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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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을 증득하고 네 마음을 발견하라!
내가 산다는 생각없이 함이없이 하고 살아야

어떤 것이 빠른 방법인지요?


많은 분들이 한마음 공부를 하니까 자기의 어려운 일들이 잘 해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공부하는 방법이 공 도리를 바로 가르치는 방법보다 늦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공부하는 방법이, 조사들이 가르치신 절대 공의 자리를 모르는 입장에서 활용에만 빠지는 게 아니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가르침 주십시오.

나는 어려서부터 이날까지 쉬지 않고 걸어오면서 뼈가 굵어졌습니다. 이 뼈 자체도 없는 거지만 말입니다. 그랬는데, 별짓 다 하면서 가르쳐 왔지만 도저히 안되는 것이 ‘관세음보살’ 하고 바깥으로만 찾고들 그러는데, 가만히 보면 자기 가슴에는 하나도 불을 안 켜고 바깥에다 불을 켜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가정이 윤택해지고 자기 중생을 제도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다 부처입니다. 근데 자기 중생을 자기가 거들지 못할 땐 남도 거들지 못하고 해롭게만 됩니다. 아, 자기 몸뚱이 하나 해롭지 않게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몸뚱이를 해롭지 않게 하겠습니까.
말로만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실천을 옮길 수 있어야만 되는 거죠. 이건 생활과 불교가 분리돼서 있는 게 아닙니다.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직결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 따로, 부처님 앞에 가서 불공 들이는 거 따로, 생활 따로, 그러니 이거 어떡합니까? 이게 불교를 제대로 가르친 게 아닙니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네 마음을 증득하고 네 마음을 발견해라!’ 이런 거지 찾으라고도 안 그랬습니다. 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찾기는 뭘 찾습니까! 발견해라 한 거지. 그렇기 때문에 불교인들한텐 주인공을 주장했고, 또 딴 사람들한테는 심주(心柱)라고도 설명했습니다. 지금 그렇게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 진실된 마음으로 ‘이 너가 바로 심주다.’ 이렇게 집어 주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또, 받는 그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진실로 받아들이느냐, 진실로 줬느냐 이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우리 불성은 유생 무생의 불성이 다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항상 빼고, 극장에 들어가는 것처럼 항상 빼고 합니다, 모두. 예를 들어서 ‘죄 몰락 놔 버려라!’ 하니까, 그 말을 듣고선 “다 몰락 놔 버리면, 그냥 놔 버리면 어떡합니까?” “그냥 놔 버리지 그럼 돈 내고 놔 버리시겠소?” 이럽니다.
공(空)에서 와서 공에서 사라져요. 근데 왜 공이라고 했느냐. 우리 모두가 살아 있고 움죽거리기 때문에 공이라고 한 겁니다. 이 공을 유로 살리기 위해서, 즉 말하자면 유에 나타나는 이 자체를 지금 기독교에서는 창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나툼으로 끝났습니다. 나툰다! 이것은 엄연히 살아서 나투면서 돌아가고 있다.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나투면서 지금 돌아가고 있는데 왜 공이라고 했겠느냐?
먼 데를 보지 말고 가까운 데를 보세요. 우리가 하루 24시간 동안에 고정관념 속에서 고정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상대방을 만날 때에 고정된 생각으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만나면 이런 생각이 나고 저 사람을 만나면 저런 생각이 나고, 그렇게 그 사람에 맞춰서 말을 해 주고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금을 수억을 가졌고 회사를 수십 개를 가졌다 할지라도, 또 대통령을 한다 하더라도 그게 오히려 ‘고를 만들어 놓고 고를 받는구나.’ 하는 거를 아마 실감할 겁니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방 한 칸 있으면 있는 대로 그거만큼, 두 칸 있으면 두 칸 있는 대로, 회사가 열 개라면 열 개 있는 대로 그 고는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도리를 안다면 열 개를 가졌어도 함이 없이 할 것이고, 방 하나를 가졌어도 함이 없이, 가졌음이 없이 가졌고, 함이 없이 생활을 하니까 그것은 관리인밖에 될 수가 없는 거죠. 그렇게 나갈 수만 있다면 참 보람 있게, 인생살이를 아마 멋있게 살 겁니다.
내 거, 내 회사, 내 재산, 내 사람, 내 사랑, 웬 게 그렇게 내 게 많은지 전부가 내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끄달리고 얼마나 복장을 치고 얼마나 애통하고 살맛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살아 봤던들 몇 해나 살까요? 철들기 이전 빼고 철들고 나서 몇 해, 몇 해가 지나고 나면 껍데기가 인제 늙어지게 되니, 젊어서 몇 해 동안이나 기분 좋게 내 거라고 그러고 살까요? 난 한심스럽습니다. 모두 사는 게 말입니다.
한 발짝 두 발짝 시계추가 가는 것처럼 자기는 가는 줄 모르게 지금 가고 있습니다. 가고 있는 대로 그것은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오고 있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 도리를 모르면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한 채, 그 윤회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점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도리를 모른다면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너무나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도리를 알면, 허무 아닌 것도 아니요 허무한 것도 아닌 그 실상의 그 지혜는 이 우주를 덮고도 우주의 모든 것이 내가 아님이 하나도 없이 그렇게, 자유스런 그런 마음으로써 아마도 평화스러울 것입니다. 남들처럼 잘 먹는 것보다 우거지에다가 보리밥 한 술을 먹는다 하더라도 아주 참 웃음이 날 수 있는, 그렇게 좋아서 웃음이 날 수 있는 그 웃음은 누구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삼배를 하는 이유?


저는 처음으로 절이라는 데를 가 보았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갔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하다 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절에 가면 법당에 가서 삼 배를 하라고 하셔서 그냥 세 번하고 왔는데요, 굳이 세 번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걸 삼세, 삼 공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버이의 은혜도 은혜지만 스승님의 은혜라든가 부모의 은혜라든가, 이런 거는 삼 단계로 나누어서 볼 때 원 뜻이 그렇단 얘깁니다. 한 번은 자기를 낳아 주신 부모의 은혜, 두 번째는 교훈의 은혜, 즉 말하자면 가르침의 은혜, 스승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모든 생물들이 같이 하면서 같이 돌아가는 거, 같이 돌아가면서 니 부모 내 부모 할 거 없이, 예를 들어서 한 번 내 부모 니 부모가 되어 돌아갔으면 한 번은 또 딴 부모한테로 돌아가고, 딴 부모에 돌아가면 내 부모한테 또 돌아오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부모 니 부모’ 하고 찾을 게 없다는 얘기죠. 그 공덕이 크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공덕이다 이거죠.
삼세라는 뜻이 과거도 되고 현재도 되고 미래도 되고, 그걸 첨보해서 삼세라고 그러는데 삼세를 한데 합쳐서 일심으로 항상 관하고 ‘항상 들이고 냄도 그 구멍이다. 들이는 것도 그 구멍, 내는 것도 그 구멍이다.’ 그래야 우리가 모두를 공부할 수 있다 이겁니다. 약사든지 관세음이든지 지장이든지 어느 거 하나 못 하는 거 없이 지신 지장 다 관리를 할 수 있다,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거죠.
그래서 우리 자체가 윗분의 은혜를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뒤에 자기네들이 또 받아야 하는 그런 이치가 있는 거죠. 끊임없이 받는 겁니다, 이어서. 누구는 안 받고 누구는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인연을 아주 제일 으뜸으로 생각하는데, 불가의 인연도 근중하지만 사가의 인연도 근중합니다. 그런데 유가나 불가나 모든 걸 한데 합쳐서 우리가 어버이한테는 큰 은혜를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길게, 그냥 길다 짧다 할 거 없이 그냥 이어져 내려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이다 그런 소립니다.
그리고 5월이 되면 초파일도 있고 어버이의 날도 있고 스승의 날이 있어서 모두들 감사한 마음으로 어버이와 스승님께 노래를 불러 드리고 그러지만, 그것이 남을 위해서 절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그러지마는 그것이 누구한테 은혜를 베푸는 노래냐 하면 바로 어머니란 말입니다. 어머니도 되고 아버지도 되고, 둘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여러분이 안 믿을지 모르겠지마는, 이 세상의 진리가 어느 사람이든 다 나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는 도리가 이 한 진리예요.
그래서 절을 해도 자기 주인공한테 한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법당에서 절을 해도 자기 주인공에다 하는 거죠. 부처님도 마음에다가 항상 두고, 그 주인공 안에다 항상, 내면에 두고 절을 하고 일심으로 생각을 그지없이 그렇게 해라 하는 뜻이라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어


저는 어떤 종교든지 종교를 택했을 때는 옳은 길로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일반인들보다 성스러운 일을 행하고 계시는 종교인들이 어떤 때 보면 자꾸 문제를 일으켜서 뉴스거리가 되고 이러는데, 그럴 때면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다는 배신감이 들면서 과연 이 사회를 누가 이끌어 줄 것이며 누구를 믿고 따라가야 하는가 하는 한심한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난 참 답답합니다. 왜냐. 그런 걸 왜 보십니까? 바깥으로 바깥 경계를 보지 마십시오. ‘나’가 걸어갈 때 나만이 떳떳하게 걸어가십시오. 그렇다면 그 내가 떳떳하게 걸어갈 수 있는 그 자세가, 온 누리를 싸고 그것을 막을 수가 있는 그 능력이, 우주간 법계의 요소가 다 서로 이렇게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마음을 잘 갖는다면 그것도 역시 잘 봐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애들을 길러 보시죠? 저희들끼리 막 싸우고 이러면서 자라야 이게 성장이 빠른 거죠. 근데 어디 가서 이렇게 그냥 웅치고 있으면서 활발하지도 못하고 나가서 놀지도 않고 친구들하고 싸움도 안 하고 가만히 요렇게 앉아만 있으면 발전이 없어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아주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좋은 현상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좁게 쓰지 말고 넓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포괄적인 생각을 해야지, 요런 좁은 생각을 해 가지고 색으로만 “저것 저것” 이럭하면 아예 이건 정말 우리가 불자로서 공부할 수 있는 태도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오늘부터는 딱 떼어 버리세요. 딱 떼어 버리시고 오직 내가 부처님 뜻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이렇게 이렇게 해야겠다 하고, 이것이 아니다 기다 할 거 없이 ‘나의 주인공이시여. 당신이 억겁 천 년 전에서부터 나를 이끌어 왔어. 지금도 끌고 가고 있어.’ 하고요. 지금 이렇게 이렇게 걷고 있는 거, 지금 말하고 있는 거, 이걸 누가 이렇게 말을 하게 했는가. 누가 귀로 듣게 했는가. 누가 눈으로 보게 했는가. 내 발을 누가 옮겨 놓게 하는가. 이거를 지켜보신다면 그 주인공 속에서 다 나오는 것입니다. 주인공 속에서 그게 다 나오는데 주인공이라는 것도 껍데기에 불과하고 심주(心柱)라는 것도 이게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겁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처음에는 심주라는 걸 불렀는데 인제 심주라는 것도 더딥니다. 이거 홀딱 벗었습니다, 인제.” “그럼 뭐라고 그러느냐?” 그러니깐 “그냥 처음에는 ‘주인!’ 이러다가 나중엔 주인도 없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잘했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떠한 화두를 갖는다 하더라도 내가 나로 인해서 모든 걸 홀랑 벗을 수 있는 그런 직감적인 나로 들어가야 됩니다. 화두를 들고 바깥으로 가서는 안 되고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게 안으로부터 생긴 거니까 안으로부터 나오고 들어가고 나오고 들어가고 하는 거지, 바깥에서 들이고 내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부터 지키고 나로부터 가는, 그 길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고 걸어가는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때 그것이 합일이 돼야 우리가 이름 지어서 견성이니 뭐니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 몸을 이끌고 갈 때, 병이 났든 가정에 어떠한 문제가 생겼든 또 식구들이 어떻게 됐든, 이걸 이끌어 가지고 어느 목적지까지 갈 때에 ‘내가 이거 아이구, 다리가 절룩거려서 아프니까 못 가.’ 이럴 때는, 그거를 부축해서 데리고 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단단히 세우십시오. 그러면 옆에서 여건들이 있는 거를 전부 아주 다양하게 웃으면서 이끌고 갈 수 있는 그 줄이 있습니다. 그 줄은 자기의 주인공, 그것도 이름인데, 그 주인공이란 게 평상심이죠. 그것을 본래면목이라고도 하고 실상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을 주인으로 삼고, 내가 가는 거를 지켜보고 내가 하는 걸 지켜보고 가정살이에서 모든 걸 지켜보면서 이것이 바로 한 군데서, 주인공 내 속에서 나온다는 거를 알게 되면 믿는 것도 그 속을 믿습니다. 또 감사한 것도 그 속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갈 때, 10년을 두고 공부 못한 것도 단 몇 년, 단 1년을 가도 우린 그걸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시공이 초월됐다, 시공이 없는데,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이렇게 한데 합쳐서 에너지처럼 돌아가는 건데 구태여 이걸 나눌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10년을 하루로 만들 수도 있고 하루를 천 년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억겁을 한데 합쳐서 요렇게 비벼서 떨어지는 요 먼지 하나가 우리 인생 한 횟수라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얘깁니까? 그런 거를 한꺼번에 녹일 수 있는 그 문제가, 짊어질 수도 있고 녹일 수도 있다는 이 문제가 한마음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저것 끄달리고 이런다면 이게 좀 많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평상심의 보시’ 도 있고 ‘인연’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체 이 경을 한데 모은 이 말 한마디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수백 마디에 엇갈려서 떠나질 못하고 ‘나는 이걸 읽었더니 이렇더라. 나는 이 소릴 들으니깐 이렇더라.’ 하는 여기에만 얽매이면 도저히 목적지까지 자기 갈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 여러분도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말씀’이라고 하는 게 있고 ‘말’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한데 떨어지지 않는 말이 말씀이요, 한데 떨어뜨리는 말이 말입니다. 그랬을 때 오직 내 마음에 의해서, 마음이라면 보통 그냥 그 마음이라고 하는데, 말씀 그 자체로 보면 평상심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평상심 속에서 일거일동이 다 나옵니다.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고 하는 보시심도 그렇고, 무주상 보시심도 그렇고…. 유주상이나 무주상이나 어디 둘이겠습니까? 때에 따라서는 유주상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무주상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어떤 것을 무명을 칠 수도 있고, 어떤 때 따라서는 그 무명을 살려 줄 수도 있고…. 이 모두가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이 평상심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따로따로 이걸 그냥, 이거 읽고 또 거기 끄달리고, 이것도 보고 끄달리고 저거 끄달리고 이런다면 내가 갈 길이 지금 먼데, 어떻게 그렇게 이거 끄달리고 저거 끄달리고 허우적거리면서 갈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참 힘듭니다, 모두. 여러분 마음 자체의 본래 내 생각나기 이전, 본래면목, 그 주인공을 믿으라는데도 아, 그걸 못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왜 딴 데 그림을 믿고 이름을 믿고 형상을 믿고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 자기가 움죽거릴 수 있는 자기 실상을 왜 못 믿습니까?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믿어야, 그리고 감사한 줄 알아야 부모도 감사한 줄 압니다. 자기가 자기를 몰라서는 절대 부모도 감사한 줄 모르고, 다섯 가지 대신 해 줄 수 없는 문제, 이것도 고마운 줄 모릅니다. 죽음을 대신 해 줄 수도 없죠? 아픔을 대신 해 줄 수도 없죠? 이 세상에 나오는 것도 대신 해 줄 수 없죠? 똥 누는 것도, 자는 것도 모두 이게 대신 해 줄 수 없는 겁니다.
또,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 있으면서도 이게 앉은 자릴 고마운 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지금.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이 공기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산소의 고마움을 모르고 말입니다. 당장 지금 불이 나가서 고통을 받을 때만 “아이구 불이 나가서 어떡하느냐.” 그러지 그 고마움을 느낄 줄은 모릅니다. 물도 고마운 줄 모르죠, 태양도 고마운 줄 모르죠, 바람도 고마운 줄 모르고, 이 다섯 가지 문제가 다 그냥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지냅니다. 근데 이걸 종잡아서 따지게 되면 이 주인공 하나에 전부 그 바람님이든지 흙부처님이든지 물부처님, 다 이게 종합해서 있는 것입니다. 한 몸에 있단 말입니다, 이게.
어부가 배를 가지고 나갔는데 바람이 막 지동 치듯 불었습니다. 배가 뒤집히게 됐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그 모두 일체 유생 무생이 다 한데 합쳐진, 하늘과 땅이 다 합쳐진 주인공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한테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야! 당신이 이렇게 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이 배가 그냥 온전하겠소?’ 한 생각을 순간 내는 바람에 그 바람 부처는 바로 자기가 되고 자기는 바람 부처가 된 거죠. 둘이 아니니까. 그 순간에 바람은 자고 잔잔히 그 배는 가게 됨으로써 그 생명을 다 살렸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우리 생활의 모든 게 다 그렇죠. 그러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용(用)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없다면 부처도 없을 것이고, 망상이 없다면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중생이 없다면 부처가 없다는 그 점을 아예 생각지도 못하는 거죠.
내 마음 자체가 바로 생각나기 이전 본래면목을 안다면 바로 그것이 있다고 입증해야 됩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증거입니다, 그게. 자기가 움죽거리고 있고 말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 될 자격이 있기 때문에, 꿈에도 댁의 마음이 자기 모습을 자기가 끌고 다녔고, 생시에도 자기 모습 자기가 끌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것을 그렇게 놔 버리지 못합니까? 믿어야 됩니다. 자기가 어떻게 자길 그렇게 못 믿습니까?
그래, 이왕 도적질을 하시려면요, 도둑놈이 되려면 진짜 그냥, 아예 전체를 도둑질하세요. 안 하려면 아주 그냥 하지도 말고요. 욕심을 내려면 전체에 욕심을 내지 조그만 거 가지고 욕심내지 마시고요. 욕심을 내려걸랑 아주 부처님이 이 세상 삼라대천세계, 우주 전체를 집어 먹었듯이 그렇게 하십시오. 부처님이 집어 먹은 걸 우리가 뺏는다 하더라도 줄지도 않고 붙인다 해도 늘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열심히 그 자리를 지켜보면서, 모든 걸 지켜보면서 그것이 나 하나의 안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 알아야만 합니다.

똑 같은 뜻을 달리 표현하시는 이유


스님께서 풀어 놓으신 『뜻으로 푼 금강경』을 보면 똑같은 표현인데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할 때는 응여시주이며 여시항복기심이니라.’ 이렇게 한 부분에 스님께서는 ‘내면의 자생중생들을 둘 아니게 다스려야 되고 내면의 한마음 없는 한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느니라.’ 이게 전부 다 ‘한마음의 자생화신보살’로 앞에는 표현하시고 ‘한마음의 자생응신보살’로 말씀하시고 또 그 다음에 ‘내면의 자생중생들’이라고 표현을 하시고 ‘내면의 한마음 없는 한마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저희로서는 절대로 다른 의심 없이 믿고 있습니다만 이게 글자 풀이를 해서 결국 보이는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될 때에 이러한 부분이 이해가 될까 좀 우려됩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그냥 글로만 써 놓으신 게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동을 하게 했거든요. 그 말뜻이 이동을 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이해가 가십니까?
그것이 글자로만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말씀을 하시되 그 말의 뜻은 이동이 되게끔 했단 얘기죠. 남의 속에도 들어갈 수 있게끔 했다 이거죠. 글이 아니라 글이 아닌 말씀이다, 말씀 아닌 말씀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어느 사람 속에도 다 들이고 낼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깐 얼른 쉽게 말해서 예전에는 이런 말을 이렇게 했는데 지금 알기 쉽게 하려니깐 이런 말을 이렇게 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지금의 사람들이 부처님이 말씀해 놓으신 그 뜻을 다 알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공생이다’ 이러면 ‘아, 몸체 하나가 전부 내 생명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더불어 같이 사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죠.
부처님께서 설해 놓으신 걸 옮겨 놓은 책을 열심히 보다가 어느 병자가 병이 나았어요. 또 어떤 사람은 등이 굽어서 고생했는데 하루는 생시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누가 그냥 작대기로 와서 치더니 등이 나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렇게 이 부처님의 말씀이, 뜻이, 하나의 말씀이 수천수만 개로 돌아가되 돌아간 게 하나도 함이 없이 돌아갔다 이거죠. 그러니깐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난다 이 소리죠. 이동을 하는 거예요, 찰나찰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동이 되는 거예요. 우리 눈이 이동이 돼서 보듯이. 이거 보면 이거 보고 저거 보면 저거 보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이거를 알기 위해서 그 수만 가지 모래알같이 많은 색색가지의 진리를, 순간순간 화해서 바뀌는데 그걸 어떻게 대치를 하느냐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마음공부 한 사람들은 대치를 딱딱 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니깐 ‘이 몸뚱이가, 내가, 이것을 내가 이렇게 했다.’ 이것도 내가 함이 없는 거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내가 공해서 없는데 이걸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함이 없이 하시라. 내가 산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라. 내가 산다고 하지 말고 나 아닌 내가 그냥 사는 걸로 하라고 늘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이 껍데기는 마음에 따라서 따라다니는 거지, 에너지가 동하는 자체가 아니라는 걸 항상 생각하신다면 겉으로 보이는 걸로 뜻을 따지고 이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참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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