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엔 극락, 땅에는 항주(杭州), 소주(蘇州)’ 라고 했다. 물자가 풍요롭고 교통이 발달한 데다가 풍광마저 뛰어났기 때문이다. 정원과 호수가 많고 예로부터 ‘쌀밥에 생선국 먹는 곳’이며 게다가 ‘실크(비단)의 고장’이기도 했다. 먹고 입는 것에 문제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차문화가 발달되기 마련이다. 용정차도 이곳이 원산지이다. 인근의 영은사(靈隱寺)는 임제종 양기파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영은보제(靈隱普濟1179~1253)선사는 전등역사서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오등회원>20권을 편집했다. 소동파(1036~1101)가 항주 자사(刺史)를 두 번 지냈고, 인근의 서호(西湖)에 제방을 쌓은 까닭에 소제(蘇堤)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전해져 온다. 그런데 그 축조비용을 도첩(승려증)을 만들어 판 돈으로 충당했다고 하니 그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몇 년 전 항주, 소주를 찾았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 유명한 서호(西湖)도 너무 기대를 한 탓인지 그렇고 그런 보통 호수에 불과했다. 근처 영은사에 갔을 때 비래봉(飛來峰)에는 338개의 부처님이 조각돼 있었다. 고구려의 보덕화상이 백제로 망명올 때 당신이 정진하던 바위를 통째로 가지고 날아왔다고 하는데 이를 ‘비래방장(飛來方丈)이라고 부른다. 석회암 덩어리 비래봉은 멀리 인도에서 날아온 산이라고 한다. 이것을 다시 인도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수백개의 부처님을 조각하여 눌러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보(裨補)로 조성된 부처님을 한 분 한 분 찬찬히 동굴 속을 다니며 뜯어보고 있는데 집합시간이 되었다고 사방에서 소리친다. 해질 무렵이라 가이드가 재촉을 해대는 통에 제대로 친견도 못하고 대충 훑어보고는 모두가 ‘붙들려’ 간 곳이 용정차(龍井茶) 다원이었다. 차를 팔아주는 인연으로 떨어지는 구전(口錢)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다그쳤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씁쓰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서호 호수는 말할 것도 없고 영은사에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허리춤에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찻물병을 차고 있었다. 투명한 프라스틱 병에 찻잎이 가라앉아 있는 푸르스름한 녹차 마시는 일이 일상사가 되어있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그야말로 다반사(茶飯事)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선사들은 차 한 잎 차 한 잔에도 공부의 도리가 스며있다.
남전 스님과 귀종 스님이 함께 길을 가다가 도중에서 목이 말라 차를 달였다. 불쑥 남전이 물었다.
“다른 날 어떤 이가 극칙(極則:불법의 요체)을 물어온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소?”
그런데 귀종 스님 답변은 언뜻 듣기에는 동문서답이었다.
“이 자리에 암자를 세우면 좋겠소.”
그런데 그게 아니다. 지금 서있는 이 자리 이 순간이 바로 불법의 요체라는 의미이다. 제대로 답변한 것이다. 거기다가 조주차 한잔을 더한다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남전 스님은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귀종 스님이 무소유 납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토굴타령’을 하고 있는 줄로 알았다. 신경질적으로 되쏘아 물었다.
“암자짓는 일은 그만두고 극칙의 일은 어떠하오?”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만 거듭하는 남전이 하도 한심해서 귀종은 차관을 걷어 차 버렸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하더니 엎질러버린 차를 아까워하면서 남전이 말했다. “사형은 차를 마셨으나 아직 나는 먹지 못했소.”
이에 귀종이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그런 소견머리로는 물 한 방울도 녹이지 못하겠소.” 그리고는 쌩 하니 혼자 가버렸다. 복장 터지기 전에 차라리 떼버리고 각각 가는 게 서로를 위해 더 나은 일이다.
그런데 그 차는 어떤 지방에서 나온 차였을까? 용정차? 알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