죠. 근본 자리에서 젖병이 있다 하는 것은 자기 불성, 주장자, 그러니까 주장자를 꼭 잡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주장자만이 나를 이끌 수 있고 광대하게, 쉬지 않고 이끌어 갈 수 있으니깐 말입니다.
그러니깐 앉아 있는 것도 서 있는 것도 자는 것도 또 일하는 것도 모든 게 참선으로 둥글려서 돌아가거든요, 진리니까. 그러니 저녁에라도 한 10분 동안이고 15분 동안이고 앉아 있으면서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하고 관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싹이 나야 인제 이 물질계하고 정신계하고 상봉이 되는 거죠. 통신이 되는 거라고요. 그게 통신이 돼야 이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의 그 공용(共用)을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용(用)을 하는 것, 움죽거리는 것이라든가 이런 것이 내가 움죽거리지 않고 움죽거리는 그 자체를 이야기합니다.
그래 어떤 사람들은 공부할 때 그냥 계속 “주인공! 주인공! 주인공!”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주인공을 믿는 거지 찾는 게 아니에요. 찾는 게 아니라 본래 있는 거니깐 믿는 거라고요. 나무가 뿌리 믿듯 말입니다. 이 나무가 자기 뿌리가 없으면 싹이 살 수 없죠. 그러니까 싹은 뿌리를 의지하고 믿고 살고 또 뿌리는 싹을 도와서 에너지를 흡수해서 올려보내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좌선을 하면서 ‘주인공, 너가 있다면 이 손을 들어 봐라.’ 이렇게 했겠죠. 그런데 내가, 이 물질적인 나보다 한 단계 위의 자기 조상인 불성, 그게 과거 자기거든요. 그러니까 명령하듯 하면 안 되죠. 명령은 강제로 ‘이것 들어 봐라!’ 이러는 것과 같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강제로 하질 말고, 예를 들어서 ‘주먹을 들어 봐라!’ 했을 때 그렇게 해 놓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 잊어버리고 있을 때 탁 들리는 거지, 내가 그렇게 강요하고선 금방 들리는 게 아닙니다. 강요는 아예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옛날에 내가 어렸을 때 나는 터득을 했어요. 나는 뭐 내가 경전을 봤나 누구한테 제대로 배우기를 했나. 그런데 공부하고 들어가다가 하도 이게, 심심하다고 그럴까 뭐 어쨌다고 그럴까요. 어쨌든 그때는 어리니깐 그걸 아빠라고 그랬거든요. ‘아빠가 있으면 진짜 이 손을 들어봐!’ 이랬거든요. 나는 터득을 해서 통하고 있는데 그러는 거죠, 인제. 그걸 모르니깐 ‘나와 봐!’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러니깐 안 움죽거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잊어버리고 인제 일어나야겠다 하고 일어나는데 그냥 이 손이 번쩍 들리는 겁니다, 난데없이. 그걸 잊어버리고 있는데 손이 번쩍 들리더니, 색경으로 가는 겁니다, 보라고. 색경을 봐라 이거예요. 손만 가는 게 아니라 이 색경을 봐라 이겁니다. 지금 생각을 하니까 터득을 해서 다 나온 거죠, 그게. 그래서 색경에 가 보니까 내 얼굴밖에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림자와 그림자가 둘이 아니니라. 그러나 이걸 따지고 보면 그 색경에 비치는 거는 환상이고, 너는 지금 주인공 근본이라면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너 몸뚱이는 환상이고 너 근본이라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겁니다. 너로 인해서 비치는 그 환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래서 그때에 ‘어, 너나 나나 둘이 아니구나. 이것이 모두가 나한테서 벌어진 거로구나! 과거로부터 미생물에서부터 이렇게 내가 나를 진화시키고 자기를 형성시키고 또 진화시키고 형성시키고, 이렇게 하면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렇게 하면서 인간까지 이끌고 왔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눈물이 주르르 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공, 그 아빠가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그렇게 해 왔는데 내 자식 아님이 어딨으며 내 부모 아님이 어딨으며 이 우주가 전부 선 도량 아닌 게 어딨겠나. 전부가 도량이고 전부가 내 모습이고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모두가 그렇구나. 길고 짧음이 없구나.’ 그냥 이런 게 나왔죠.
그랬듯이 이것도 요량이 있어야 돼요. 강요를 하면은 안 됩니다. 한 단계 위다, 정신계가. 나는 과거로부터 진화시키면서 자기를 형성시켜 온 자기인데 지금 현재 나는 자(子)란 말입니다. 그 한 단계 아래란 말이에요. 그건 부(父)가 되고 이건 자가 되죠. 그러면 자식이 애비더러 ‘이것 좀 올려 봐!’ 이럭한다면 그거 되겠어요? 천천히 ‘그래라. 올려 보겠다.’ 하고 ‘올려 주마!’ 그러고서 인제 생각을 잊을 만한 때 그때 이렇게 천천히 올려지는 거죠.
그러니까 신도들이 뭐가 어떠니 해도 우리 스님들이 자청해서 무엇을 해 준다 이러는 건 없어요. 그쪽에서 와서 건드려야 이쪽에서 주는 거죠. 자청해서 주는 거는 스스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야 되는 겁니다, 또. 그러니깐 모든 게 자유롭죠. 그러니까 이 도리가, 자기 자신을 형성시켜 온 자기 주인공을 통하지 않고는 이 연기법이나 오신통, 이런 거를 도무지 몰라요. 이걸 통해야 ‘아,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구나. 체가 없으니깐 그냥 여기서 저 미국으로 점프할 수도 있고 그렇구나. 또 이승에서 저승으로 점프할 수도 있구나. 저승에서 이승으로 점프할 수도 있구나.’ 그냥 이렇게 자꾸 배우는 거죠. 스승이 인제 여기서 나오는 거죠. 그게 자기 과거가 스승이 되는 겁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인제 이렇게 하다가도 지치잖아요? 싫증이 나잖아요, 안되면. 그런데 안돼서 답답하게 될 때에 ‘답답한 것도 당신이 하는 거니까 답답하지 않게 해 봐. 답답하지 않게 하려면 이것 좀 들어 봐.’ 하고선 이렇게, 딱따거리지 말고, 간절히! 딱따거리는 게 다르고 간절히 하는 게 달라요.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아주 묘한 거거든요. 그렇게 하는 그것이 은산철벽을 뚫으려고 정을 갖다 대고 두들기는 거와 같거든요. 그리고 또 어린애라고 비유한다면 막 보채고 우는 거와 같거든요. 그러니까 ‘울지 않는 어린애 젖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울어라.’ 그러는 거죠 그럭하다가 지치고 답답하면 ‘에잇, 고만 둬라.’ 이러고 팽개치죠? 그런데 그렇게 답답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강요할 필요도 없어요.
이 세월이라는 게 없거든요. 그냥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겁니다. 돌아가는데 거기에 답답하다 답답하지 않다 하는 막이 어디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답답한 것도 네가 답답하게 하는 거니깐 답답지 않게 해!’ 그러세요. 나도 그렇게 살아요. 어떤 땐 눈이 침침해서 ‘눈이 침침해. 이건 눈이 침침하잖아!’ 그냥 그러고, 또 피곤하고 그러면 ‘좀 의욕이 있게 해!’ 이렇게 해요. 그러면 금방 달라져요. 그렇게 하고서 살지, 그걸 철판에 콩 볶아 먹기로 하면 되나요? 콩 볶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되죠.
그러니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본래 나한테 주인공이 있으니까 그렇게 꺼내고 찾으려고 하지 말고 믿는 거, 진짜로 믿는 거, 믿는 거를 전적으로 해야 돼요. 그렇게 해 보다가 이게 인제 자꾸 저거 하면 ‘내가 답답해서 그러니까 너가 정말 있다면, 주인공 당신이 정말 있다면 손 좀 들어 보든지 손가락을 들어 보든지 해 봐!’ 이렇게, 그냥 인의롭게, 답답하지 않게, 되든 안되든 답답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말입니다.
그래 인제 거기다가 넣고 그렇게 할 때에 이거는 마음이 생겨야 육체가 움죽거리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어떻게 육체가 움죽거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육체는 그냥 가만 놔두고 이렇게 ‘당신이 진짜 있다면, 내가 당신으로 인해서 움죽거리는 건 아는데 난 아주 당신을 통해 보고 싶어. 그러니깐 이걸 좀, 손가락이라도 움죽거려 봐.’ 이렇게 그냥 다정한 뜻으로 이렇게 그냥 해 보는 겁니다. 다정하면 빨리 해 줄 거고 다정하지 못하고 명령조로 나오면 안됩니다. 그러곤 정히 화가 나면 나중에 인제 그냥 잊어버렸을 때 손이 들리게끔 하죠.
이 주인공이 이끌어서 여기까지 왔거든요. 그랬는데 뭐 그걸 못 믿습니까? 못 믿을 필요도 없죠, 사실은. 그래 가지고 자꾸 통하게 하기 위해서 보채라. 애기가 젖 달라고 울듯 보채라 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당신만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하고 가만히 앉아서 그냥 그렇게 한 10분 동안이라도 그렇게 자꾸 보채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그것이 은산철벽을 뚫으려고 정을 갖다 대고 두들기는 거와 같다는 것을 아시고 열심히들 해보시기 바랍니다.

함이 없이 살라고 하신 이유


분명 배워야 할 게 있고 해야 할 게 있고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는데 내가 없이, 함이 없이 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어떤 것이 진실한 불교냐 생각해 본다면 그냥 생활이 불교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이런 거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가 한 지구 안에서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불교이며 그대로 사는 것이 참선이며 그대로 사는 것이 여여한 것입니다. 그 ‘마음을 낸다’ 이런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지만 ‘마음이 없는 것이 마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이걸 썼다 저걸 썼다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썼다고 한 가정에서 이렇게 산다 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에 “얘,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자식의 노릇을 해 줘야 됩니다. 또 “아버지!” 하고 부르면 아버지의 노릇을 해 줘야 되겠죠. “여보!” 하고 부르면 남편 노릇을 해 줘야 하고요. 자동적으로 그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요? 이 자동적으로 모든 생활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거를, 내가 아버지가 됐을 때 내가 했다고 했을까 또 아들 노릇을 할 때에 내가 아들 노릇을 했으니까 나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노릇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 그렇게 자동적으로 많이 했어도 함이 없이 했을 뿐이다 이거죠. 우리가 여기 들어올 때에 걸어서 들어오기는 틀림없이 걸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발자취를 짊어지고 오신 분이 있으신가 생각해 보세요. 모든 거를 자기 자신들이 하시고도 하신 게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짊어지고 다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마음 하나가 잘못됐으면 그 과거를 외려 붙잡고 간다 이겁니다. 어저께 한 일도 오늘 걱정을 해야 하고 그걸 붙들고 쩔쩔 매고, 1초 전도 과거니까요. 1초 후도 미래니까요. 그럼 현재만 있느냐. 현재만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도 공했단 얘기죠. 과거도 현재고 미래도 현재고 현재도 공했으니까 모두 여러분이 할 뿐이지 한 것은 없다 이것입니다.
어떤 것을 듣습니까? 듣는 것을 하나만 듣고 마는 겁니까? 똑같은 걸 듣습니까? 이걸 듣고 또 딴 거 들어야 하고 또 딴 거 봐야 하고 딴 거를 해야 하고 딴 사람 만나야 하고, 이건 일일이 이렇게 돌아가면서 이렇게 작용을 해야 하니까 이것은 얼른 쉽게 말해선 공용(共用)입니다, 공용! 공용인 까닭은 왜냐. 내 오장 육부에도 생명체가 천차만별로 들어 있으니까요. 이 몸속에 생명체가 그렇게 많이 들어 있어서 의식이 자기 마음을 건드린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이 모든 의식들이 자기가 마음먹는 대로 따라 주게끔 만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이 오장, 이 인간의 한 모습이 한 세계라고 봐도 됩니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크다면 요만하게 좁쌀 알갱이만하게 하나 만들어서 넣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것이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다 이겁니다.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이 많은데다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또 이름이 주어져 있죠. 우리네 세계, 이 지구 하나의 세계가 벌어져 있듯이. 위다 장이다 척수다 척추다 방광이다 장이다 하는 그 이름들이 수효가 없습니다. 다 따지자면 수효를 어떻게 그걸 일일이 헤아리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나 내 마음 하나면, 즉 말하자면 하나면 의식이 다 거기에 포함돼서 하나로 작용을 하게 되니깐 공용(共用)이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내가 내 마음이, 아파서 관하면 의사가 돼 주고 또 집안이 안돼서 관하면 관세음이 돼 주고, 이 소리는 뭐냐 하면 해결사가 돼 준다 이겁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관하면, 자기 용도에 맞게 관하면 또 보디가드가 돼 주고, 이거는 천차만별로 자기가 용도에 따라서 다가오는 것대로 현실로서의 그것이 행이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것을 모르니까 그것이 천만의 말이지 그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느냐는 의문이죠.
모든 주처는 자기네들이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주처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형성시켰고 자기가 형성됐기 때문에 주처는 자기한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네 주처는 뿌리와 같고 자기 모습은 싹과 같은 것이죠. 그러게 싹은 뿌리를 믿고 뿌리는 싹을 돕고 이래야 푸르게 살 수가 있다는 얘기죠. 이 불교라는 것이 이름으로만 ‘불교 불교’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불교라는 단어는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 몰라서 나라가 싸우게 되고 나라가 분쟁이 일어나고, 이런 문제들이 많은 이치가 바로 우리가 모르니깐 그렇다 이 소립니다. 예를 들어서 이 지구를 어느 혹성이, 즉 말하자면 부딪치게 됐다 이런다면 어떻게 해야만이 그거를 해결을 하겠습니까. 이 불교란 너무도 심오하고 너무도 광대해서 무변한 겁니다. 내 마음은 체가 없어서 그 혹성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혹성이, 내가 혹성이 된다면 그것을 멀리 해서 부딪치지 않게 하는 그런 이유가 있죠.
그와 같이 사람은 ‘오늘이 며칠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시간적으로 따져서 지금 며칠 며칠 하지만 포괄적으로 본다면 ‘어디 무엇이 이렇게 있다더라’ 이렇게 말을 하고 떠나면 그거는 벌써 100년 200년을 돌아가요. 그러니까 ‘어디 있다. 어디가 이것이 꼭 이렇게 돼 있다. 이것이 꼭 이렇게 있다. 이거는 이렇게 한다. 이거는 저렇게 한다. 때가 되면 이렇게 죽는다. 때가 되면 이런 문제가 일어난다.’ 이런 것도 그냥 그건 난설이에요. 왜냐? 예언이라는 건 없으니까요. 예언이라는 것이 없는 까닭이, 이렇게 이 컵이 지구라면, 얼른 쉽게 말해서 이렇게 있으면, 벌써 1초 후면 이렇게 딴 데 가 있어요. 모든 물질이 다 그렇게 변화가 오는 겁니다. 사람은 늙고 또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변화가 무쌍하죠.
그러니깐 이 많은 말을 하고 많은 행동을 하고 그러는 것이 하나도 한 게 없다 이겁니다. 한 게 없이 했을 뿐이다 이겁니다. 그 이유를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편안하게 사실 겁니다, 아마. 그리고 죽는다 산다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형성돼서 이 세상에 나왔죠? 죽어가는 것도 이 세상에서 가요.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살아온 것이 없기 때문에 죽어갈 것도 없다 하는 것입니다.

정법 아닌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스님께서는 오직 마음으로만 뚫으라고 하시는데 세상에는 길도 많고 진리로 가는 방법 또한 한 가지만은 아니어서 정법 아닌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의 생각이 잘못되었는지요.

예전에 이런 말이 있죠. 어느 사람이 와서 “이것이 옳습니까?” 하니까 그르단 말은 하나도 안 하거든요. “이게 어떤 게 정법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응. 그것도, 그것도 옳다.” “저 얕은 산은 저 높은 산하고 어떤 게 차이가 납니까?” “얕은 산도 옳고 높은 산도 옳다.” 그래서 한 번 죽기는 어렵다 했는데, 그래도 한 번 죽기는 쉬운데 같이 죽기는 어렵거든요. 그게 두번째예요. 그러고 나서 또한 전부 같이 나투기 어렵다 이겁니다. 이 뜻을 말로만 횡하게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실천을 할 수 있는 그런 게 문제예요. 거기에는 티끌 하나 붙질 않아요! 그르고 옳은 게 붙질 않아요. 이런 공부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다가 ‘아, 저건 틀리다. 저건 옳다.’ 그런 걸 가지면 절대 이건 할 수 없어요. 미지수의 그것을, 한 구녘도 없고 티끌도 없는 그걸 한숨에, 찰나에 뚫을 수는 없어요. 물론 그렇게 해 나가다가 점차적으로 뚫을 수 있을는지 모르죠. 허나 미해질 수도 있거든요, 하도 따지니까. 왜 그렇게 달기는 좋아하는지…. 달기를 좋아해서, 그 몇 근이나 되는지 그게 의심이 난다고요.
우리가 한번 ‘야, 참 너 만나서 좋구나.’하고 아주 웃으면서 그 소리 한번 하는 게 몇 근이나 될까요? 그래서 나는 그르고 옳은 것을 ‘선을 지킨다면 선의 업이 있고 악으로 간다면 악의 업이 있다. 선과 악을 다 놔라.’ 이러고 싶은 거예요. 잘되고 못된 거를 다 놓지 않는다면 그건 치우칩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지구가 조금도 틀리지 않는 부동한 자세로서 그 긍지를 가지고 지축이 흔들리지 않게 있음으로써, 사방에서 조여드는 그 자체로 인해서 자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느 거 하나 붙어도 타 버리고 맙니다. 타 버리는 관계상 살아나는 거죠. 이 유생 무생이 다 이렇게 해서 살고 있는 이 원리를 왜 모릅니까! 우리 인간 하나 하나도 혹성이다 이겁니다. 별성이다 이거예요. 한 사람의 한 점의 마음의 불덩어리가 온 우주 세계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어삼킬 수 있는 그 오묘한 마음을 가지고 만날 저울질만 하고 있으니 이것은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나와서 저울질하다 간다면 저울질밖에 못하지 어떡합니까. 차원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이고 끼리끼리 모두가 그렇게, 사람도 차원대로 살고 있고 끼리끼리 모여서 회사에 들어갔으면 회사원이죠, 뭐. 장사하면 장사꾼들대로 모일 거고, 이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만 하지 말고 내 내면을 볼 수 있을 때, 내공을 볼 수 있을 때 홀연히 그 내면으로 하여금 ‘천 리도 요 눈앞이라 조그마한 그 불씨 하나가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킨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이것저것 따지고 뭐 남는 게 있어서 몽탕 다 태워 버리나? 본래 태워 버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러는 거죠. 마음으로 그렇게 쌓아 놓으니까 그렇죠. 무조건이지, 뭘 이렇게 달고, 저렇게 달고. 그게 도대체 몇 만 근이나 된다고….
나는 그전에 8·15 해방되고 나니까 스무 살이 됐고, 그때 한 큰스님한테 갔는데, 예전에는 차가 없고 참 길도 험악하고 그래서 서울에서 거기 가려면 무지하게 차를 타고도 하여튼 무지하게 걸었단 말입니다. 홍성으로 해서 이렇게 넘어가는데 아주 그건 뭐 길도 험악하고 그랬죠. 그러니까 며칠을 걸려서 그렇게 갔으니, 얼굴은 뭐 흙투성이고 그건 뭐 말도 못해요. 나 생긴 거 보세요. 조막댕이만한 게 얼마나 그때 험했겠나.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스님! 얼마나 가면 죽겠습니까?” 그 스님이 있다 하는 소리가 “눈 뜨고 푹 자면 돼. 죽는 거야, 그게.” 이러시는데 그 말씀 한마디가 참 실감났어요.
눈 감고 자는 거는 그게 자는 게 아니죠. 눈 뜨고 자야, 어디 시장바닥에 갖다가 팽개쳐도 우뚝우뚝 서죠. 잘된 거 못된 거를 남의 탓으로 돌려서도 아니 되고, 또는 잘된 거 못된 거를 건져 들어도 아니 되고, 잘된 거 못된 거를 일일이 그걸 계산해도 아니 되고…. 그건 그런 거죠. 그래서 속으로 똑똑하더라도 좀 겉으로 무식한 척하면서 둔한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공부는 둔하지 않고는 도대체 될 수가 없습니다. 벌써 오관을 통해서 이 사량으로 전부 알거든요. 이 머리로 다 알아버려요! 감각이니 지각이니 이게, 보는 거 듣는 거 이게 여기 기계적으로 다 있는 거거든요. 여길 통해서 다 그냥 자기한테 전부 오는 게 있으니 그놈의 오는 거가 수많은 게, 헤아릴 수도 없는 게 그냥 스쳐 가는데 언제 그놈의 걸 세웁니까?
언제나 누구나가, 이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 탓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이렇게 상황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게 내 탓이죠. 못난 내 탓이란 말입니다.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았고 그저 그대로 내 탓이에요. 그 내 탓이라는 그 한마디의 뜻이 눈 뜨고 자는 일입니다. 가정에서도 언짢은 일이라든가 부부지간이라든가 자식지간이라든가 모든 일에 대해서 참 이익하게 말을 상하지 않게 해 줄 뿐 아니라 말을 해서 상할 일이라면 하지 말고 안에다 굴려야 하고 안에다 놔야 된다 이겁니다, 내공에다. 모든 걸 내공에서 나오는 건 내공에다 다시 놔야 됩니다. 잘되고 못되고, 잘된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된 거는 안돼서 맡겨 놓고. ‘나는 공부를 하겠다 못하겠다, 이런 것이 공부다, 저런 것이 공부다’ 이런 걸 다 놔야 돼요. 급하다는 거까지도 놔야 됩니다.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내가 나온 자리, 내가 낳기 이전 자리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전 자리를 알게 되면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200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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