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종교를 위하여
종교의 역사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우선, 창시자가 있어야 한다. 육신을 넘어 정신의 비밀을 본 영웅들이 기원전 6세기에 대거 등장했다. 이때를 기축시대(Axial Age)라 하여 인류사의 빛이 가장 강했던 때로 친다. 공자, 노자, 붓다, 소크라테스, 짜라투스트라는 플라톤의 비유를 들면, 동굴의 그림자를 나와 실재를 보았고, 이 지혜를 나누어주기 위해 사람들을 찾았다. 깨달은 자들의 신비한 힘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였다. 집단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학습용 교리가 생기고 조직의 규율이 만들어진다. 대중화는 천박화와 물려있다. 교단이 발전할수록, 창시자의 영감은 그 생생한 깊이와 절실함을 잃고 휴대용으로 단순해지고 경직되기 쉽다.
12세기 유교의 적응과 변신
이때, 종교적 영감은 숨고, 교리와 조직이 더 큰 발언권을 갖는다. 그 억압과 소외가 진전되어 임계점에 다다르면, 창시자의 영감에 기대, 새로운 종교적 혁신이 일어난다. 여기 성공하면 낡은 종교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지만, 실패하면 그 종교는 삶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우리가 아는 위대한 종교들은 예외 없이 이런 과정을 거쳐 왔다.
유교를 예로 들면, 처음 자신의 뜻을 실현시켜줄 제후를 찾아 낡은 수레로 떠돌던 공자의 학단이 있다. 진시황의 가혹한 철권통치에 지친 사람들이 인격과 예절의 부드러운 제도를 원했고, 유교는 한대(漢代) 국교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학문으로 전문화되고 고시로 권력화한 유교는 사람들의 종교적 열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기존의 도교, 방사, 샤머니즘, 점성술 등 민간신앙에 기원 전후하여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태가 급전했다.
그 후, 위진 남북조의 활발한 역경, 포교와 더불어 불교가 대세를 장악했고, 그 발전의 끝에서 당대의 화려한 선이 꽃필 수 있었다. 이때까지 유교는 별로 숨을 쉬지 못했다. 송대에 들어와 지식인들의 정치의 난맥이 커지고 이민족의 위협에 시달리고, 이윽고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자, 지식인들의 사회적 관심이 커졌고, 이와 더불어 개인주의를 넘어 국가와 공동체를 책임질 새로운 사상을 찾게 되었다. 유교가 새로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예전의 교훈적 설교나 일상의 에티켓으로는 새로운 주도를 기약할 수 없었다. 이윽고 불교의 정치한 형이상학과 심리학, 그리고 노장의 우주적 자연관을 포괄하면서, 유교의 사회적 책임윤리를 강조한 새로운 사상이 등장했다. 그것이 주자학이란 것이다. 주자학을 영어로 ‘새로운 유교(Neo-Confucinism)’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에 이 사상이 수입되어 고려의 불교문화를 대체한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조선 후기,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유교는 새로운 변화의 요구에 직면했다. 그 변화의 시도들을 통틀어 ‘실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실험은 실패했고, 유교는 이윽고 망국의 책임을 지고 비난과 망각 속으로 잊혀졌다. 그 안타까움이 20세기 백년의 한국을 알알이 물들이고 있다.
요컨대 영원한 사상이나 종교는 없다. 적응하면 살아남고, 버티면 도태한다. 지금 있다고 해서, 앞으로도 존속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논어>의 경구를 빌면, “사람이 진리를 넓히는 것이지, 진리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카톨릭과 유교의 대화
불교와 유교 사이에서만 심층 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18세기 가톨릭은 조선의 유학과 깊은 영적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한역된 서학서들이 주자학의 물줄기와 만난 이 사건은, 동서의 문명과 사상, 그리고 종교가 본격적으로 대면한 장이었다.
서양은 계시를 통하지 않고 이성의 빛만으로 의미 있는 삶을 구성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탐색하게 되었고, 조선 주자학은 유학이 갖고 있던 신학적 입장을 선명히 부각시키면서, 사회개혁을 이끌고, 계급적 족쇄를 타파하려고 노력했다.
그 대면의 결과, 새로운 문명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실험은 역사적으로는 실패했다. 그 길을 가로막은 것은 성스런 진리의 차이가 아니라 세속적 권력이고, 사소한 의례였다. 제수이트는 유교 문명에 대해 적응적이었고, 도미니크는 순수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다. 오랜 전례(典禮) 논쟁의 결과, 교황청이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정하고, 상제(上帝)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쓰지 못하게 하자, 청(淸) 왕조는 선교사들을 축출하고 조선은 기독교를 유교문명의 파괴자로 단정했다.
조선에는 사옥과 순교의 피바람이 불었고, 서양의 과학과 기술까지 금기시되었다. 문명 간 대화를 통한 조선의 개혁은 이로써 좌절되었고, 이어 정치적 숙청이 잇따랐다. 실학의 개혁 운동이 좌절되었고, 이어 19세기 백년은 암흑기로 남았다. 세계사적 전환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했고,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지는 치욕도 따지고 보면, 이 종교적 대화의 실패에 연유하고 있다면 지나칠까.
종교는 뗏목 같은 것
지금 다시 그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상을 그토록 경계한 종교들이 왜 자신의 종교를 우상화하고, 삶에 족쇄를 채우고, 사회를 폭력으로 혼란시키는지 나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대적해야 할 것은 내 속의 무지와 어둠이며, 그 위에 서 있는 현대문명의 세속성과 물신성이지, 타 종교의 교리나 조직, 신도수가 아니다.
돌이켜 보자. ‘위대한 약속’은 지켜졌는가.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행복을. 원하는 대로 무슨 욕망이든 구현시켜주겠다는 그 장미빛 약속은 지켜졌는가.
우리는 지금 멈추어 서서 인간이 진정 그리던 삶의 모습이냐고 묻는다.
종교는 바로 이 ‘소외’의 현장에서 의미를 갖는다. 종교는 현대 문명의 위기에 대한 웅혼한 도전이다. “오로지 음식과 의복을 위하여 마음의 등불을 끈, 이 궁핍한 삶을 어떻게 인간화할 것이냐.”
이 화두 앞에서 세계의 위대한 종교적 가르침들은 어느 때보다 깊이 연대해야 한다. 여기 이름표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삶의 의미와 영혼의 각성에 도움이 되는 장치라면 무엇이든 쓰고, 쓰고 난 다음에는 버려라!
불교가 이 점에서 특히 유연하고 적응적이다. 불교는 종교를 도그마 화하고, 진리를 뗏목처럼 짊어지고 가는 어리석음을 무엇보다 경계한다. <금강경> 6장은 말한다. “마음의 소외(心取相)도 극복해야하지만, 진리를 도그마 화(取法相)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금강경>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권력과 우상, 지배와 억압을 타파하기 위한 망치이다.
자신의 종교를 우상화하지 않아야 비로소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하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그렇지 않고 우상에 빠져, 일방적 훈계와 배타적 아집으로 일관할 때, 21세기 소외와 니힐리즘에 맞설 영적 전통의 유대와 결집을 기약할 수 없다.
나는 궁극적으로 종교 없는 세상을 원한다. 종교가 있되, 이름이 없는 그런 종교를 원한다. 아니, 지금까지 진정한 종교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다. <금강경>이 말한다. “그래서 여래가 말한다. 너희 비구들이여, 내가 말하는 설법이 뗏목 같음을 알아라. 그러니 진리를 버리고 내려놓을 줄을 알라…. 진리조차 내려놓아야 하거늘, 하물며 비진리야 물어 무엇 하겠느냐.”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