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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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주의와 빈자일등/권경희(불교상담개발원 연구위원)
십수 년 전의 일이다. 텔레비전 대담 프로그램에 젊은 여성 변호사가 나왔다.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그 변호사가 불우한 환경에서도 성공한 사람이라며 추켜세웠다.
그러자 당사자인 변호사는 우려를 표했다. 자신의 경우가 개천에서 ‘용’ 난 모범 사례로 회자되면서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개천에 여전히 살고 있는 다른 불우한 이웃은 소외되거나 말거나, 한 술 더 떠서 같은 환경에서도 노력만 하면 저렇게 성공할 수 있는데 너희들은 뭐냐 하는 비판의 시각이 더해질 수도 있다는 걱정이었다.
요 며칠 미국 ‘수퍼볼 영웅’이라는 하인스 워드의 귀국으로 언론이 떠들썩하다. 온갖 행사가 벌어지고 명예 시민장을 주기도 하고 야단법석이 따로 없다. 혼혈인이라는 차별 때문에 타국에 가서 모진 고생하며 살다가 성공해서 돌아온 그에게 베푸는 환영으로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나기처럼 퍼부어대는 관심과 찬사를 보면서 십수 년 전 젊은 여성 변호사의 텔레비전 대담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민망하고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한국 사람은 쳐다보지 않고, 생각 안 하고 살아온 30년이었어. 내가 워드 데리고 한국에 왔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 놈 거지밖에 안 됐겠지? 여기선 누가 파출부라도 시켜줬을까?”
하인스 워드를 어려운 환경에서도 훌륭히 키워낸 어머니 김영희 씨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제 와서 우리 워드가 유명해지니 관심을 참 많이 가져 준다. 부담스럽다.”
바로 이것이었다. 하인스 워드에게 쏟아지는 찬사가 민망하고 송구스런 이유가. 그가 힘들게 자랄 때, 그가 성공을 위해 분투할 때 한국인으로서, 피를 나눈 같은 민족으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다면, 아니 그 같은 혼혈인이란 존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민망함이 덜 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성공한 그를 환영하기에는 염치가 없을 정도로 그동안 너무도 무관심했다.
언론과 방송의 호들갑을 보면서 하인스 워드의 성공이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혼혈인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이 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다.
혼혈인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부터, 우리사회가 늘 자랑스러워하던 혈통주의에 대한 공격은 물론, 급기야 혼혈인의 군입대 허용까지 말이 무성하지만 정작 하인스 워드가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정말 우리사회가 얼마나 변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인스 워드의 귀국 환영 세례를 보면서 여성 변호사의 우려가 재현되고 있지는 않나 걱정스럽다. 성공한 ‘용’에게 화려한 조명을 비추는 데만 급급하고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불우한 혼혈인은 한쪽으로 제쳐두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하인스 워드의 성공을 계기로 우리도 이젠 우리 민족만 감싸 돌고 사는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려 함께 살아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혼혈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도 버리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마음을 길렀으면 좋겠다. 그래야 ‘한국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살았던’ 하인스 워드 모자가 아픈 세월을 이겨내 이룩한 성공이 더욱 의미 있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부처님께서는 화려하게 치장한 등불보다 가난한 노파의 작은 등불에 담긴 정성을 보셨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을 소중히 여겼던 부처님의 그 자상한 마음이 그리운 오늘이다.
200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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