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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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부 38강 육조의 구결 정신, <금강경>과 <육조단경>/한국학중앙연구원
혜능의 돈교, “새 술을 헌 부대에”

혜능의 구결이 한편 엉터리이면서 매우 독창적이고, 실참적(實參的)이라는 것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혜능은 경전의 원래 의미와 문맥을 덮고, 천연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렇다. 삶과 경험이 목소리를 높일 때, 한때 스승이었던 경전의 낡은 문자는 이제 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경전을 발 아래 두지 못했다면, 아직 경전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스승을 넘지 못한다면 그는 똑똑한 제자라고 할 수 없다.
혜능의 구결 정신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기로 한다. 이는 곧 <육조단경>의 정신이기도 하다.

혜능과 신수
신수의 점교는 계율과 선정의 작법(作法)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정화시켜 가라고 권한다. 이는 <법구경(法句經)>의 가르침, 즉 “여러 악한 업을 짓지 말고 뭇 착한 일을 해 나가라. 스스로 마음을 맑게 가라앉힐지니, 이것이 여러 부처의 가르침이니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心 是諸佛敎)”와 같은 정신을 표명하고 있다. 신수는 이 길을 철저히 밀고나가 신비한 위광을 얻고, 이윽고 측천무후의 심복과 귀의를 얻기까지 했다.
혜능의 돈교는 그러나 좀 달리 말한다. 그는 마음은 본시 자유로운 것이라 안에도 밖에도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가 처음 저자거리에서 들은 <금강경>의 권고처럼, 비밀은 “어디에도 마음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데(應無所住而生其心)”에 있었다.
그러자면 마음속의 불순물과 고착을 걷어내야 할 것이다. 여기 범부의 습기뿐만 아니라 법을 성취하려는 수행자의 욕심까지 걷어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는 무엇인가를 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자신과 대면하도록 가르칠 뿐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 법을 위시하여 일체의 기대를 버릴 때, 그 진일보(進一步) 앞에 천신이 하늘수레를 대령할 것이다.
그래서 혜능은 불교의 전 경전을 “자신과 대면하라”는 한 구절로 집약시켰다.

<육조단경>의 정신, “너는 이미 부처다”
혜능의 돈교는 그동안의 불교를 근본적이고 파괴적이며 혁신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핵심은 부처를 자신의 밖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발견한데 있다! “너 자신이 곧 부처이다(心卽是佛)!”
그동안의 불교는 저쪽 언덕에 거룩한 부처들이 있고, 이편 언덕에서 한심한 내가 그분들을 경배하고, 그분들을 닮기 위해 길고 고된 수련을 해 나가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육조의 선은 이 점교(漸敎)의 발상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다시 기억해라. 네가 곧 부처이다. 너를 하찮게 보는 사람들의 혀에 속지 마라.”
이 돈교(頓敎)의 선언으로 하여 그동안 불교를 구성하고 있던 수많은 코드들이 혹은 버려지고, 혹은 전혀 다른 얼굴로 재편되었다. 그 자신불(自身佛)의 혁명이 <육조단경>이다. 그 메시지, 혹은 강령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팔만대장경의 가르침들이 더 이상 유효한 지침이 될 수 없었다. 깨달음의 비밀은 이미 자기의 마음속에 있으니, 그것은 경전의 문자를 통한 지식으로 발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정보에 의지하지 않는, 경전 밖의 진실!’이 선의 표어가 되었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의 조화
전통적 경전과 수행법들을 버렸으니, 선은 새로운 독자적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것이 선의 얼굴과 트레이드마크가 될 것이었다.
육조 혜능은 그러나, 전통 전체를 내버리기보다, 그 오래된 부대에 단순화 직절화의 새 술을 담는 쪽을 방법을 택했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것은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조화시키려는 전략의 결과이다. 너무 파격적이었다면 준비 안 된 청중들은 등을 돌렸을 것이다. 이 전통 존중적(?) 태도는 나중 선의 파격과 파천황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온건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 불교의 교학과 수련법들을 ‘마음의 즉각적 파지’ 하나로 귀착시켰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2) 팔만대장경은 결국 내 마음 속의 부처를 깨닫게 하는 보조 장치이므로, 굳이 버릴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문자에 끌려 다니지 말고, 핵심적 취지를 캐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평생 <법화경>을 읽어왔다는 어느 학승을 향해, “그 근본 취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굴림 당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경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과, 그 취지를 장악하는 것이 소승과 대승을 가르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3) 소승과 대승에 대해 우리는 많은 얘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혜능은 이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한다. 혜능의 새로운 교판(敎判)에 따르면, “소승은 아직 문자의 숲에서 헤매는 사람이고, 중승(中乘)은 문자의 취지를 대강 캐치한 사람, 그리고 대승은 바로 그 자각에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럼 최상승은…그는 바로 그런 노력조차 필요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마음 하나 가다듬는 것으로 끝
4) 불교적 수련법에 대해서도 혜능의 생각은 파격적이다. 그는 “마음은 거울이 아니므로, 어디 손댈 데가 없고, 손을 대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삼학(三學)이라 하여 주어진 계율을 지키고, 특정한 명상에 몰입하며, 불교식 지혜를 터득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삼학 또한 “마음에 아무런 내적 외적 갈등이 없는 것, 자신의 불성이 아무런 장애 없이 스스로의 빛과 활동을 해 나가도록 하는 것”으로 파격적으로 재 정위한다.
앞의 <금강경> 4장 구결에서 보았듯이, 보시(布施)조차, 남을 향한 베풂이 아니라, 제 마음 속의 먹구름을 흩어내는(普散) ‘자기 정화’로 읽는 것을 보라.
특히 <육조단경>은 기존 불교에 대한 ‘파격적 재 정위’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그는 좌선이라는 전통적 수행법도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고, 명상에 빠져드는 특정한 작법(作法)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아무런 외적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본래의 빛을 차단하지 않도록 하는 각성의 길”이라고 돈교적으로 변용해서 해석해 나간다.
그는,
5) 이 마음의 자기 각성을 유지하는 것이 불교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믿는다. 그밖에 다른 어떤 외적인 장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불교가 오랫동안 그린 꿈인 서방의 정토나 극락도 실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마음의 각성이 주는 안락함으로 해석했다. “
서방 정토는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 당신들의 마음 안에 있다.” 놀라는 무리들에게 그는 “어디, 한번 보여주랴”라고 농을 할 정도이다.
이 혁명으로 하여 불교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7세기 선의 태동이 없었다면, 불교는 교학의 형식과 승려들의 권위에 눌려, 삶과 절연되고 대중들과 유리되면서 서서히 자신의 생명을 꺼트려나갔을 것이다. 틀림없다. 자연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공룡들을 멸종시키고, 새 생명들을 잉태시킴으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일신해 왔으니. 어디 자연만인가, 문명이 그렇고, 불교가 그렇고, 유교가 그렇고, 지식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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