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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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대법원의 ‘도롱뇽 소송’ 기각/이병인(부산대학교 환경시스템공학 교수, 현재 美 오레곤 주립대 교환교수)
국책사업 명분앞 ‘환경독재’ 여전
눈에 보이는 개발효과보다 보존효과가 중요

좋다. 그래도 좋다. 참 좋은 일이다.
대법원에서 새만금에 이어 경부고속철도 천성산구간에 대한 도롱뇽 소송을 기각했다.
기각사유는 기존의 판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과학적 영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혔다.
그러나, 이 점은 또한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마지막으로 추인해줬다는 법적 한계를 명백히 보여준 사례중의 하나라고 본다.
처음 경부고속철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국책사업은 어쩔 수 없다는 절망감속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대법원의 판결로 구체적 사실로 판명되었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좁은 국토에 많은 사람이 살다보니 지금 눈에 보이는 좋은 것에만 탐익하거나, 너무 살기에만 바쁜 것 같다. 외형적으로는 독재를 타파하고, 선진화를 부르짖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잘못된 시대의 개발관행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다. 적어도 많은 부문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나, 환경부문에서는 환경독재가 추진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예나 제나 똑 같이 반복되고 있는 무분별한 개발관행과 관행적 추진이다. 특히 국토의 한줌 정도만을 국립공원, 도립공원 등으로 지정해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온통 개발하려고 하는 상황이다.
북한산이 그렇고, 천성산, 한라산, 설악산, 지리산 등이 그렇다. 그런 면에서 지방자치제도는 지방환경의 파괴제도일 수도 있다. 온통 개발하려는 사람만 있고, 보존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개발의 효과는 즉각 나타나고, 계량화가 가능하나, 보존의 효과는 장기적이고, 계량화가 어려운 실정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인 세상이니, 눈에 보이지 않는 먼 나라의 일은 지금 우리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보존해야 할 지역으로 국립공원, 도립공원 등 보존지역으로 지정해 놓고도, 그 지역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할 만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이 시대에 보존지역으로 지정해놓고서 그 지역을 해제도 않고 개발한다는 것이 그러하다. 최소한 개발하고자 한다면 보존지역을 해제하고 개발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고, 그 정도의 자신감은 있어야 한다. 더욱 문제가 있음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개발을 추진하면서 이미 진행된 일이고, 그 경제적 손실이 아까워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억지이다.
경부고속철도나 새만금 북한산관통도로 문제는 최소한 애초부터 문제점이 있는 사업이다. 정치적인 이해득실로 결정된 사안을 계속 책임지기 싫어서 회피하는, 과거의 잘못이 현재의 잘못으로 될까 두려워서 잘못된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업중의 하나였다.
최근에 추진되고 있는 호남고속철도를 보면서 처음에는 공주역 등을 두지 않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선거철을 맞아서는 공주역 등을 설치하는 것이 보다 경제적이라는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국책사업이다.
경부고속철도도 애초부터 부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어디냐가 경제적인 것이다. 부산으로 가는 사람이 경주로 돌아가는 것이 경제적이고, 타당성이 있다는 말은 분명한 눈속임이다. 그 점은 최근 개통된 대구-부산간 직선화 고속도로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차라리 처음부터 울산과 포항 등 동해권을 고려한 정치적 결정이었다고 양해를 구하고 시작된 사업이라면 그래도 좋다. 왜 경제적, 과학적 타당성을 들먹이며, 스스로의 개발을 합리화시키느냐는 문제이다. 분명히 경부고속철도 천성산구간은 사업결정부터, 절차상의 과정부터 원초적인 하자가 있는 사업이다.
특히 환경영향평가는 그렇다. 문제는 애초에 잘못 낀 단추를 모두들 제대로 끼었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이 사람들에겐 사업의 결정과 추진만 있을 뿐, 과학적 타당성은 없다. 단지 정치적 합리성만 있다. 소위 국책사업이라는 대규모사업도 그런데 그 밖의 크고 작은 사업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 면에서 천성산에 대한 소송기각은 우리시대 환경의식의 수준을 드러내는 판결이다. 사회정의의 마지막 보루인 법원마저도 자연에 대한 정의는 스스로 포기한 이 시대의 법수준을 드러내는 판결이다. 올바른 세상을 위한 사회의 정의는 차치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자연을 우리 시대가 스스로 내던진 구체적인 사례이다.
그렇지만, 불교계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여 왔다. 수경스님의 삼보일배와 지율스님의 여러 번의 단식은 분명히 이 시대 불교가 이 사회에 던져준 횃불이었다. 불교가 가지고 있는 환경친화적 가르침과 생활양식을 직접 몸으로 구현한 실천활동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한국불교는 한국의 자연과 지구의 평화를 위한 초석을 놓은 것이다.
문제는 반자연적 사회의 도도한 흐름속에서 자연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하여 앞으로 불교계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이다. 이번 사건으로 그동안 만연된 패배의식에 젖어 또 다시 움츠려들기보다는 또 다른 시대적 과제로 인정하고 나아가야 할 때이다.
지금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환경독재의 관행을 타파하기 위하여 불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되살리는 새로운 분발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미 여러 면에서 불교계의 생명존중과 자연정의에 관한 결과물들이 하나 둘 드러나고 있고, 기본적인 토대도 갖추어져 있는 실정이다. 이제야말로 이러한 결실들을 잘 엮어서 이 시대 자연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새로운 노력들을 체계적으로 시작할 때이다.
그런 면에서 천성산 소송에 대한 기각을 확인한 날은 참 좋은 날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불교계의 참다운 노력에 의하여 이후의 날들은 이 사회속에 사회정의와 함께 자연의 정의도 뿌리내리고, 오늘 우리가 사는 이날이 우리들만의 날은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과 전체 지구인들도 다함께 같이 누려야 할 참으로 좋은 날이기를 바란다.
200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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