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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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소동파 (상)/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어릴때부터 불교와 인연깊은 빼어난 문장가
동림선사에 귀의 ‘계성산색…’ 오도송 유명

흔히 당송팔대가 라고 불리는 당송시대에 가장 글 잘 쓰는 사람 여덟명 중에 세 사람이 소동파(蘇東坡 1036~1101)네 집안이다. 아버지 소순(蘇洵)과 동생 소철(蘇轍)까지 포함된 명문가이다.
소동파는 〈주역〉과 〈서경〉의 주석서를 남겼고 〈전적벽부(前赤壁賦)〉라는 최고의 명문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그가 즐겨 머리에 둘러 쓴 갓은 얼마나 모양이 특이했던지 ‘동파건(東坡巾)’이라고 불렸다.
미식가였는지 동파육(東坡肉)이라는 요리가 현재 남아있을 정도다. 그가 항주에 살고 있을 때 자주 만들어 먹었다고 알려져 있다. 돼지의 갈비살을 간장 설탕 파 술 등으로 양념해 약한 불에 장기간 끓인 것으로 고기가 두부처럼 부드럽고 맛이 좋아 지금도 중화요리집 메뉴판의 한 켠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분야를 가리지 않는 만능인인 셈이다.
절집과의 인연도 만만찮다. 사천 아미산 출신인데 8~9세 무렵 이상한 꿈을 꾸었다. 전생같은데 승려의 모습으로 섬우(陝右:섬서성 오른쪽 지역)지방을 왕래하는 꿈이었다.
또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였을 때 눈이 하나뿐인 승려가 방문하는 태몽을 이미 꾼 바 있다. 운문문언(864~949)의 제자이며 오조산에서 머물던 사계(師戒)선사는 섬우사람으로 외눈이었는데 열반한지 오십년 전이였다. 동파의 나이가 그 때 49세였으니 사람들은 그를 오조사계의 후신이라고 하여 ‘계화상(戒和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젊은 날에는 불법과 크게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다. 66세때 동림상총(1025~1091) 선사를 만나 불법에 귀의했고 그의 법문을 듣고 안목이 열렸다.
동림선사는 임제종 황룡혜남(1002~1069)선사의 제자로 ‘마조가 다시 환생했다’는 말을 들었으며, 혜남선사에 비교해 ‘소남(小南)’이라고 불린 700 대중을 거느린 대 선지식이었다. 소동파의 오도송도 동림선사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을 띠고 있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계곡물 소리는 그대로가 부처님의 설법이요 / 산색은 그 자체로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 / 어제 밤 깨침으로 다가오는 팔만사천 법문을 / 다른 날에 어떻게 남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동림선사가 열반하자 스승을 위해 글을 올렸다.
당당했던 상총 선사이시여(堂堂總公)
출가자 중의 출가자로다(僧中之龍)
숨을 쉴 때마다 그것은 구름이 되었고(呼吸爲雲)
하품할 때마다 바람이 되었네(噫欠爲風)
소동파는 많은 일화를 절집에 남겼다. 불인요원(1032~1098)선사는 관복에 걸치고 있던 옥대(玉帶)를 그와 내기를 하여 마침내 빼앗아 버렸다.
불인이 하루는 방에 들어가려는데 약속도 없이 동파거사가 나타나자 말했다.
“이곳엔 앉을 자리가 없어 거사를 모실 수 없소이다.”
손님을 문 밖에 세워놓고 못들어오게 하니 가만있을 동파가 아니다. 바로 맞받아쳤다.
“잠시 스님의 육신을 자리로 빌려서 앉아 봅시다.”
앉을 곳이 없다면 스님의 몸을 좌복삼아 그 위에 앉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열차나 버스에 표를 한 장만 끊고서 어린애를 안고가는 풍경을 연상하면 된다. 그러면 한 자리에 둘이 앉을 수 있는 방법이 되긴 한다. 그런데 어른 둘은?
치기있는 역공을 당한 선사이지만 여유있는 웃음을 날리며 한마디 했다. (계속)
200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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