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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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차밭에서/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차밭에서 차 따던 위산 선사와 제자 앙산
‘體냐 用이냐’ 한바탕 팽팽한 법담

바야흐로 차(茶)의 계절이다. 우리의 햇차는 모두 ‘우전’을 달고 나온다. ‘곡우이전’에 잎을 땄다는 말이다. 한 때는 우전 햇차에 집착했던 시절도 있었다. 뒷날 생각해보니 쓸데없는 관념적 사치를 부린 거였다. 이제는 생기는대로 먹는다.
‘다선일여(茶禪一如)’에서 보듯 차 마시는 것도 수행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차 마시는 일이 호사가의 취미생활에 그친다면 차의 가치는 반감될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명필로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게송은 다선일여 경지를 읊은 명구다.
정좌처 다반향초(靜坐處 茶半香初)
묘용시 수류화개(妙用時 水流花開)
앞의 구는 체(體)를 말하고, 뒤의 것은 용(用)의 경지를 의미한다는 것은 글줄 깨나 읊을줄 알면 다 아는 소리다. 문제는 ‘다반향초(茶半香初)’다. 흔히 ‘차를 반쯤 마셨는데(혹 반쯤 남았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석연치가 않아 아무리 듣고 생각해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문제는 ‘반(半)’과 ‘초(初)’라는 글자 의미이다. 때마침 도반의 모임에서 이 말이 나와 각자 한 마디씩 돌아가며 의견을 내놓았다.
“반일(半日)의 의미로 보면 어떻습니까? 반나절이라는 말인데. 차를 마신지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향기가 여전히 처음 마실 때와 같다는 뜻으로…”
귀가 시원해지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
반일(半日)이란 전일(全日)이라는 말이니 결국 ‘영원’이란 뜻이 된다. 초(初)는 일여(一如) 즉 ‘한결같다’는 말이다. 그러면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뒷날 안목이 더 열릴 때까지 이 견해를 함께 하기로 모두 합의했다. 의미가 제대로 통하는 뜻 번역이 있길래 그대로 옮겨왔다
본래심의 경지(靜坐處)에서 차를 마시는 향기는 언제나 처음본래 그 맛.
본래심의 미묘한 지혜작용(妙用時)은 물 흐르고 꽃피는 시절인연과 함께 하네.

차밭에서도 체와 용의 법문이 오고 가야만 한다. 그래야 차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를 따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 노동이 되어 버린다. 위산선사와 제자 앙산 스님이 차밭에서 나눈 대화에서 스승과 제자간의 애틋함도 함께 묻어난다. 위산이 차를 따다가 앙산을 향해 말했다.
“종일 차를 따도 너의 목소리만 들릴 형체가 보이지 않으니 그대의 본래모습을 보여다오.”싸가지 없는 제자는 스승의 말에 냉큼 달려올 일이지 여전히 모습을 숨기고 차나무를 한번 흔들어 보였다. 그만 법담이 되어버렸다. 이에 배알이 틀어진 스승이 법대로 말했다.
“네놈은 용만 얻었지 체는 얻지 못했다.”
그러자 제자 앙산은 한 술 더 떴다.
“스승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선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를 양구(良久)라고 한다.
그러자 간이 배 밖에 나온 제자가 한 마디 거들었다. “스승님은 체(體)만 알았지 용(用)은 얻지 못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체와 용으로 한 펀치씩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차나무는 우리나라처럼 무릎아래에서 따기 좋도록 다듬어진 것이 아니다. 보성차밭을 가보면 차 따는 사람의 허리 위로는 다 보인다. 하지만 중국차밭을 다녀온 사람들의 입을 빌자면 차나무가 밀림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스승은 아침에 헤어진 제자가 그 사이에 보고 싶어졌던 모양이다. 다정(多情)이 병(病)이다. 그런데 이놈이 그런 마음도 모르고 가르쳐준대로 교과서적인 답변을 그것도 분별심에 분별심을 더하여 엉뚱하게 되날린 것이다. 스승의 마지막 한마디는 당연히 몽둥이 찜질이다. “네 이놈에게 30방망이를 때려주리라.”
200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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