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믿어야 화두와 하나돼 마음 길 끊어질 때 깨달음 얻어
참선 공부에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스승과 화두에 대한 가르침에 큰 믿음을 일으키는 것, 둘째는 화두를 꼭 타파하겠다는 큰 원력을 지니는 것, 셋째는 화두에 대한 진실을 알려고 하는 큰 의심이다. 이런 요건을 갖추려면 먼저 훌륭한 스승을 만나 올바른 가르침을 받는 것이 선행 조건이다.
이 조건이 갖추어지면 세 가지 요건은 저절로 갖추어진다. 믿음과 원력과 의심이란 올바른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야 제대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 여건이 주어지면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주고받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삶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생생하게 가슴을 적셔주는 ‘살아 있는 말’이 될 것이다. 이를 활구(活句)라고 한다.
‘살아 있는 말’로써 화두를 활용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선가귀감> 17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此事 如蚊子上鐵牛 更不問如何若何 下嘴不得處 棄命一 和身透入
화두를 공부하는 일은 마치 작고 연약한 모기가 무쇠 소에 올라타서 다시 어떤 이유도 묻지 않고, 주둥이를 댈 수도 없는 곳에다가 죽을 각오로 무쇠를 단숨에 뚫어서, 자신의 몸뚱이조차 그 무쇠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화두를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곳은 어떤 문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영역이요, 어떤 개념을 가지고도 가르칠 수 없는 교외별전(敎外別傳) 영역이라고 하였다. 이 부처님의 영역에 들어가려면 중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비분별을 다 떨쳐버려야 한다고 했다. 간화선에서는 이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 화두를 참구한다. 작고 연약한 모기가 무쇠 몸을 뚫는다는 것이 보통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듯, 늘 시비분별을 일삼고 살아가는 중생이 모든 생각을 끊고 화두에 몰입한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불가사의한 일을 해내려면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시비 갈등으로 흐트러진 마음이 하나로만 모아진다면 어떤 일인들 이루지 못할 것인가? 화두란 그런 것이다. 스승을 믿고 그 가르침을 철저히 믿는다면, 화두가 떨어지는 그 자리에서 어떤 이유도 묻지 않고 화두 속으로 들어가 화두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화두를 타파하려는 원력이 있다면 자신의 목숨조차 돌볼 겨를이 없이 공부에 매진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할 일을 마친 대장부가 되지 그렇지 못하다면 여전히 중생이다. 그에 관해 고봉 스님은 <선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화두 공부하는 일을 논하자면 마치 작고 연약한 모기가 무쇠 소에 올라타서 다시 어떤 이유도 묻지 않고, 주둥이를 댈 수 없는 무쇠 소의 몸을 죽을 각오로써 바로 단숨에 뚫어, 자신의 몸뚱이조차 무쇠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바로 이러한 때가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 있는 것과 같아서, 온갖 보물을 취해도 다 가질 수 없고 그 보물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더라도 다 쓸 수가 없다. 뜻이 견고하지 못하고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아 공부가 늘어지거나 쓸데없이 바쁘기만 하면, 설사 날아서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도달하게 되었더라도 여전히 하나의 굶주린 모기일 뿐이다.”
서산 스님은 이 단락을 “앞에서 말하고 있는 뜻을 거듭 거듭 다져 ‘활구(活句)’를 참구하는 사람들이 굳건한 원력으로 공부에서 물러나지 않게 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몽산 스님의 말을 <몽산법어> 첫머리에서 인용하였다.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할 것이요 오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할 것이니 조사의 관문을 뚫지 못하고 마음 길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그 모두가 풀과 나무에 붙어 사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옛 스님은 “생사를 해탈하려면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한다”라고 했다. 무엇이 조사의 관문인가? 수산성념(首山省念) 스님은 “죽비라 해도 경계에 걸리고 죽비라 하지 않아도 틀렸다”라고 하니, 이 자리에서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다. 어떤 이유도 묻지 않고 작고 연약한 모기가 무쇠 소 몸을 뚫듯, 이 관문을 타파해 바른 안목을 얻고 천하의 기운이 통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관문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 없고 어떠한 법도 통하지 않을 것이 없다.
그 자리에 모든 것이 드러나 나와 남의 경계가 털끝만큼도 틈이 없고, 흐르는 시간의 처음과 끝이 현재의 한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관문이 돈오(頓悟) 경계이다.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요체는 ‘무(無)’자 화두를 타파하는 데 있다. 이 관문을 뚫기 위해서는 마음 가는 길이 끊어져서 오묘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이 조사의 관문을 뚫었다면 역대 조사와 손을 맞잡고서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