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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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임제선사가 탑전(塔殿)에서 열(?) 받다/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조사 사리탑은 추모대상이자 깨달음의 공간
향엄선사, 사리탑 청소하다가 홀연히 깨쳐

해동 조계종 종조 도의국사의 다례재를 5월 28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모셨다.
삭발, 목욕재계하고 참석했다. 설악산 진전사에는 도의국사의 부도와 탑이 남아있다. 폐사지 탑전도 얼마전 복원을 마쳤다.
종조는 종도의 사상적 구심점이며 정체성 확립의 방편이다. 종조는 부처님과 같은 반열에 두고 있는 것이 종문 가풍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진전사 종조 부도탑의 참배인구는 하루에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조계종 사부대중에게 종조가 어떤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방증이라 하겠다.
인근의 인기있는 해동제일성지 봉정암 부처님 진신사리탑 참배와 아울러 종조 도의국사 부도탑 순례라는 연계 프로그램을 통하여 부처님 제자로서, 또 종도로서 정체성을 동시에 확립할 수 있는 대대적인 인식전환 운동을 전개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조사 사리탑은 참배만을 위한 단순한 추모공간이 아니다. 깨달음의 공간이다. 부도탑 참배공덕으로 깨친 이의 대표적인 인물은 향엄지한(?~898)이다. 그는 키가 칠척이나 되고 아는 것도 많아 제 잘난 맛에 살았다. 그런 그에게 하루는 스승인 위산영우(771~853)선사가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처음 부모의 태에서 갓 나와 동서를 아직 알지 못했을 때 본분의 일을 한 마디 일러 보시오.” 이건 말재주나 잔머리를 굴려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선지(禪旨)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기고만장하다가 그만 대답이 콱 막혀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한참 후 정신을 추스려 스승에게 답을 청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진전이 없었고, 자존심도 상하고, 자신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 결국 걸망을 싸야만 했다. 그리고 정처없이 길을 떠났다. 우연히 남양혜충(?~775)국사의 사리탑을 지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곳을 참배했다. 탑전(塔殿)에서 몸을 추스리며 주변의 풀과 나무들을 정리했다. 번민을 쉬니 위산선사가 준 화두가 저절로 참구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을 청소하다가 땅바닥에 튀어나온 기와조각을 발견하였다. 그걸 치우기 위하여 뽑아들고서는 멀리 내던졌다. 그 기와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면서 ‘딱’ 하고 울렸다. 이 소리를 듣고서 그 자리에서 홀연히 깨쳤다. 저절로 ‘껄껄껄’ 하는 웃음이 나왔다. 그 대답 별거 아니네.
임제의현(?~867) 선사가 달마선사의 부도탑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탑전에 사는 스님이 물었다. “화상은 부처님에게 먼저 절하십니까? 조사에게 먼저 절하십니까?”
이게 뭔 소리야. 뭘 묻자는 거야. 내가 대웅전을 들르지 않고 이쪽으로 바로 온 것을 눈치라도 챈 것인가. 그건 아니겠지. 뭘 모르고 하는 소리렸다. 어디 한번 무게나 달아보자.
“부처와 조사 모두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하도 가당찮은 질문을 하니까 대답도 거기에 걸맞게 해버린 것이다.
“화상께서는 부처님과 조사와 무슨 원수라도 졌습니까?”
내 그럴 줄 알았다. 완전 맹탕이군. 그저 탑만 지키고 있을 뿐 안목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그야말로 ‘밥중’이었다. 전혀 말귀를 못 알아 들었고 묻는 말마저 동문서답이다. 임제 스님은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묻지도 대꾸도 않고 열(?) 받아 참배까지 생략한 채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렇더라도 그냥 ‘쌩’ 하고 튀어나올 것은 뭐람.
시탑자(侍塔者)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삼배나 마치고서 떠나실 일이지. 성깔하고는…. 하긴 임제선사가 풀 먹인 옷 칼칼하게 세우고 찬바람 내며 다녔던 젊은 시절 이야기겠지. 결론은 부도탑도 아무나 지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2006-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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