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거지에게 금박광배 잘라준 영서선사
화내는 대중 향해 “相에 집착 말라” 꾸짖어
미술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표현처럼 불상도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 왔다. 불교의 전성기인 신라 고려시대 불상이 경건함과 아울러 미적인 성숙함이 극치에 이르렀다면, 수난기인 조선조에는 사각형얼굴에 약간 움츠린듯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요즘은 풍성하고 넉넉하여 복스런(?) 모습보다는 갸름한 미남형 불상이 뜨고 있다. 게다가 두른 가사까지 날로 화려해진다. 이 모두가 컬러TV 이후 비주얼한 것을 추구해 온 시대적 영향의 반영으로 보인다.
선사들은 불상이라는 외형 속에서 ‘불성(佛性)’이라는 내면세계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가끔 도를 넘은 파격적인 모습은 ‘기행(奇行)’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선종만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면모라고 하겠다. 존경과 신성함 그리고 예배의 대상인 불상마저도 선종의 납자승려들에 의해 가끔 수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불조(佛祖:부처님 같은 조사급 선사)’라는 표현에서 보듯 때로는 ‘간 큰 선사’들이 등장하곤 한다.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 선사의 이름인 ‘천연’은 ‘천진난만하다’ 혹은 ‘천연덕스럽다’ 라는 의미다. 이것도 마조문하에서 공부하던 선사가 천일째 되는 날, 무슨 견처(見處)가 났는지 법당에 들어가 성상(聖像)의 목에 걸터앉는 기행을 연출한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대중들이 놀라 방장인 마조선사에게 일러 바쳤다. 마조선사가 법당으로 달려와 그 광경을 보고는 꾸중은커녕 도리어 반쯤 칭찬을 했다. “천연(天然)스럽도다.”
그러자 바로 내려와 예배드리며 “스님께서 주신 법호(法號)에 감사드립니다”라고 했다. 대중은 모두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뒤부터 ‘천연’이 그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뒷날 ‘단하소불(丹霞燒佛)’에서도 보듯 목불을 태워 사리를 찾는 ‘정말 과격한’ 광경을 연출한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지나친 파격도 아니면서 아름답고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일본의 명암영서(明庵榮西 1141~1215)선사의 일화는 선종만의 독특한 모습과 대중의 일반적인 불상 정서를 함께 만족시키면서도 당신의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영서선사께서 건인사(乾仁寺)에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병들고 굶주린 거지가 찾아왔다.
“보시다시피 제가 병이 들어 처자식에게 먹일 것이 없어 모두가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도와줄만한 소유물이라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선사는 한참 궁리를 하더니 불당으로 들어가 부처님 금박광배를 잘라 가지고 왔다.
“이것을 팔아서 쌀이라도 사시오.”
그리고는 친절히 위로하고 돌아가게 했다. 이튿날 불당에 들어간 대중들은 난리가 났다. 급기야 대중공사가 벌어졌고 분기탱천한 대중과 영서선사가 맞붙었다.
“불경(不敬)스럽습니다. 너무 지나친 것 아닙니까?”
그러자 선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엇이 지나치단 말이오. 나는 불상을 파괴하지 않았소. 단지 부처님의 뜻을 행했을 뿐이요. 부처님도 나처럼 불쌍한 중생을 보셨다면 당신의 팔과 다리를 잘라서라도 도움을 주셨을 텐데 광배 정도가 무슨 대수로운 일입니까?”
그는 오히려 대중을 꾸짖었다. 결과는 선사의 판전승. 불상이라는 상(相)의 모양에 집착하는 대중들에게 상(相)을 떠난 부처님의 진상(眞相)을 보라고 선사가 방편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거지도 거지가 아니라 대중이 “모든 상(相)이 상(相) 아님을 볼 수 있다면 여래를 볼 것(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이라는 <금강경>의 법문을 다시금 새기도록 만들어준 선지식의 화현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