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으로 道기술하는 일 결코 쉽지 않아
부처님 가르침 알리는 기술의 빈곤 아쉬워
부처님오신날에 즈음해 한 방송사는 선을 주제로 한 시리즈물을 내보내고 있다. 벽안의 청년이 선사들에게서 배우는 맑고도 깊은 가르침, 한국의 산사에서 느끼는 독특한 그윽함 등이 잘 표현되고 있다. 청년의 진지한 구도 정신은 우리들에게 오히려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청년이 ‘도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차라도 한잔 하십시오’라고 대답한다. 이 차를 마시고 느낄 줄 아는 것 자체가 도라는 것이다. 나라는 본성이 곧 도이지 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에 대한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에게는 이러한 대답이 놀랄 만한 대답은 아니다. 쉬운 만큼이나 어려운 대답이다. 나라고 인식하는 수많은 오류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만이 느끼는 차 자체의 맛을 그렇게 표현했으리라. 말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 동양의 전통 때문에, 말을 너무 잊어 먹은 느낌마저 드는 답이다.
과학은 논리라는 명제에서 출발하는 체계이므로, 도를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아마 혀가 잘리거나, 불꽃에 나방이 뛰어드는 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강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하므로 배에 대해서 몇 가지 그림을 그려보기로 하자.
도는 어쩌면 플라톤의 이데아와 반대되는 개념인지도 모른다. 플라톤은 변하기 쉬운 속세, 자연의 현상들이 아닌 가장 순수하고 이상적인 개념을 이데아라고 설정했다. 서양의 철학자는 이러한 이데아를 찾고 속세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를 동양의 성현들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데아란 그저 사람이 만들어 낸 허구이며, 변하기 짝이 없는 것이야 말로 존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 변화하는 나고 죽는 모습이 곧 깨달은 것과 같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의상대사 법성게 한 구절)’라고 하지 않았던가.
과학자는 변하는 모습으로부터, 원래 존재의 모습을 가늠한다. 분자를 예로 들면, 분자에 에너지를 주면 전자의 에너지가 증가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빛을 내보는데, 과학자는 이 빛(반응)을 측정함으로써 원래의 전자 에너지를 유추한다. 양자역학은 결코 원래 에너지 자체를 측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저 변화를 측정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그려낼 뿐이다. 그 원래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가 아닐까.
이처럼 그림자를 걷어내면 드러나는 원래의 모습이 이데아라면, 도는 그림자를 걷어낸 양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가르쳐준다. 자연이야 말로 도의 모습일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이지 인간 사회와 반대되는 개념의 nature가 자연이 아니다. 죄를 선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죄라는 것도 마음이 만든 것이고, 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참회라는 천수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요즘, 부처님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술’의 빈곤은 아쉽기만 하다. 논리를 뛰어넘기 위해 논리를 정연히 세우는 변증법적 지혜가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