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선거철이면 단골 메뉴로 나오는 이야기. 모두 경제를 살리자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 슬로건에는 그 누구도 시비 걸거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경제를 살리자는 말은 누구에게나 절박하고 구미가 당기는 말이기 때문이리라.
어김없이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도 이 말은 대다수 후보자들의 슬로건이다. 그만큼 경제적인 문제는 인간의 삶과 직결된 것이다.
그런데 이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경제가 지금은 죽어있나 보다. 그러니 살리자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돌이켜보건대 우리 근현대사에 경제가 살아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우리 역사를 통틀어서, 더 넓게는 인류 역사상 경제가 살아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있는가. 만약에 그런 호시절이 있었다면 경제가 살아 있었을 때 우리는 행복했었던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와 행복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뚜렷한 답을 얻기보다는 수많은 의문부호가 따라 붙을 것이다.
혹시 경제라는 말에 속임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경제가 좋아지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 그것은 신기루, 또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어서 멀리서 바라볼 수 있기만 할 뿐 다가서서는 도저히 만질 수 없는 그런 것, 실체가 없는 그런 것이 아닐까.
혹시 그것은 돌아보았을 때만 비로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고향집의 아련한 추억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옛날 밥 한 그릇, 죽 한 그릇으로도 하루 종일 뛰놀았던 그 어린 시절이 아름답게 느껴지듯이….
경제가 좋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버는 돈이 더 많아져 보다 윤택한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닐까. 번 돈으로는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좀 더 큰 집에서 살고 좀 더 비싼 음식을 먹고, 좀 더 비싼 옷을 입고…. 그런 것 아닐까. 여기서 ‘좀 더’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어느 정도일 때 이제는 충분하다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집에 살 때, 더 비싼 음식을 먹을 때, 그리고 더 비싼 옷을 입고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이 불행할 때 행복해진다.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때 행복을 느낀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경제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무한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행복은 있을 수 없다. 어쩌다 느낀 행복감은 잠시 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완전무결한 행복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으로는 행복해질 수는 없다.
그런데도 세속의 경제학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풍족하게 소비할 수 있을지를 가르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세뇌시키고 있다. 욕망을 먹고 사는 아귀의 세계로 우리들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세속의 경제학은 붓다의 경제학을 만나면 초라해지고 만다. 부처님은 무한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명확히 제시하기 때문이다.
붓다의 경제학은 집착하지 않는 소유와 최소한의 소비를 가르친다. 중도의 생활로 행복해짐을 깨닫게 한다. 나와 우리만이 아닌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밝힌다.
우리의 정치가들이 배운 경제학은 세속의 경제학일까, 붓다의 경제학일까. 그들이 살리겠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경제일까. 우리가 살려야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