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는 오지 않고, ‘이미’ 여기에
혜능은 육안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1.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득견여래”(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밑에 혜능은 이런 설명을 붙여 두었다.
色身卽有相, 法身卽無相. 色身者四大和合, 父母所生, 肉眼所見. 法身者無有形段, 非有 靑黃赤白, 無一切相貌, 非肉眼能見, 慧眼乃能見之. 凡夫但見色身如來, 不見法身如來. 法身量等虛空. 是故佛問須菩提, 可以身相見如來不. 須菩提知凡夫但見色身如來, 不見法身如來, 故言不也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색신(色身)은 상(相)이 있고, 법신은 그게 없다. 색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의 화합이고, 부모가 만든 것이며, 육안으로 볼 수 있는데 비해 법신은 물질이 아니고, 청황적백의 색깔도 없으며, 형체라고는 없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오직 혜안,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범부는 다만 색신으로 된 여래만 볼 뿐, 법신의 여래는 보지 못한다. 법신의 몸피(量)는 허공과 같다.
그래서 부처께서는 수보리에게, ‘신상(身相), 즉 몸의 형태나 흔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수보리는 범부들이 다만 색신여래만 볼 뿐, 법신여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몸의 형태나 흔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원효가 관음을 친견치 못한 이유
몇 마디 덧붙인다.
- 우리네 범부들은 여래가 사람의 몸을 하고, 특정한 ‘얼굴’을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룩하고’ ‘원만한’ 얼굴을 소상(塑像)으로 새겨 불당에 안치해 놓았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인간적 표징을 하고 있지 않다. 내가 보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의 투영이고, 그것은 다만 내 그림자이지 여래의 본 모습은 아니다! 만해의 <님의 침묵> 서문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여래께서는 그런 ‘의지’와 ‘표상’밖에 서 계신다. 그러니 육안으로는 잡힐 리 없다. 보려고 하는 의지가 눈을 만들었으니, 삼계유식(三界唯識), 눈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비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있는 그대로’이신 여래는 인간의 이목구비를 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32상 80종호의 신비한 표징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원효가 낙산에서 관음을 못 만난 것은 바로, 그 분의 ‘몸’을 찾고, ‘얼굴’을 더듬고자해서이다. 그분은 금빛 광명을 발하는 얼굴로 오시지 않고, 개울가에서 멘스로 더러워진 월경대를 세탁하고 있었다. 이것을 모르고, 그분을 낙산의 ‘동굴’에서 보려고 용을 썼지만, 그때마다 ‘파도’가 들이쳐서 그를 보지 못했다 한다.
여기 ‘동굴’은 자아 혹은 아상(我相)의 감옥을, 그리고 ‘파도’는 자신의 분별심, 그 오랜 심리적 장애물을 상징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관자재(觀自在), 자유롭게 사물을 보게 될 때, 여래와 관음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역시 얼굴이나 옷이 아니고 마음이다
2.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에 대해 혜능은 이렇게 말한다.
六祖: 色身是相, 法身是性. 一切善惡盡由法身, 不由色身. 法身若作惡, 色身不生善處, 法身作
善, 色身不墮惡處. 凡夫唯見色身, 不見法身. 不能行無住相布施, 不能於一切處行平等行. 不能普敬一切衆生. 見法身者卽能行無住相布施, 卽能普敬一切衆生, 卽能脩般若波羅蜜行, 方信一切 衆生同一眞性, 本來淸淨, 無有垢穢, 具足 沙妙用.
“색신은 상(相)이고 법신은 성(性)이다. 일체의 선악은 다름 아닌 법신에서 말미암지, 색신이 짓는 것이 아니다. 법신이 악을 저지르면 색신은 좋은 곳에 못 나고, 법신이 선을 지으면 색신은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 범부는 다만 색신만 볼 뿐, 법신을 보지 못해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행치 못하고, 일체처(一切處)에 평등행(平等行)을 행치 못하며, 일체 중생을 널리 공경하지 못한다.
“‘법신을 보는 자’는, 무주상보시를 행하고, 즉 일체 중생을 널리 경배하며 능히 반야바라밀을 닦는다. 마침내 그는 믿게 된다. 일체중생이 같은 참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본래 청정하여 때 하나 묻지 않았고, 그리고 항하사와 같은 묘용(妙用), 신비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 “여래는 몸으로 오지 않고, 법신에 얼굴이 없다”는 말에, 낙담하기는 이르다. 얼굴이 없다는 것이 존재가 없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다. 혜능은 분명히 짚어준다. “법신은 얼굴이 아니고 마음이다!”
마음의 미추는 얼굴을 따지지 않는다. 신분이나 재력, 명예나 직위도 모른다. 법신, 즉 이 ‘마음’은 누구에게나 더도 덜도 없이, 공평 평등하게 있다! 이 마음 하나 잘 쓰면 다음 생에도 천상을 보장받지만, 마음 하나 엉터리로 쓰면 살아서 힘든 지옥을 견뎌야 한다.
법신을 본 자, 자기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비밀을 본 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비전을 갖고, 사람들을 대하는 전혀 다른 태도를 키워갈 것이다.
그것은 성취와 실패, 이익과 손해 등의 도구적 속물적 삶을 누그러뜨리고, 존재의 부름에, 삶의 의미에, 교감과 배려에 근거를 둔 삶이다. 이를 혜능은 한 마디로 ‘무주상보시’라고 총지(摠持)했다.
“아상 없이 아낌 없이 주는 삶을 살라…. 가까이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잃지 말라. 그 실천의 삶이 반야바라밀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보살이고, 여래이다.”
혜능의 설명은 이어진다. “그 삶의 걸음에서 그는 알게 된다. 진짜로 ‘얼굴’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세속의 그 다단한 차이와 차별에도 불구하고, 같은 마음을 가졌으며, 그 바탕은 누구나 청정무구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불성의 빛은 언제나 환하고, 또한 무한한 신비의 활동을 펼쳐나간다는 것을…. 그 빛을 다만 우리의 무지(無明)로 하여 보지 못했고, 오랜 윤회와 습기의 장애로 하여, 그 공능을 스스로 마비시켜왔을 뿐이라는 것을….”
야부의 노래
“여래는 없지만, 그러나 있다.” “여래는 또한 오지 않지만, 그러나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 분은 ‘이미’ 와 있었고, 그리고 어디에나 있다! 그분은 지하철에서 신문을 보고 있거나, 직장에서 나랑 성과와 업무스타일을 두고 다투고 있으며, 또 무엇보다 늘 보는 가족의 울고 웃는 얼굴 속에 계시다.
이 역설을 야부의 송은 한꺼번에 읊고 있다.
冶父: 山是山, 水是水, 佛在甚?處. 有相有求俱是妄, 無形無見墮偏枯. 堂堂密密何曾間, 一道寒光 太虛.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는 어디 있는가. 이미지(相)에 붙들려 있거나, ‘지금 여기’ 너머를 추구(求)하는 것은 허망한 시도라네. 그렇다고 여래는 없고, 만날 수도 없다는 것은 절망의 구렁텅이! 보라, 저기 뚜렷하고, 촘촘해서 한치 틈도 없는 것. 차가운 빛 하나가 태허(太虛)를 싸그리 태워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