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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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부 37강 불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한국학중앙연구원
선거판에 나가야만 정치인가

어쩌다, 명동의 한 진보적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제는 유교였지요. 기독교에서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열어가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맛보기 사설부터 늘어놓자면, 주제는 신학이었습니다.

신에게 얼굴이 있을까
유교도, 놀라실지 모르겠는데, 신학의 일종입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태극(太極)이나 리(理)는 신에 해당합니다. 주자는 “리가 있어 천지가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천지를 붕어빵처럼 뒤집어 낸 것이 리라는 것인데, 리는 이를테면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고 있는 지배 절대자입니다. 여기서 리나 태극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맞먹는 위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신의 얼굴입니다. 기독교는 이 얼굴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비해, 유교는 천만에, 그 신은 얼굴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그 손의 주인은 사람형상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우리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기독교는 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교는 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이지요.
저도 신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주장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착각, 혹은 억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참, 불교처럼 모든 사람이 신성을 갖춘 여래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 말에 동그라미를 치겠습니다만…. 이 얘기는 다음 시간, <금강경> 5장에서 다시 떠들기로 하겠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기독교의 역할
이런 이야기를 교회 안에서 하고 있었으니, 세상은 변해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참, 불교는 세상의 창조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는 말은 미리 짚어두어야겠습니다. 불교는 이 세계의 고통과 윤회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느라, 이런 희론(戱論)에 대해서는 붓다 초기부터 무관심했고, 나아가 꺼리던 바였습니다. 어떤 궁금 많은 학생 하나가 “세상은 끝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시간은 무한하냐, 세상은 누가 만들었냐”를 물었을 때, 붓다는 예의 그 독화살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그 대답은 말하자면, “끼놈, 그렇게 한가한 세상이더냐. 너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급선무 아니냐.”는 것이었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로서는 세상의 창조에 대한 사유도 여기 지금의 삶을 기획하고 방향 잡는 실존적 선택에 크게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설이 길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정작 따로 있습니다. 강의 끝나고 질문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질문 끝에 앞에 앉은, 강단 있는 풍모의 노인 분 하나가 손을 들었습니다. 어조는 좀 격앙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사회변혁을 주도해온 것은 기독교였다.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이룩해 온 근본 공은 기독교에 돌려야 한다. 유교와 불교는 여기 아무것도 기여한 바 없는 형편없는….”
주최 측에서 마이크를 제어하려고 하는 것을 제가 오히려 말렸습니다. 계속하게 하시라고…. 그리고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유교와 불교는 크게 기여한 바 없습니다. 유교는 본래의 문화와 관습의 흔적들을 지키는데 급급해 보수적이었고, 불교는 개인적 관심에 치중하고, 또 다분히 기복적이라서 사회의 집단적 변화에 수동적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공적은 지울 수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운을 떼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20세기적 상황입니다. 문제는 21세기, 앞으로입니다. 권위와 저항의 대립 시대는 지났으니, 앞으로의 화두는 개인의 삶과 일상의 관계일 것입니다. 거대담론과 정치의 시대는 퇴조하고, 문화와 놀이가 봇물로 소통되고 소비되고 있습니다. 하여, 21세기는 유교와 불교의 시대입니다! 기독교 또한 이념과 당위의 도그마를 권위적으로 설파하는 역사신학보다, 개인의 영성과 각성에 주력하는 영성신학이 설득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혁명으로 여는 사회변화
시절 인연이란 것이 있습니다. 불교는 개인적이고 유교는 일상적입니다. 둘 다 거시적 사회 변화를 집단적으로 주도하는 데는 서투릅니다. 여기 이유도 있습니다. 둘 다 공히, ‘개인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어떤 행동도 오염과 타락을 피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듯이 불교는 개인의 자각을 이루어야 할 전부로 보고, 유교는 언필칭 말하듯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즉 개인의 인격과 덕성의 성취 없이는 가정의 평화에서, 사회 개혁까지가 도루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순진한 비사회과학적 발상이라고 매도당해왔으나, 21세기에는 그것이 진정 희망의 빛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불교를 배우고, 접하는 것이 결코 낡았거나,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21세기 첨단에 있는, 가장 새롭고 절실한 가르침입니다.
불교가 그동안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해 왔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 <우리는 선우>에서 ‘제가 만난 불교’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불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불교의 힘으로 홀로 핏덩이 4남매를 키웠고, 집을 팔아 나를 공부시켰습니다. 그보다 더한 사회적 책임이 어디 있습니까. 내 큰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친척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그 인고의 세월을 불교가 있어 견딜 수 있었고, 그리고, 만일 불교가 아니었다면 20년은 일찍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위대한 역할이 어디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크고 화려해 보이는 것이 꼭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축구도 그렇지만 삶에도 기본기가 필요합니다. 불교가 가르치는 것은 삶의 기술(ars vitae),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삶을 대하는 근본태도야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기본기 중의 기본기입니다. 그 성숙의 향기는 1차적 삶의 공간인 가족과 일상에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에서, 직업에서, 국가에서, 그리고 세계로 번져나가 ‘세계를 꽃 한 송이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일의 작고 큼에 따라 원리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수 장국 잘 담그는 손이 수제비도 잘 뜬다”고 했던가요. 만법귀일(萬法歸一), 변하는 것은 관계의 양상이고, 규모이지, 근본은 그 관계의 태도 하나로 귀착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정치판에 참가하지 않는 거요?” “집안이 화목하고, 이웃과 잘 사귀면 그게 정치지, 꼭 선거판에 나가야만 정치겠소?”
불교,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반성도 중요하고, 개선도 중요하지만, 기본은 ‘신뢰’와 ‘믿음’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알듯, 불교 자체에 대해서도 잘못된 점, 미흡한 점을 알고는 있어야하되, 너무 매도 분위기로 가서는 곤란합니다. 사찰의 운용이나 종단의 기획력, 불교의 사회적 발언권 등에 대해 아쉬운 점이 어디 한 둘 이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우리 마음과 태도 속에 살아있는 불교를 도타이 북돋는데 힘쓰면 좋겠습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잎이 무성하고 꽃이 화려한 법입니다. 그것이 돈교의 뜻입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구체적 관계 속의 불교에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주제넘었습니다.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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