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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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원숙한 노년, 저돌적인 청년(하)/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옛날에 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뱀의 꼬리가 뱀의 머리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항상 네가 앞장을 서야 하지? 내가 앞에서 갈 수도 있는데 말이야.”
머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앞에서 가야해. 언제나 그렇게 지내왔는데 갑자기 왜 불평을 하는 거야?”
머리가 꼬리에게 일침을 놓고서 여느 때처럼 앞에 서서 기어가려 했죠. 꼬리는 은근히 부아가 났습니다. 그는 나무에 제 몸을 감았지요.
꼬리의 심술에 머리가 졌습니다.
“그래, 좋다. 네가 한번 앞에 서 보아라.”
꼬리는 얼른 나무에 감았던 제 몸을 풀고 앞장서서 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여 불구덩이에 떨어져 그만 뱀은 죽고 말았습니다.
<백유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뱀의 머리는 나이 먹은 스승을, 꼬리는 젊은 제자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늙은 스승이 언제나 앞에서 자기들을 이끌고 가는 것에 반발을 한 젊은 제자들이 자신들이 앞장서서 교단을 이끌고 가지만 계율에 익숙하지 못한 결과 결국 노스승과 젊은 제자들이 함께 계율을 범해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죠.
늙음을 덧없고 괴로운 일이라고 경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에 이렇게 저돌적인 젊은이의 패기 보다는 노인의 연륜을 높이 사고 있는 경을 발견한 것은 의외의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은 말년의 한 설법에서 한 나라가 오래도록 번영하려면 신구세대가 화합해야 하고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아주 유명한 밧지국의 가르침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대반열반경).
사실 노인이 젊은이와 힘을 겨루어서 이길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지하철에서의 그 실랑이를 보며 가슴 아팠던 것은 그토록 호방하게 고함치던 노인이 단 한 순간에 젊은이의 기세에 눌리고 그의 고함에 기가 꺾였다는 사실입니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어린 아이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듯이 사람도 늙으면 항상 모든 무리의 업신여김을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삶은 젊은이들의 업신여김을 받기도 하지만 노인들조차도 노년에 처한 자신들을 그리 곱게 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노년이라는 삶의 시기는 무의미하고 구차하기만 한 것일까요? 사람의 일생이란 영유아 시기로부터 시작해서 소년, 청년, 장년의 시기를 거쳐 노년의 시기까지 이르러야만 완성이 되는 것인데, 과연 노년을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고 무시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노년은 사람을 활동할 수 없게 만들고, 사람의 몸을 허약하게 하며, 사람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가며,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노년의 사람은 비참해 보인다고 합니다(키케로, 앞의 책).
하지만 이런 네 가지 이유가 있기에 노년이야말로 여유롭고 진지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시기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되짚어보자면, 세상의 중요한 일은 체력이나 민첩성, 신체의 기민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획과 명망과 판단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이러한 자질들은 노년이 되면 대개 더 늘어나는 법이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쾌락을 좇는 데에서 비롯되지만 노년의 삶은 쾌락에 잠기고 싶어도 잠길 수 없게 육체가 쇠약해져 버렸으니 이제야말로 마음의 눈을 뜨고 미덕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입니다.
그리고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연설은 패기에 넘치는 젊은이의 웅변이 아니라 노인의 침착하고 부드러운 연설임을 상기할 때(<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키케로 지음, 숲 출판사에서 인용) 노년은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가전연 존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이만 먹었다고 다 노인이 아니요, 눈, 귀, 코, 혀, 몸이 바깥 경계에 여전히 애착하고 있다면 아무리 나이 80, 90이 되었어도 철부지요, 이미 제 몸과 마음으로 바깥 경계에 탐착하지 않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간다면 20대 청년도 지혜로운 노년의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잡아함경)
젊은이에게 연륜을 들먹일 필요는 없습니다. 호방하고 저돌적인 패기는 젊은이에게 물려주고, 이제 평생을 공들여 키워온 인생의 나무에서 달콤하게 무르익어가는 열매를 맛보며 깊이 음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노년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될 것이요, 젊은이들은 그런 노년의 원숙한 모습을 무엇보다도 부러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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