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성일편, 화두와 하나 되는 것
주객이 사라질 때 지혜 드러나
이 단락에서는 <선가귀감> 21장에 나오는 ‘타성일편(打成一片)’과 ‘업’에 대하여 언급하고 서산 스님의 ‘업’ 풀이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工夫 若打成一片則 縱今生透不得 眼光落地之時 不爲惡業所牽
화두 공부가 무르익었다면 설사 금생에 깨치지 못했더라도,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나쁜 업에 끌려가지는 않으리라.
한문 원문에 나오는 타성일편(打成一片)에서 ‘타(打)’는 ‘성(成)’이라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의 뜻을 강조하는 접두사로서 ‘타성(打成)’은 ‘만들어진 것,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일편(一片)’은 ‘나무 파편 한 조각’으로 풀이되지만 여기서는 ‘한 덩어리’의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타성일편’은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이 화두에 집중되어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가에서 말하는 타성일편은, 화두와 하나가 되어 알음알이로 분별하는 모든 마음을 없애고 온갖 차별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주(主)와 객(客)이 사라져서 달리 차별하는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수행이 완성되었거나 화두 공부가 무르익어 수행이 완성될 즈음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선종에서는 늘 이 말로써 서로 대립되는 관념을 없애고 어지러운 많은 견해와 현상들을 한 자리에서 아울러 하나로 만들어버린다. 이 말을 쓰고 있는 예들을 살펴보면, <벽암록> 제6칙 송(頌)에서 “길고 짧은 것, 좋고 나쁜 것이 한 덩어리로 되니 어떤 것엔들 하나하나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없다[長短好惡 打成一片 一一拈來 更無異見]”라고 하였고, 제17칙 평창에서는 “내가 사십 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었다[我四十年方打成一片]”고 하였으며, <무문관> 제1칙에서 “오래 오래 무르익어 자연 안팎으로 한 덩어리가 되니, 마치 벙어리가 꿈꾼 것과 같아서 오로지 자신의 체험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久久純熟 自然內外 打成一片 如啞子得夢 只許自知]”고 한 내용들이 있다.
본문의 ‘안광락지지시(眼光落地之時)’는 줄여서 ‘안광락시(眼光落時)’라고도 하며 ‘사람이 마지막 눈빛을 땅에 떨어뜨릴 때’라는 뜻으로서 사람의 죽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선요>에는 이 표현이 세 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설사 금생에 화두를 뚫어 삼키지를 못하고 죽게되어 온갖 악도 가운데 놓일지라도, 어떤 경계에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를 않으니 거기에 거리낄 데라고는 없다[ 使今生呑透不下 眼光落地之時 縱在諸惡趣中 不驚不怖 無拘無絆]”는 내용이 있다.
나쁜 업을 지어야 악도에 떨어지는 것인데, ‘화두와 하나가 된 사람’은 선악의 모든 경계를 뛰어넘고 있으므로 어떤 경계에도 놀라거나 두려워 할 일이 없다. 여기에서는 염라대왕이나 저승사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선요>에서 “설령 염라대왕이나 모든 귀신들을 만나더라도 그들 모두 두 손 모아 공경하리니, 무엇 때문인가? 화두참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반야지혜의 부사의(不思議)한 위신력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든 업이 있더라도 마침내 반야의 힘이 더 수승하니, 마치 금강의 돌기둥과 같아서 뚫어도 뚫리지 않고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業者 無明也 禪者 般若也 明暗不相敵 理固然也
업(業)이란 어두운 무명이요 선(禪)이란 밝은 지혜이다. 어두운 무명과 밝은 지혜가 서로 맞설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업’은 범어 ‘karman’ 빨리어 ‘kamma’를 번역한 말인데 조작한다는 뜻이다. 음역(音譯)으로는 ‘갈마( 磨)’라고 한다. 그 뜻은 행위, 행동, 작용, 의지 등으로서 몸과 마음의 활동 전체를 말한다. 보통 신구의 삼업이라고도 하는데, ‘업’에는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는 인과응보 사상이 들어 있다. 이 사상은 미래의 우리 삶을 결정하는 데 있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러 주는 아주 중요한 윤리적 도덕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업(業)을 불교에서는 무명이라고 한다.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일에는 분별하는 주체와 대상이 있게 되는데, 이런 주체를 만들고 있는 것이 무명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명(無明)’은 범어 ‘avidya’ 빨리어 ‘avijja’의 번역으로서 번뇌의 또 다른 이름인데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무명에서 온갖 번뇌가 비롯되기 때문에 ‘모든 번뇌의 근본’이라고 한다. 이 무명에서 모든 경계나 그 도리의 공성(空性)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의 모든 업은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무명이 그 뿌리가 된다. 이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참구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어 주객(主客)이 사라지는 깨달음으로 빛나는 반야지혜를 드러내야 한다고 한다. 어두운 무명과 밝은 지혜가 서로 맞설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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