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 종합 > 기사보기
죽고 사는 걸 다 놓는다면 욕심도 아무것도 붙지 않아!
모든 것이 내 탓으로 일체를 돌려야

부처의 길이 너무 멀기만 해요


수행자라면 누구나 부처가 되기를 소망하고 부처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과 모습과는 너무나 멀고 보잘것없는 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부처님의 세계란 중생은 어쩌면 도달하지 못할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답한 마음을 속 시원하게 뚫어주십시오.

부처님의 그 몸체와 우리의 중생의 몸체가 다르다 할지언정 어찌 다르겠습니까? 눈도 같고 귀도 같고 코도 같고 몸체도 같고 발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딛는 사람의 발, ‘요건 원망스러우니까 내가 쫓아낸다. 요거는 잘해 주었으니까 내 고맙다고 쫓아간다.’ 이렇게 갈라서, 조각조각 갈라서 걸음 걷는 중생들의 마음과 그 발과, 옳다 그르다 하기 이전에 아주 평상심으로써 걷는, 부처님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자비심에서 걷는 발과는 뜻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지 생김생김이 차이가 있는 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부처님이 계신 데 중생이 있고 중생 있는 데 부처님이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내가 지금 생각하면 여러분이 한 개별적인 몸이라고 생각할 때 바로 그 마음이 부처니, 바로 그 육신은 중생이니 중생 있는 데 부처가 있고 부처 있는 데 중생이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이 부처라면 그 육신은 바로 중생인 것입니다. 자기 부처가 자기 중생을 그렇게 헐뜯고 나쁘게, 자기 마음을 나쁘게 둔다면 자기 육신의 중생도 그렇게 나쁘게 돌아가니 어찌 고생을 시키지 않는 겁니까, 그게. 그러니 중생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는 바에야 딴 사람의 이익도 상대성이 있기 때문에 딴 사람의 중생들도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마음으로 남을 원망치 않고, 또 조상을 원망을 안 하고,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걸로 전체 일체를 돌린다면 아마도 그것은 견성하고 성불하기는 아주 십중팔구 좋은 일이지요.
부처님의 경을 위로 꿰고 아래로 꿰고 옆으로 꿴다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그렇게 쓰지 못한다면, 그 팔만대장경을 위로 꿰고 바로 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소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때는 저한테 사람들이 이렇게 자꾸 얘기합니다. “어떻게 빌어야 됩니까? 어떻게 기도를 해야 됩니까? 뭘 어떻게 해야만 되는 겁니까?” 이것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기가 살고 자기가 생활을 지금 하면서도 그 생활 속에서 외롭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이러는데, 그 문제점을 누구한테 어떻게 물어봅니까? 자기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을. 그래서 자기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자기가 있는 데 부처님은 그 속에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으로서 자기 마음 내기 이전 본래면목에, 그 실상에게 자기는 ‘이렇게 내가 지금 고통스러운 것도 당신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까 당신에게 일임합니다.’ 하고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당신이 형성시켜서 이렇게 좋은 일이 있으니 참 고맙습니다.’ 하고 놔 버리는 그런 자세. 꺼내 쓰고 부어도 부운 사이 없고 꺼내도 꺼낸 사이가 없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부처로 알고 항상 그렇게 지켜볼 수 있는, 일일이 일체 만법을 지켜볼 수 있게 모두를 규합해서 해 나간다면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가고 얼마나 떳떳하겠습니까. 울던 것도 웃게 되고 만약에 운다 할지라도 그건 값비싼 눈물이 될 것이고 값비싼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즐거움도 거기서 아마 샘솟듯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 불당에 가면 아무것도 놓지 말아야 된다 이런 게 아닙니다. 왜냐. 그것도 바로 자기가 거기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가 부처님 아니라 더한 사람이라도 때에 따라서 참, 어떻게 ‘내 집도 여래의 집이요, 이 도량의 이 부처님 자리도 바로 여래의 집이니 이 집을 운영하려면 내가 해야 할 테니까, 그저 초하루 보름 내가 다만 얼마라도 단돈 만원이라도 올려야겠다. 이게 바로 남의 집이 아니라 바로 내 부처님의 집이지.’ 하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이것이 법당입니다. 또 자기네 집도 법당인 것입니다. 어디든 법당 아닌 데가 하나도 없고 부처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이건 부처가 아니고 이건 등상이야.’ 이렇게 등상불로 따져서도 아니 됩니다. 그 역시도 또한 나의 몸과 똑같은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주를 싸고 있는 부처님의 마음이 거기 서리고 있는 이상 어찌 그것을 무시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불당에 들어가면 불당에 들어가는 대로 마음이 엄숙해야 하고, 내가 혼자 앉아 있다 하더라도, 변소에 가서 볼 일을 볼 때도 엄숙해야 하는 그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재빨리 “하하하.” 하는 그런 마음을 갖지 말고, 좋아도 스무드 하게, 아주 언짢아도 부드럽게 지켜볼 수 있는 자세가 바로 자비이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평상심에 대해서


중국 당나라의 선승 조주 스님께서 남전 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평상심이 도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평상심이야 말로 도를 이루는 첩경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스님께서는 평상심이 어떤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옛날에 선지식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비바람이 치고 뇌성벽력을 한들 어찌 발걸음을 막 떼어 놓느냐.’ 즉 말하자면 뛰느냐 이겁니다. 뛸 게 뭐 있어서 뛰느냐 이겁니다. 그냥 묵묵히 지켜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지켜보면서 한 발짝 두 발짝 떼어 놔라 이겁니다. 옛날에는 10리, 20리 걷기는 우습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길이 지금처럼 아스팔트가 있는 게 아니라 풀섶으로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런 길을, 내 생명과 같이 아끼기 때문에 버러지 하나라도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 짚신짝에다가 방울을 달아서 한 발짝 두 발짝 이렇게 천천히 걸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우리는 경망스럽게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어떠한 급한 일이 생겼을 때도 만약에 그것을 제한 못한다면 경망스러운 일이 생기게 되고, 그때는 죽게 됩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경망하면 그것 또한 죽는 일입니다.
그래서 강도가 집에 들어와서 죽인다 하고 칼을 들었을 때도 경망스러우면 그 칼에 찔릴 것이고 경망스럽지 않다면 그 칼에 찔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급한 일이 생겨도 한번 안으로 굴려서 낼 때에, 그렇게 심중 깊이 내가 안으로 한번 굴려서 낼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어야만 급한 일에도 급한 일이 아니게 수습이 된다 이겁니다. 함부로 자기가 건지지 못할 말 한 마디를 하지 말라 이겁니다. 이것이 다 부처님의 법이지 부처님의 법이 따로 있으면 어떻게 부처님이 온 누리에 그 한마음으로 싸고 도는 평상심이 되었겠습니까?
이것도 평상심이라는 그 자체가 무지하게 큰 말입니다. 평상심이라는 이 말 자체 한마디가 전체 우주를 싼 한마디입니다. 반야바라밀다도 없는 바로 그것을 축소한 것이 바로 평상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도 평상심의 보시라고 하는 것도 전체를 싼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라는 그 말에서 ‘밀다심’ 하는 것도 그것도 보시라고 한마디로 규정을 지어도 좋습니다. 이 보시라는 이 자체 한마디가 너무나 크고 큰 뜻이며 아주 작다고 하면 그렇게 사소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얼마나 자비하시기에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아주 이 세상을 타도한 사람 앞에는 불이법문을 해 주셨고, 이렇게 저렇게 그 사람에 맞게 법문을 해 주셨으니 이 뜻이 얼마나 무궁무진하며 자비스러운 일입니까? 이것이 평상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나시기 이전에는 그 평상심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본래는 있었지만 그분이 발견하셔서 여러분 앞에 펼치신 그 팔만 사천 법문이 다, 한마디로 규정해서 ‘나는 한마디도 안 했노라.’고 말씀하신 그게 바로 평상심인 것입니다. 낮은 데는 낮은 대로 같이 하나가 되어 주시고 벌레가 보일 때는 벌레로 되어 주시고 높은 데는 높은 대로 하나가 되어 주시고 근기가 높아서 불이법문을 할 때는 같이 또 하나가 되어 주시고 이러니, 자기 아님이 하나도 없이 될 때 비로소 얼마나 그것이 자비며 평상심입니까?
진실하지 않은 눈물만을 흘려 본 사람은 그 진실함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눈물을 흘렸든 진실하지 않게 눈물을 흘렸든 과학적으로나 뭘로 볼 때 눈물이라는 건 똑같습니다. 그 눈물 자체는 똑같지마는 그 뜻은 다 다른 것입니다. ‘난 당신한테 가오리다.’ 그렇게 했지만 당신한테 갈 것도 없고 또 올 것도 없더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저 묵묵히 그냥 한 방울 눈물을 주르르 흘리곤 했지요.
나는 물을 쳐다보고 탄식한 일도 많았습니다. 수많은 스님들을 친견하고 그랬을 때, 주로 많이 친견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학문으로 풀어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보면 그 학문이 그리웠습니다. 나이 스물이 좀 넘어서 많은 탄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탄식할 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 고비가 없으면서도 넘어가는 고비가 얼마나 많았던지, 층층대가 얼마나 많았던지 모릅니다. 평등하면서도 그 층층대가 너무나 많았던 것은 자기의 마음에 따라서 층층대가 많았던 것입니다. 올라가고 내려갈 것도 없건만 인간의 그 살림살이는 올라가야만 했고 또 내려와야만 했고, 내려오면 사양을 받게 되는 이런 문제, 문제점들 말입니다.
그러나 사양 받을 것도 없고 사양 안 받을 것도 없는 이 시점에서 오늘이 영원하다는 거를 여러분이 깨닫고 여러분이 자기 속에 자기가 부처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신임하고 안다면 그것이 바로, 나물 삶아 먹고 물 마시는 대장부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도 거기에는 거리낌이 없을 겁니다. 살기 위해 먹는 건지 또는 먹기 위해서 사는 건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분간도 못하고 살아나가는 이 발걸음 걸음걸이, 이 길….
그러나 여러분하고 저하고 같이 손을 잡고서 이렇게 길을 걷고 있습니다. 층층대든 층층대가 아니든 그것을 논하지 않고, 여러분이 걸어가시는 대로 나는 따라서, 그 층층대가 산더미 같든 수미산 같든 그것을 마다 안 하고 걸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으로 지어서 층층대가 있고 그런 것이지, 수미산도 없는 것이고 수미산 아닌 것도 없습니다. 평정한 길을 같이 손잡고 같이 걸어가면서 어떠한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고 떳떳하게 우리 뚜벅뚜벅 걸어가십시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스님, 나라고 하는 틀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속박과 구속에서 벗어나 이론이 아닌 진짜 실천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여러분은 왜 자기를 못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죽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태어나고 죽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생각을 깊이 해 보세요. 고통을 얼마나 받고 나오고 고통을 얼마나 받고 죽는가. 그런데 주인공에 생사를 다, 죽고 사는 걸 다 놓는다면 욕심도 아무것도 생기질 않아요. ‘나’라는 조건, 아집 하나만 버리면, 죽고 사는 생사만 버린다면 아무것도, 욕심도 붙을 게 없어요. 이 세상의 나무 한 그루, 또는 저런 산천초목들을 모두 보세요. 그리고 시장에도 가 보시고요. 세상 살아나가는 그 도리를 가만히 본다면, 끼리끼리 모이고 차원대로 모여서 사는 천차만별의 진리이며 세상입니다. 팔만대장경을 달달달달 외우기 이전에 세상을 바로 보라 이겁니다.
자가발전소는 끌 필요도 없고 켤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가발전소는 항상 전력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 자가발전소는 꺼지거나 켜진다는 이런 언어가 붙지 않는다 이 소리죠. 그래서 그 용광로에 넣어져서 재생되어 나온 여러분에게는 바로 광력과 전력과 통신력과 자력이 주어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력으로써 항상 오고 감이 없이 다닐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자력이 없다면 발을 붙이고 다닐 수도 없거니와 전력이 없다면 통신도 되지 않고 마음으로 서로 사랑도 할 수 없어요. 광력이 없다면 여러분에게 밝음도 오질 않아요. 그리고 진리가 끊임없이 이렇게 이어지지도 않고요. 만약에 우리가 통신력이 없다면 빛보다 더 빨리 오고 갈 수도 없는 거거든요. 이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병이 났다 하더라도 다 갖추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을 수 있습니다. 광력이 있고 자력이 있고 전력이 있고 통신력이 있기 때문에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이 바로 내 마음에 의해서 한마음으로 따라 준다는 얘깁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더 잘 알고 있고, 안 된다는 마음을 더 잘 알고 있고,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더 잘 알고 있고, 모든 일체 괴로움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내면 한마음으로 구성이 돼서 계합이 돼 가지고선 돌아가 주니까 병도 나아서 튼튼하게 되고 가난과 우환 질병, 이런 모든 것이 해소가 됨으로써 오간지옥도 다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겁니다. 오간지옥이라면 모든 지옥을 말하는 겁니다. 내 괴로움이 없어지고 편안해짐으로써 지옥이 무너진다 이겁니다.
또 한 가지는 ‘부모 조상이 잘못돼서 우리 자식들이 잘못된다’ 이런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한다 이겁니다. 법의 조상이나 부처님의 조상이나 우리 육의 조상이나 둘이 아닙니다. 조상들이 자식들을 위할 때에는 자기 생명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지극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마음과 우리 육의 부모들 마음이 똑같습니다. 그것을 둘이 아니라 하며 자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산을 하게 되면 육의 어머니 아버지나 형제들을 왜 등한시하느냐. 세간에서는 품안에 있는 자기 자식들만 자식인 줄 알고 자비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의 부모, 부처님께서는 항시 한발 내려딛고 겸손하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깨달은 분들은 다 부처님이죠. 천백억화신으로서, 삼십이응신으로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꿔 가며, 병자에게는 바로 약사보살이 돼서 나투면서 보호하고, 가난한 이에게는 관세음보살이 돼서 보호하고, 좋은 데를 못 가는 사람에게는 바로 지장이 돼서 보호하고, 어디 길을 가다 잘못되는 사람에게는 수호신이 돼서 보호하고, 가지각색으로 수없이 나투시면서 여러분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지십니다.
이 말을 재차 재차 수백 번을 했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실천을 하지 못할 때에는 내가 더 큰 소리를 해도, 더 많은 소리를 해도, 더 광대무변한 소리를 해도 여러분의 그릇이 작기 때문에 더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첫째에 내가 나를 알아야 하고, 나를 알게 되면 나를 버리고 둘이 아닌 뜻을 알고,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한생각 내면 그대로 건지는 겁니다. 누가 꼭 내래서 내는 게 아니라 보면 스스로 나고, 들으면 스스로 마음이 생기고 이럭하는 것이 그대로 건지는 것입니다. 그게 법이니까요.
마음공부와의 인연에 대해서


나무는 흙에 가려서 제 뿌리를 못 보지만 뿌리가 본래 있기에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된다고 하시는 스님의 말씀을 따라 저도 그렇게 수행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쉬우면서도 확고한 스님의 가르침을 많은 사람들이 공부해 나가다가도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다거나 뚜렷한 수행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이 마음 법을 떠나서 체계를 세워 공부를 하거나 몸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 나가는 도반들이 있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드는 것이, 이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인연은 어떤 것인지 하는 겁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참, 스님네들을 이끌어 가지고 나간다는 것도 어렵고, 또 신도들을 이끌고 나간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예전에 내가 생각한 바로 봐서는 미처 그런 것을 생각 못하고 아주, 너를 죽여야 너를 본다고 했기에 그것만 귀중하게 생각을 했더니, 오늘날에 가만히 보니까 너무도, 이거는 같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면 여러분과 같이 그것이 죽어지지 않는다는 그 점, 또는 내가 산다 죽는다도 없이 같이 돌아가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 산다 이것도 없이 우리는 같이 돌아가면서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복을 짓기도 하고 공덕을 쌓기도 하고 공덕을 감하기도 하고 복을 감하기도 하는 이런 살림살이에 의해서 돌아가는 이 시점의 오늘이 바로 화엄 도리면서 그것이 평삼심이라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을 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한탄할 것도 없지마는 내가 어떤 때는 한탄이 되는 이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미처 몰랐던 이런 것을 새삼스럽게 더욱 더욱 느끼면서 ‘참 광대무변하구나! 우리가 자신들이 모두 살아나가면서 느끼는 이 광대무변한 법을 어찌 부처님께서 말로 다 하셨으랴!’ 아마 그 팔만대장경을 설하실 때, 그것을 다 해 놓았다고 하지마는 그것도 다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어떻게, 이 하루도 변함없이 돌아가는 이치를 어떻게 팔만대장경으로 다 썼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다 말했겠습니까? 사람이 배운 것 안 배운 것, 나는 모른다 나는 안다, ‘난 이만하면 됐어. 이게 뭐 세상 돌아가는 거라는데.’ 하고 이렇게만 알고 거기에 멈춰 버린다면 어찌 그 사사건건이 돌아가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조각해서 다 원만히 해낼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게 사람이 벌어지는 원인이, “어째서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이런 것을 다 제껴 놓고 주인공이 뭐 말라빠진 주인공이며, 또는 이 심주(心柱)가 뭐 말라빠진 거냐? 이런 걸로 성스러운 부처님의 성어를 그렇게 묵살하고, 그게 외도가 아니냐? 그리고 어떻게 해서 탱화나 다른 부처님을 다 앗아 버리고 부처님 한 분만 남겨 놓는 그런 외도의 짓을 하느냐.” 이러는 사람들도 있더랍니다,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런데 거기에 현혹이 되어 가지고 “지금 나는 이것도 저것도 감지할 수가 없으니깐 떠나겠습니다.” 하는 거죠.
비교하자면, 옛날에 어느 선사가 수좌들을 데리고 공부를 하러 어느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갔는데, 들어가다 보니깐 수백 명이 쫓아 올라왔답니다, 그 스님을 따라서. 참 그 스님이 존경할 분이고 각을 이룬 분이니까 내가 쫓아가야겠다 하고 쫓아 나서기는 했는데, 가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모인 그 중에서 어떠한 사람을 부르더니 “얘야, 공부하는 대중들이 다 쇠약해졌어. 그러니 큰 개를 하나 그슬려서 큰 가마솥에 솥을 걸고서 푹 고아서 한 그릇씩 줘야 먹고 기운을 차려서 공부를 하지 않겠느냐.” 하고 개를 한 마리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깐 그 대중들이, 공부하러 올라왔던 스님들이 수근수근 수군수군, 여기서 수근 저기서 수군거리니 ‘저렇게 하는 중이 저게 중이냐’ 하면서, 저건 외도라고 하면서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한 대여섯 명만 남으니깐 서로 쳐다보고 껄껄 웃으면서 ‘추풍에 낙엽 떨어지듯 했구나.’ 하면서 그저 같이들 그분네들끼리만 공부를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진짜 여러분도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거, 그 태어난 자체가 화두며 그 태어난 자체가 원인이 되고 그 원인으로 하여금 부처가 있다는 것을 참 그렇게 지켜볼 수 있다면…. 나물을 먹든지 밥을 먹든지 우거지 죽을 먹든지 물 마시고 편안하게 눕고 편안하게 똥 누고, 이렇게 편안하다면 바로 이만하면 만족한 것을 가지고 수차에 걸리면서 돌아치는 그 원망증으로, 또는 누구로 인해서 나는 공부를 못했고 누구로 인해서 살지 못했고 누구로 인해서 떨어졌고 누구로 인해서 망했고, 누구로 인해서 내가 돈을 잃었고,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공해서 돌아가는 그 길을 같이 걷지 못하고 그냥 중간에 가다가 그 길에 멈춰지고 떨어지고 좌천되고 올라가고, 그건 한계의 폭을 넓히지 못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고 올라가고 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되는 거죠.
큰 나무는 이파리가 하나 떨어졌다고 해서 떨어진 체도 없고 떨어진 사이도 없이 생각하고, 가지가 하나 부러졌다고 해서 뿌리가 들썩거릴 리는 없습니다. 그 가지는, 그 나무의 가지는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만의 그 가지가 아니라 전체적인 가지니까요. 그리고 전체적인 이파리고요. 그래서 이파리가 없어도 아니 되고 꽃이 없어도 아니 되고 열매가 없어도 아니 되나 그런 문제 또한 역시 그것은 나무의 뿌리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 나무라는 것은, 전체의 우주를 싼 뿌리는 아마도 우리가 다 멸망한다 할지라도 그 뿌리는 멸망치 않을 겁니다. 불법이 쇠퇴해지고 불법이 망가진다고 이렇게 말들 하지만 우리가 한 생명이라도, 무생이라도 있다 하면 바로 유생이 될 것이고 유생이 있다 하면 부처님이 나툰다고 하실 것입니다.
본래부터 부처님이 생긴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생기고부터 부처님이 생겼다는 그 자체가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 자리가 따로 있고 우리들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사람의 저 언덕이 따로 있고 살아 있는 이 언덕이 따로 있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모르니까 비교해서 언덕이 있다고 ‘언덕을 넘어서라, 넘어서라.’ 피안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피안의 길로 이끌어 간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체가 없는 마음의 길이라는 것이 너무나 엄청나게 차이점이 있으니까 그 차이로 말미암아 언덕을 비유해서 만들어 놓은 것뿐이라는 것을 여러분과 더불어 알아갔으면 합니다.
2006-05-31
 
 
   
   
2024. 5.1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