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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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두두물물이 부처요 불법 아닌 게 없어
하나에서 전부 나오니 그 하나에 전부 놔라!

(지난 호에 이어서)
우리가 정신세계의 50%를 밝게 알아야 그대로 물질세계 50%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정맥 동맥이 같이 돌아가듯 말입니다. 사람이 반이 죽으면 반이 생하고, 반이 생하면 반이 죽고 하는데, 이게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모두 여러분의 마음으로 하나하나 알고 체험을 하셔야만 합니다. 땅속에 있는 금을 캐낸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금으로 쓰이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깨뜨려서 물에다 걸러서 추려서 다 금뭉치로 만들어 놔야 금인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서도 또 금이 아닙니다. 인연에 따라서 손이 가야만이 그게 광이 나고 빛이 납니다. 광이 나야 금으로 귀걸이도 만들고 목걸이도 만들고 팔찌도 만들고 이도 하고 전부 그렇게 해서 나가듯이 말입니다.
우리도 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나무가 자라서 열매 맺는 것도 그렇구요. 우리 몸뚱이가 싹이라면 그 싹을 키워서 아름답게 꽃 피우고, 또 꽃도 그냥 여느 꽃이 아닙니다. 마음의 꽃! 마음의 꽃이 피어야 바로 열매가 맺고, 열매가 맺어야 씨도 생기고 무르익게 되는데 그 무르익는 과정이 바로 수행의 과정입니다. 무르익어야 제 나무에서 익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르익어서 완전히 익어야 모든 사람들이 맛있다고 갖다가들 먹게끔 돼 있죠. 제 나무에서 익지 않은 것을 따다가, 그냥 선 것을 갖다가 아무리 먹이려고 애를 써도 먹지 않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인간의 삶 속에의 철저함과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길이 똑같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에 대한 그 감사함을 어찌 다 말로 하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감사함뿐만 아닙니다. 하다못해 돌부리 하나라도 돌장승 하나라도 풀뿌리 하나라도, 무정물 식물 동물 곤충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다 우리의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두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보고 느끼고 배웠겠습니까? 난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거지든 거지가 아니든, 부자든 가난하든, 여자든 남자든, 애든 어른이든, 또는 곤충이든 풀포기든 어느 것 하나 스승 아닌 게 없습니다. 태로 낳고 알로 낳고 화해서 낳고 질척한 데서 낳는 그 천차만별의 헤아릴 수 없는 사생 자체가 전부 스승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것은 곤충이나 짐승 이런 것은 사람처럼 빼고 끼울 줄을 몰라요. 사람은 빼고 끼울 줄 아는 지혜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들은 지혜가 없으니 빼고 끼울 줄 몰라서 자식을 낳아 놓으면 그냥 자기 몸뚱일 자식한테다 다 바칩니다. 그 모습으로 나왔으니까 그 모습에 따른 행을 해야만 되겠죠.
엊그저께도 얘기를 했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너무 험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개 무명을 쓰고 나왔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혹간 사람의 의식이 있거든요. 사람의 의식이 있는데 아무리 짖어도 개 대접만 해 주지 사람 대접은 안 해 주거든요. 개 모습이니까 개 대접을 해 주지 무슨 대접을 해 주겠습니까. 아무리 악머구리같이 소리를 쳐도, ‘난 아무개다’라고 아무리 악을 쓰고 짖어도 “이놈의 개, 왜 짖어?” 하고서 개 대접을 해 주지 사람대접 해 주는 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을 한 번 쓰고 보면 그 습에 얽혀서 사람 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 습에 얽혀서 사람 되기가 상당히 어렵죠. 그러니 사람이 됐을 때 오신통 통 속을 벗어나서 통을 굴려야만 하겠기에 우린 통 안에서 벗어나야 된다 이런 소립니다.
그래서 그 많은, 깨친 부처님들께서 다 말씀하시기를 “봤다고 해서 봤다고 하지 말고, 안다고 해서 안다고 하지 말고, 타심통이니 천안통이니 숙명통이니 천이통이니 신족통이니 하는 것을 다 한다고 해도 했다고 하지 마라. 그 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바로 사대에 통신을 모두 못하고 마음의 전달을 못하고 행을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이름 해서 누진이라고 했지마는 마음으로써 마음이 벗어나야 이 모두를 타파하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창조력이 생기고 발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부처라고 하지만, 깨달아 가지고 가만히 있는 건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그냥 가만히 있는 거는 바로 목석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의 발전이 없고 말입니다. 그래서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니라. 어느 것 하나 참선 아닌 게 없고, 어느 것 하나 공안 아닌 게 없고, 어느 자리 하나 도량 아닌 게 없고, 어느 거 하나 중생이다 부처다 따로 볼 게 없느니라. 중생 속에 부처가 있고 부처 속에 중생이 있는 거지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는 얘기죠.
공과 색이 어떠한 것인가? ‘꽃이 필 때는 색이요 꽃이 질 때는 공이다.’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겠죠. 그러나 공과 색을, 우리의 정신계를 공이라고 한다면 물질계를 색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색과 공이 즉, 몸과 정신이 어디 둘입니까? 정맥과 동맥이 돌아가듯 어떤 거 하나 떼버릴 수 없는, 그저 둘 아니게 돌아가는 작용일 뿐이죠.
그럼 오늘은 이걸로 내 두서 없는 말은 끝을 내겠습니다. 그러면 질문들 하십시오. (대중 박수)

▲질문자1(남): 자비로우신 스님, 먼 길을 오셔서 우리 전남 광주 불자님들을 위해서 큰 법문 받들 기회를 주신 것을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마음 공부를 해 오면서 여러 모로 정신적 평안함을 체득하였습니다만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들을 공부 재료로 삼으라는 스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믿고 생활해 왔습니다. 오늘은 공부 과정 중에서 의정이 있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요즘 국민들의 지지 속에 문민정부의 부정부패의 척결은 정신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 놀라운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통 세상을 들끓게 하는 부정부패의 근본 원인은 중생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한마음 공부를 했더라면 그렇게 타락해서 인생을 망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님의 가르침이 새삼스럽게 더욱 고귀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해하자면 개인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기업이나 국가나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불가에서 얘기하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참된 욕망이라는 건 어떤 것인가 알고 싶습니다. 특히나 윤리와 도덕이 타락하고 혼탁한 사회 속에서 진정한 참된 삶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욕망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 스님의 높으신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진정한 욕망이라는 것은 더함도 덜함도 없어야 하는데…, 우리가 정신계와 물질계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둘 아닌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건 반드시 중용으로서 행을 하지 그냥 작용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행동을 하는 게 아니고 중용을 하는 겁니다. 안팎을 다 겸해서 하기 때문에, 양쪽에 있는 전자와 전자를 한데 갖다가 붙이면 불만 들어올 뿐이죠. 그와 같이 바로 우리가 저절로…, 아까 얘기했듯이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만 특별히 마음의 향으로 지킬 수만 있다면 그대로 자동적으로 그게 지켜지면서 모든 공덕이 자기한테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분수없이 저지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2(여): 저는 오늘 질문을 올리기 전에 먼저 스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저는 이십 년 동안 몸은 살아 움직였지만 마음은 항상 근원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런 끝에 불법을 만났지만 만물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부처님 가르침과는 달리 부처님은 항상 멀리 계셨고 저는 미혹한 중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스님 구도 소설 『도』를 접하게 되었고 전 거기에서 ‘아! 석가모니 부처님 단순히 그분 한 분만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 아닌 부처님, 그리고 스님,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나’가 둘이 아닌 도리를 보고 열심히 공부해 가고 있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를 못한다 하셨고 스님께서도 각자 그릇의 크기에 따라 물을 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는 것은 각각의 근기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근기는 타고난 것인지요? 그리고 인연 없는 중생이란 무엇을 뜻함인지 가르침을 청합니다.
▲스님: 아주 간단하게 비유해서 말하죠.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딴 직원들과 똑같이 하질 않고 이리저리 건방지게 굴고, 돌아서면 욕을 하고 돌아서면 딴 짓이나 하고, 훔쳐 내가기나 하고 이런다면 그 회사에서 직원으로 두겠소? 안 두죠? 그러니까 인연 없지! 그거는 인연이 없어서 그 회사에 두질 못해요. 그와 같아요. 하하하…. 뭐 크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질문자3(남): 과학 문명은 50%만 담당할 뿐인데 전체를 채우려면 정신과학, 즉 정신, 마음 법, 심성과학을 계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의식과 잠재의식이 계합되지 않고는 완전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현재 의식과 잠재의식은 무엇이며 현재 의식과 잠재의식을 계합시키는 방법은 어떤 것인지, 물론 앞서의 법문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만 우매한 저에게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잠재의식이라는 것은 내가 나기 이전, 자기의 영혼의 근본 그것을 잠재의식이라고 일컬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없으면, 즉 뿌리가 없으면 나무가 없듯이 씨가 없다면 싹이 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까도 색과 공을 말했듯이, 잠재의식이란 바로 자기의 공을 말하는 거죠. 주인공! 주인공이 바로 잠재의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에너지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조그마한 불바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이 몸뚱이, 지금 현재 의식과 잠재의식의 만남이 있어야만 합니다. 항상 만나서 접하면서도 자기 자신들이 그걸 몰라요. 모르니까 자기가 한다고 그러죠. 항상 자기가 한대요. 진짜 자기가 하는 걸 모르고 이 몸뚱이가 자기인 줄 알아요. 그러니까 항상 둘로 보죠. 둘로 보게 돼 있죠.
그러니까 하나로 보게 하기 위해서, 아까도 계향 정향 얘기를 했죠? 그대로 내 탓으로 생각한다면 가정에서도 어떠한 불편이 생긴다 하더라도 화목을 도모할 수 있고 부드러운 말이 나갈 수 있고 부드러운 행동이 나갈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마음공부의 지름길에 의해 나는 나대로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또 발견했으면 지혜를 구할 수 있고, 지혜를 구할 수 있으면 에너지를 배출할 수가 있습니다. 저 전력을 끌어 쓰듯이, 어떠한 용도든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각자가 다 끌어 쓸 수 있는 그런 힘을 여러분이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아까도 얘기했듯이, 다리에 인조 뼈를 넣어도 일 년쯤 지난다면 다시 바꿔 넣어야 되죠.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냐 이겁니다.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데, 부처님을 믿으려면 진짜로 자기 마음속의 부처님을 믿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허공을 헤매는 그런 작업을 하니까 나쁜 일이 생기고 영계성이 생기고 유전성이 생기고 업보성이 생기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된 것이 자기한테 그냥 뭐 조금도 사해지지 않고 나타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잠재의식과 현재 의식이 함께 한다면 의학계에서도, 즉 말하자면 연구 능률이 아주 100%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계 50%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발전할 수가 없어요. 병이 오는 것도 영계성에서 오고 유전성에서 오고 업보성에서 오고 세균성에서 오고 인과성으로 오고, 가지각색으로 오는데 그게 어디서 온 줄 알고 치료를 하겠소? 그리고 또, 모르고 치료를 해 봤던들 그것은 나았을지언정 또 딴 데가 불거져요. 그러니 어쩔 수가 없어요. 썩은 뿌리를 잘라 버리듯 근원을 치료해야죠.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의 뿌리를 알아야 남의 뿌리도 알 수 있고, 자기 뿌리를 알아야 자기 나무도 알 수 있고 남의 나무도 알 수 있고 이런 거죠. 그러니까 심성의학이라야만이 된다. 심성을 빼놓고는 창조도 못해 낼 뿐만 아니라 발전도 못한다 이런 거죠.
▲질문자3(남): 감사합니다.

▲질문자4(스님): 스님, 반갑습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해 주신 수많은 스승들께 감사하면서 제가 공부하면서 약간 미심쩍었던 부분에 대해서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이디오피아에서는 지금도 몇 천 명씩 굶어 죽고, 또 유고슬라비아는 지금 내전을 일으켜서 수없이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이고 있는데다, 가깝게는 제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항상 먹고 사는 것에만, 생명줄을 이어 가는 데만 급급하게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요새 불사 화주 하러 다니는데 거의 두 달 동안 다니면서 제가 제 마음의 부처를 믿는 힘은 훨씬 더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만은 않을 때는 ‘내가 내 마음의 부처를 믿는 힘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깊이 반성하면서 가지만 때로는 ‘내 마음의 자재권이 왜 이렇게 부족한가?’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옛날에 책을 보니까 스님께서는 어떤 영가가 돼지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잡아끌어 가지고 순간적으로 천도를 했다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별것이 아닐 것 같은데 나는 왜 그것이 안되는가? 이런 자제력과 부처를 깊이 믿는 그런 마음 사이에서 그 경계선이 좀 애매하고, 내가 왜 그런 것이 잘 안되는 것일까 때로는 회의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스님: 그런데 말이에요, 그거를 할 양으로 주인공, 마음의 부처님을 찾으니까 안되지, 할 양으로 하니까요. 하하하…. 이거 봐요.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듯이 귀신 방구씨를 발견해야….
▲질문자4(스님): 스님, 그건 옛날에 넘어갔습니다. (대중 웃음)
▲스님: 하하하, 발견해야 그 씨의 싹을 기르는데 방구털을 더 먹여도 안되고 덜 먹여도 안된다 이런 뜻이 있듯이, 가만히 앉아서 할 생각을 안 하고, 이거는 몸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천백억화신으로 화하게 해서 나가서 하게끔 하지 않고 자기 몸뚱이로다가 어떡하든지 해 볼 양으로 그냥 야단법석을 하고 다니니 한계가 있지 않나. 몸뚱이야 언제나 한계가 있지요.
옛날에 축지법을 하는 데도 그거는 몸뚱이로 하는 거기 때문에 술(術)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 시대는 그렇질 않아요. 로켓이 올라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마음의 축지법이 아니라면 안 돼요. 지금 오히려 좀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죽고 사는 거, 하고 안 하는 거를 떠나서 진짜 해 보세요. 그러면 한 찰나예요!
▲질문자4(스님):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중 박수)

▲질문자5(남): 이 공부는 곧바로 들어가는 공부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셔서 저 역시 질문을 곧바로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 저희들을 생각하실 때마다 진하디 진한 눈물이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다면 열반하신 후에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오실 의향이 있으신지 그것이 궁금해서…. (대중 웃음, 박수)
▲스님: 하하하…. 이거 봐요. 몸뚱이로 볼 때는 죽는다 산다가 있겠지. 그러나 본래 나온 것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갈 것도 없어요. 그러니 우리의 마음의 도리라는 건 영원한 겁니다. 이게 그냥 말로만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주의 진리, 모든 거를 타파해 보면 아주 세세히 나와 있어요. 가도 가는 게 아니요 와도 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는 떴다 가라앉았다 가라앉았다 떴다 하는 것뿐이다 이런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떴다 가라앉았다 가라앉았다 떴다 하는 작업이, 그 작용이 천체 진리로서 되는데,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 된다 이런 소리죠.
▲질문자5(남): 질문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이 질문은 다른 법우님들도 조금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그냥 나가려다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끄달리고요, 자식은 부모와 뜻이 안 맞아서 서로 어긋나는 일이 많거든요. 이러한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영원히 벗어나는 딱 소리 나는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스님: 아, 딱 소리가 나게 하려면 자기가 딱 해야지. (대중 웃음, 박수) 아니, 댁이 지금 배가 고파 죽겠는데 대신 내가 밥을 먹는다고 한다면 댁이 배가 부르겠소?
▲질문자5(남): 부르지 않습니다.
▲스님: 부르지 않죠?
▲질문자5(남): 예.
▲스님: 그렇기 때문에 배고프면 먹고, 먹고 나서 똥마려우면 누고, 졸리면 자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여건이, 세 가지란 말도 없이 그대로 여여하다면 자식과 부모 사이의 인연도 그냥 둘 아니게 돌아가죠. 즉 말하자면 바람의 인연, 종 치는 인연, 보는 사람의 인연 이렇게 돼야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부모 자식도 인연에 따라서 깡통이면 깡통끼리 만나고, 넝마면 넝마대로 만나고, 금은 금대로 만나서 이 세상에 같이 모이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당하는 사람도 똑같은 깡통이요, 그렇게 하는 사람도 똑같은 깡통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끼리끼리 만난 거죠. 이 세상을 다 보세요. 끼리끼리 모여 있죠. 스님은 스님대로 모여 있고, 하하하…, (대중 웃음) 속인은 속인대로 모여 있고, 정치인은 정치인들대로 모여 있고, 애들은 애들대로 모여서 놀아요. 또 상점에 가 봐요. 사과는 사과대로 놓여 있고 배는 배대로 놓여 있고, 또 금은 금방에 있고 넝마는 넝마전에 있어요. 그렇듯이 모두가 끼리끼리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업보에 대한 문제를 그 업보가 나오는 데다 되놔라 이런 소립니다. 그래야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내가 항상 말하죠. 자식이 공부를 안 한다, 뭐를 잘못한다, 나가서 자고 안 들어온다, 별일을 다 한다 하더라도 아주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럽게 대해 줘라. “얘, 너 나가서 배나 안 곯았니? 아이, 어디서 잤니?” 아주 이렇게 부드럽게 “네 일생을 생각해서 네가 지금 알아서 해야지 않겠어?” 하고 웃으면서 “얘, 배고픈데 어서 밥 먹어라.” 하고 부드럽게 해 줘야죠. 어떤 것이든지 따뜻한 데로 고이게 돼 있거든요. 그리고 마음을 잡아야지 몸뚱이를 잡아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차츰차츰 모든 것을 나오는 데다 맡기면, 한 방에 전기 올리는 스위치가 하나이듯이, 부모라는 거하고 자식이라는 거하고 알면 그냥 가설이 된 거예요. 부모다 자식이다 하니까 가설이 된 거죠. 그죠? 그래 가설이 된 거니까 내 주인공에다가 모든 거를 맡기고 부드럽게 얘기하고 그러면 그 상대방의 마음속에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둘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어떤 사람이 아들과 그냥 원수처럼 고통스럽게 지냈는데 어휴 세상에, 그렇게 망나니처럼 굴던 그 아이가 어느 순간 “어머니, 제가 독 닦아 드릴까요?” 하더랍니다. “독 닦아 드릴까요, 뭐 해 드릴까요?” 그러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을 잡아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주인공에다 그냥 놔도 아이한테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가설이 돼 있거든요. 그러니 그 지혜로운 마음이라야만이 융통성 있게 집안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얘기죠.

▲질문자6(남): 스님, 반갑습니다. 제가 책을 보다 보니까 많은 스님들과 거사님들의 말씀에 의하면 ‘불성은 개개인에 있다’ ‘하나만 있다’ 그러는데 이 말들이 조사의 어록과 일치가 되지 않으니 불성에 대해서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 이 세상에 두두물물이 부처요 부처님 법 아닌 게 없는데 뭐가 아니고 맞고가 있습니까? 그리고 또 지금 질문하는 분은 누가 말을 하고 있습니까? 개개인이 불성이 없다면 어떻게 말을 하겠습니까? 불성이 없다면 무효입니다. 형체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생각을 못하면 또 목석입니다. 육신이 없다면 또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이라는 것은 바로 움죽거리지도 않으면서 말을 하게 하고 듣게 하고 움죽거리게 하고, 전체를 천차만별로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바로 원동력입니다. 원소죠. 그러니까 댁에서 지금 말할 수 있는 걸 보니까 댁에서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요? (대중 웃음, 박수)
▲질문자6(남): 그러면 스님, 불성은 개개인이 다 지니고 있는 것입니까?
▲스님: 그럼요!
▲질문자6(남): 많은 스님들과 공부를 했다는 분들은 불성이 하나라고 말을 하는데 거기서 그 책의 말과는 일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질문을 드려서 잘 알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대중 박수)

▲사회자: 예. 참 시원한 답이었습니다. 벌써 법회가 시작이 된 지 두 시간이 넘었습니다. 오늘 법회를 여기서 줄일까 합니다.
▲스님: 궁금해하는 분이 있으면 두어 사람 더 하세요.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못하게 되면 그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질문자7(여): 오늘 이렇게 장시간 저희들에게 감로법을 주셔서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스님의 가르침대로, 주인공에 믿고 맡기며 놓고 관하라고 하신 대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나 병고가 생겼을 때나, 평상시에는 평상시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향을 하면서 주인공의 나툼을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체험을 돌아보면, 어떤 어려운 일은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일은 믿고 관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이 일이 되었는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 해결이 되고 맙니다. 이렇듯 주인공의 나툼의 시간이 길고 짧은 연유는 무슨 까닭입니까?
▲스님: 그것은 댁의 마음이 큰 것은 큰 거라고 생각하고 작은 것은 작은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마음이라는 것은 빛보다 더 빨라서 가고 오는 게, 저 달나라에 간다 금성에 간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 요 방문 밖에 건너가는 거와 똑같이 맞먹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큰 것은 ‘아유, 이거는 정말 어렵겠어.’ 하고 그 밑에 찌끄럭지가 있는 겁니다. 그게 관습이죠. 그러니까 길죠. 그런 건 여러분의 마음들이 만들어서 그렇게 하는 거지 길고 짧은 게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살아서 정신세계 물질세계 양면을 다, 정맥 동맥이 거침없이 돌아가듯 이렇게 알아야 되는 거지요. 그래서 열반계에 이른다 하는 거지 아니, 내가 죽은 세상을 모르고 어떻게, 죽는다 산다의 교차로가 자꾸 돌아가는데 거기의 50%만 가지고서 어떻게 안 걸리겠어요? 그러니까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천차만별의 이치를 다 하나로 매기단하고 하나에다가, 하나에서 전부 나오는 거니까 하나에다 전부 놔라 이거예요. 놔도 놔도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는 도리니까 그렇게 하세요.
▲사회자: 스님, 이제 이것으로 마쳐야 되겠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경과됐습니다.
▲스님: 그럼, 고만 해도 됩니까? (합장하시며)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1993년 4월 24일 광주대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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