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온통 이미지로 범람
선거가 다가오면서 또 ‘이미지’가 화두로 떠올랐다. 어디 정치판만일까. 세상이 온통 이미지(虛妄)로 넘쳐나고 있다. 매스컴과 권력, 산업이 발전하면서 이 양상은 더욱 극성을 띠고 있다. 원본과 복제의 구분이 없어졌고, 짝퉁이 진짜를 뺨치며, 창작과 표절을 가르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
보이는 것에 속지 않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불교가 고구정녕 깨우치고자 하는 바이자, 동서양의 오래된 전통이 공히 가르치는 삶의 지혜이다.
1. 이미지의 그물로서의 세계(三界唯識)
우리가 보는 세상, 즉 이미지들은 욕망의 흔적이고, 자아의 그림자이다. 불교는 그 투영의 이미지(相)에 붙잡히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거듭거듭 타이른다. 불교가 가르치는 것은 그것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숲 속에서 동물들이 우르르 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사슴이 달리니 토끼도 달리고, 말이 달리니 호랑이가 달렸다. 코끼리며 공룡까지 달렸나 싶다. 한참을 달리다가 숨을 돌린 다음, 왜 이렇게 달리는지 진원지를 찾았다. 다람쥐 한 마리가 최종적으로 일어서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찾아가보니, 거기 망고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게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라. 보이는 이미지, 전하는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의 눈, 기(氣)의 교감으로 그것들을 허파, 간파(看破)해야 한다. 부처님의 ‘바른 눈(正眼)’이 왜 우리네와 달리 이마 한 가운데 박혀 있는지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주인공(主人公)의 화두 서암화상은 말한다. “서암 이놈, 알지! 지금부터는 절대 남의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알겠냐?” 스스로 다그치고 다시 스스로 다짐한다. “예, 알겠습니다.”
이 기묘한 일인극의 화두가 전해주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더 이상 거대한 환상에 속아 살지 말라는 것 그것이다.
그래도 남한테 속지 않기는 쉽다. 자신에게 속지 않기가 훠얼씬 어렵다. ‘안’으로 인간은 자기 욕망과 편견의 노예이고, 또한 ‘밖’에서 온 관습과 의견에 지배되는 존재이다. 거기 무슨 ‘나’가 있고, 거기 무슨 ‘자유’가 있는가.
그래서 회광반조, 스스로를 돌아보기가 결정적이고, 명상과 좌선이 그토록 절실한 것이다. 불교는 역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보다, 더욱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종교이고, 철학이다.
2. 왜 여래를 눈으로 볼 수 없는가
<금강경>의 눈은 말한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혜능은 이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혀주었다.
如來欲顯法身故, 說一切諸相皆是虛妄. 若悟一切諸相虛妄不實, 卽見如來無相之理也.
“여래가 법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일체의 제상(諸相)이 모두 허망(虛妄)타고 설한다. 만약 일체의 제상이 허망할 뿐, 알맹이가 없는 것을 깨닫는다면, 즉, 그는 여래가 무상(無相)이라는 이치를 볼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오시리라고 믿는 그 ‘여래’는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그것은 재산이나 지위, 권력 등 이른바 3P(Property, Prestige, Power)와는 다른, 미학적 정신적 가치에 해당한다.
여기 함정이 있다. 물질보다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더 고귀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물질의 우상보다 정신의 우상이 더 위태롭고 위험하다. 진리의 이름으로 특정 종교를 독단화화는 사람들, 정의의 이름으로 특정 이념을 기치로 내거는 사람들이 저지른 죄와 피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작게는 ‘마땅히’의 이름으로 가정과 학교에서 저지르는 설교와 강요의 미시적 폭력들을 섬세하게 경계해야 한다.
불교는 진리를 ‘우상’으로 권력화하고, ‘소유’로 소외시킬까봐, 여래를 희망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를 보자기에 숨겨버린다. 이 “쓰고 지움(sous rature, under erasure)”이야말로 <금강경>이 베푸는 위대한 노파심이다.
이 논제는 <금강경> 전편을 통해 계속 반복 연주된다.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이 테제는 해체론자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중심 개념이기도 하다.
그렇게 <금강경>은 여래의 이름을 썼다가 지워버렸다. 기억하라. “여래가 인간의 몸을 하고, 위대한 자의 표징을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바 범부들은 이 선언에 경악한다. 다음 6장에, 그 경악과 의혹이 이어진다. “대체 이 말을 경건한 불교도들이 어떻게 믿겠는가?”
어쨌거나 사다리는 치워졌다. 이제 무엇으로 우리는 ‘그’를 만날 것인가.
난감한 우리 앞에, 문득, 야부의 노래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且道. 卽今行住坐臥是甚 . 休 睡. 身在海中休覓水. 日行嶺上莫尋山. 鶯吟燕語皆相似, 莫問前三與後三.”
3. <기신론>도 <금강경>과 같은 소식을
함허득통은 이 설법이 또한 <기신론(起信論)>의 소식임을 증거했다. 좀 까다롭지만, 인용 번역하여, 한문 불교의 읽는 맛을 제공하고자 한다.
說誼: 非但佛身無相, 但是一切凡聖, 依正有爲之相, 盡是虛妄, 以從妄念所變現故. 妄念本空, 所變何實. 故<起信>云, 一切境界, 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心念則無一切境界之相. 若見諸相等者, 遮離色觀空也. 恐聞相是虛妄, 又別求無相佛身, 故云相卽非相, 便是如來. 不唯佛化身無相, 是如來所見一切相皆無相卽如來也. 故<起信>云, 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 等虛空界, 卽是如來平等法身.
“비단 부처의 몸이 무상(無相)일 뿐만 아니라, 일체 범부와 성인들에 대해, 이래저래 설정(有爲)한 이미지(相)들은 모두 환상이고 가짜이다. 모두가 망념(妄念)에 의해 불려나온 의식의 변형물이기 때문이다. 망념은 본시 실체가 없는데, 그 변형물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까.
“그래서 <기신론>은 말한다. ‘일체의 경계(境界)는 오직 망념에 의지해서 생긴 차별(差別)이니 만약 심념(心念)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의 상(相)이 없어진다.’ 제상(諸相)이 결국 실질 구분이 없이 마찬가지라는 것을 볼 때, 색을 차단하여 그것을 떠나 공을 보기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 상(相)이 허망하다는 것을 듣고는, 이제 무상(無相)인 불신(佛身)을 따로 구할까봐, 다시 말했다. ‘상이란 즉 상이 아니니, 그래서 여래이다.’ 부처의 화신(化身)만이 무상(無相)일 뿐만 아니라, 지금 여래가 본 일체상이 모두 무상인 즉, 그래서 진정 여래라고 한다. <기신론>은 말한다. ‘지금 말하는 각(覺), 즉 깨달음이란 심체(心體)가 념(念)을 여읜 것을 일컫는다. 념(念)의 상(相)을 떠나면 허공계와 같으니, 이것이 여래의 평등법신(平等法身)이다.’”
- 하여, “여래는 오지 않는다.” 이 말이 섭섭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 “여래는 늘 여기 있다. 다만, 그대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나의 행주좌와 속에, 그리고 내가 ‘하나’로 믿고 있는 이 연대 속에 여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