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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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2부 39강 제 5장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서설/한국학중앙연구원
여래는 오지 않는다

<금강경> 하면 언필칭 떠오르는 사구게가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가 그것이다. 앞의 4장의 이야기를 총괄 요약하는 이 한 마디는 불교조차 상(相)임을 정문에 일침으로 질러준다. 그 침 앞에 명현(瞑眩), 눈 앞이 아찔하다.

원문, 언해, 번역
(원문)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언해)
“수보리야! 뜻에 어떠뇨? 어루 신상(身相)으로 여래(如來)를 보랴 못 보랴?” “아니이다, 세존하! 신상으로 여래를 시러(능히) 뵙지 못하리니. 어찌어뇨? 여래 일르신 신상이 곧 신상이 아니니이다.”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일르시되, “무릇 있는 상(相)이 다 이 허망(虛妄)이니, 만약 제상(諸相)의 상(相) 아닌 줄을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
(번역)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능히 육신의 모습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육신의 모습으로 여래를 뵙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붓다의 증거로) 말씀하신 육신의 표징은 객관적 사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그렇다!) 무릇 모든 표징은 다 실재하지 않는 환상이니, 만약, 일체의 표징이 순전히 의식의 구성물임을 깨달으면, 그때 여래를 보게 되리라.”

진리의 환상도 버려라
5장의 제목은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이다. “객관적 사태(理)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4장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들려준 바 있다. 붓다는 1) “보살은 모든 중생을 니르바나로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사람”이다. 그리고 2) 그 보살의 삶은 무한히 주고 베푸는 것인데, 거기 아무런 자의식이나 보답에의 기대가 없다.
지금 여기서는 세 번째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살은 그런 자아의 환상도 없어야겠지만, 3) 더욱 “진리에의 환상도 없어야한다.” <금강경>은 <반야심경>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경배하는 진리의 화신, 여래는 육신의 형상을 하고 있거나, 특별히 위대한 인격의 표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불교가 도그마(dogma)가 아님을, 통념의 종교성과 같이 취급되기를 단적으로 거부하는 혁명적 선언이다. “성자는 없다!”
모든 종교는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여기 종교의 배타성과 맹목성이 있다. 그런데 불교는 스스로를 절대화하기를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위대해지기를 거부함으로써, 불교는 진정 누구보다 높은 위대한 종교가 되었다. “수보리야, 내가 말하는 성자는 성자가 아니다. 그래서 성자라고 한다.” 이 역설의 논제는 <금강경> 전체를 통해 거듭 거듭 반복된다. 그만큼 중요하다.

거듭 말하노니, “여래는 없다”
<금강경>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이 변주를 한 자리에 놓고 보기로 한다.
1) 제 13장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수보리여! 뜻에 어떠뇨. 어루 32상(相)으로 여래를 보리 못 하리?” “아니이다. 세존하! 32상으로 여래를 시러 뵙지 못 하시오리니, 어찌어뇨? 여래 이르신 32상이 곧 이 상 아니라. 이 이름이 32상이니이다….”
…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2) 제 20장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수보리야! 뜻에 어떠뇨? 부처를 어루 구족색신(具足色身)으로 보랴 못 보랴.” “아니이다, 세존하! 여래를 구족색신으로 보시지 못 하리니. 어찌어뇨? 여래 이르신 구족색신이 곧 구족색신 아니라, 이 이름이 구족색신이시니이다.” “수보리야! 뜻에 어떠뇨? 여래를 어루 제상(諸相) 가짐으로 보랴, 못 보랴?” “아니이다, 세존하! 여래를 구족제상으로 보시지 못 하리니. 어찌어뇨? 여래가 일르신 제상구족이 곧 구족이 아니라, 이 이름이 제상구족이시니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色身見. 何以故. 如來說 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可以具足諸相見不.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諸相見.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3) 제 26장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수보리야! 뜻에 어떠뇨? 어루 32상으로 여래를 보랴 못 보랴?” “수보리가 사뢰되, “그리, 그리합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뵈오리이다.” 부처 가라사대, “(그렇지 않다,) 수보리야! 만일 32상으로 여래를 볼진댄, 전륜성왕이 곧 이 여래이로다.” 수보리가 부처께 사뢰되, “세존하! 내 부처 일르신 뜻 알기론, 32상으로 여래를 뵈옵지 못하리로소이다.” 그때 세존이 게를 일르시되, “만일 색(色)으로 나를 보며, 소리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邪)한 도를 행하는지라, 여래를 능히 보지 못하리라.”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觀如來.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觀如來者, 轉輪聖王, 則時如來.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觀如來. 爾時世尊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4) 제 29장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수보리야! 만일 사람이 일르되, ‘여래가 오며 가며 앉으며 눕느니라’ 하면, 이 사람은 내 일르는 뜻을 알지 못하나니. 어찌어뇨? 여래는 부터 온 데 없으며 또 간 데 없을새, 이름이 여래라.”
須菩提, 若有人言, 如來, 若來, 若去, 若坐, 若臥, 是人不解我所說義.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제 13장의 ‘32상’, 제 17장의 ‘인신장대’, 제 20장의 ‘구족색신’은 다 같이 위대한 인물의 신체적 특징을 가리킨다. 붓다는 이들 표징으로 여래를 보려하지 말라고 당부해 마지 않는다.
나아가, 제 26장에서 붓다는 ‘형상과 음성으로 여래를 찾는 사람’은 삿된 이단이라고까지 경고한다. 제 29장에서는 이 모든 사태를 종합해서 말한다. “여래는 오지도 않았고, 또한 가지도 않았다!” 그동안 여래를 찾아 덤불을 헤치고 숲을 헤맸던 사람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이제 어찌할거나. “붓다는 없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 있는가. 경전에 있을까 하고 기웃거리니, 당장 “붓다는 설법한 적이 없다”는 꾸중이 돌아온다.
제 21장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이 이야기를 선의 창시자 달마도 그대로 따라 했다. “확연무성(廓然無聖)!”
붓다도 없고 성스러움도 없다. 모든 발판과 의지처를 빼앗기고 그럼에도 남은 자리가 있을까. 그곳은 바로, ‘내 마음’이다.
내가 곧 붓다이고, 내 마음이 곧 금강경이다! 아니 그렇지 않고, 나는 붓다가 아니고, 내 마음은 금강경이 아니다!
대체, 누가 이 말을 믿겠는가. 경건한 불교도들 중 누가 “여래가 없다”는 말을 수긍하겠는가. 그 충격과 의혹이 다음 6장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에서 제기된다. “세존하! 자못 중생이 이같은 말씀 장구(章句) 듣잡고, 실(實)한 신(信)을 낼 이 있으리이까, 못 하리이까?”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2006-04-26
 
 
   
   
202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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