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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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이것도 직업입니까?/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못받은 돈 받아준다는 현수막이 걸렸네요
‘돈’만이 목적이라 못된 짓이요, 악업입니다

그날도 버스에 올라 열려진 창으로 들어오는 싱그러운 초여름의 바람을 즐기며 눈앞 가득 펼쳐진 연초록의 나뭇잎들에 넋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붉은 글씨의 작은 푯말이 눈앞에서 휙 지나갔습니다.
달리는 버스 안이라 처음에는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새빨간 글씨의 푯말은 나무마다 높게 걸려 있었습니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섰을 때에야 나는 그 글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못 받은 돈”
이 네 글자와 전화번호가 철쭉보다 더 붉고 선명하게 쓰여서 푸르디푸른 신록의 자연에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아직도 돌려받지 못했거나 돈을 떼였다면 내가 받아주겠습니다. 내 전화번호는 000-000-0000입니다”라는 문장을 거두절미 딱 네 글자로 요약한 것이지요.
그 푯말을 보자니 ‘참 별 걸 다 직업으로 삼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죽 먹고 살 일이 막막하면 남의 떼인 돈을 대신 받아주러 다니는 일로 제 밥벌이를 할까 싶어서 그 푯말을 붙인 사람이 측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배부른 감상이었습니다.
법적으로 용인된 이자율 안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그 역시 하나의 반듯한 직업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저 ‘못 받은 돈’이란 네 글자에는 너무나 어둡고 무시무시한 그림자가 숨어 있습니다. 오직 ‘돈’만이 목적이고 그 돈을 둘러싼 폭력과 위협과 절망과 범죄의 기미가 느껴집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기술부터 익히고 그런 다음 재물 늘릴 직업을 가지며, 그 직업으로 재산을 갖춘 뒤에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해야”(장아함경 11권)합니다.
“여러 가지 직업으로 스스로 생활을 경영해야 하니, 곧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혹은 글씨·글·산술·그림을 그리는 일 등의 이런 저런 직업을 가지고 꾸준히 힘쓰고 수행하는 것”(잡아함경 제3권)이 바로 살아갈 방도를 완전히 갖추는 일이라는 경전의 말씀도 있습니다.
직업이란, ‘경제적인 소득 즉 대가를 목적으로 하는 일. 생계의 유지, 사회적 역할 분담, 개성의 발휘 및 자아실현을 위해 계속적으로 행하는 노동 또는 일. 사회 성원으로서의 역량 발휘 및 사회 발전을 위하여 일정한 일에 종사하는 것을 말하며, 일에 대한 대가가 지불된다’는 다소 딱딱한 정의가 있습니다.
좀 쉽게 말하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수입이 보장되고, 자기의 개성과 능력을 꾸준하게 발휘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사람의 활동으로 이 사회가 좀 더 유익하고 발전되는 것, 이것이 직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먹고 살겠다며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이 ‘직업’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다섯 가지 좋은 일에는 게으르지 말아야 하니, 그것은 첫째는 재산을 모으는 데[求財]에 게으르지 말며, 둘째는 재산을 지킴[守財]에 게으르지 말며, 셋째는 몸을 보호함[護身]에 게으르지 말며, 넷째는 이름을 보호함[護名]에 게으르지 말며, 다섯째는 법을 행함[行法]에 게으르지 않는 것”(유가사지론 제57권)이라는 가르침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고 재산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명예롭게 살며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직업을 가져야만 명예롭고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도 고민해야 할 일입니다. 생명에 대해 해치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흐릿하게 해주는 물건을 취급하지 않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앙굿타라 니카야에서는 “재가신자는 다섯 가지의 판매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 무기의 판매, 살아있는 목숨의 판매, 고기의 판매, 술의 판매, 독의 판매이다(AN.Ⅲ).”라고 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선업을 짓고 살아갈 수도 있고 악업을 짓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바른 삶을 살아갈 수도 있고 그릇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에 종사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선업과 바른 삶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래야지만 내가 행복하고 내 가족이 행복하고 내 이웃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못 받은 돈’을 받아주는 일은 직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못된 짓이요, 악업인 것입니다.
200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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