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한국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에서도 ‘태국 비구니계단의 복원’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종단 차원에서 지원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일단 반갑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속한 대승 불교권과 달리 태국·미얀마 등의 상좌부 불교 국가에서는 비구니계맥이 끊긴 지 1,000년에 가까운 긴 세월이 흘렀다.
부처님 제자로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들은 천주교의 수녀처럼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자’ 중간에 위치한 애매한 신분이다.
특별한 몇 개 나라를 제외하고는 이제 ‘남녀평등’이 당연한 흐름이 될 정도로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데, 아직 ‘세상의 당연한 흐름’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이들 상좌부 불교 국가 승단의 현실이다.
유대인 출신으로 다양한 삶을 경험하고 뒤늦게 비구니가 된 아야 케마(Aya Khema) 스님의 경우에도, 상좌부 불교를 공부하고 전도하는 수행자이지만 대만 비구니계단에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구니 교단이 살아있는 한국이나 대만에 가서 계를 받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미얀마에서는 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출가하여 비구니계를 받고 귀국한 다우 구나사리(Daw Gunasari) 스님이 정부 당국에 구속된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이런 위협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한편 태국의 종교재판소에서는 “여성의 출가를 지원하는 비구는, 누가 되었든 중징계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공표하기도 하였다. 상좌부 불교계에서는 이른바 “<비구니 팔경계법>을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고 내세우며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남녀평등’이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세계 추세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불교는 남녀를 차별하는 종교이다’라든가 심지어 ‘부처님은 남녀 성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물이 끓어 수증기가 팽창하고 있는 밀폐된 그릇에 돌파구를 열어주지 않으면 결국 폭발하고 말듯이, 자연스럽게 솟아오르고 있는 ‘비구니 계단 복원’의 욕구와 ‘꿈’도 마냥 누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처님 당시 출가 비구니로서 깨달음을 이루었던 수많은 장로니 스님들처럼 나도 출가하여 진실한 부처님 제자가 되겠다”는 발심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깨달음과 열반’을 향한 그 구도열정을 누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실제로, 과거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스리랑카에서는 변화가 일어나 비록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여성 출가 수행자’를 인정하는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고 태국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희생이 따를 것이다.
태국이나 미얀마의 보수 승단에서 ‘비구니 교단을 인정하는 것’은, 아마 자본가들이 ‘공산주의 혁명을 인정하는 것’보다도 더 기대하기 힘든 상황일지도 모른다. ‘태국 비구니 교단 복원’에 힘을 보태고 있는 우리 비구니계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깊이 살피고,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별 무리없이 차분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비구니 승단의 역량을 감안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세속사회에서도 이제는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 흐름은 불교계에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상좌부 국가의 비구니 교단 복원’을 희망하고 추진·지원하는 분들에게도,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혁명적인 방법’이 아닌 ‘점진적 개량의 방법’을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