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 망념·습기 싹 쓸어 없애기
범부들의 보시는 상(相)을 떠나지 않는다. 유상보시(有相布施). 그들은 “다만 신상(身相)의 단엄(端嚴)과 오욕(五欲)의 쾌락(快樂)만을 구한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체면과 위세, 그리고 감각적 쾌락 등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준다. 이런 보시는, 혜능의 말마따나 “과보(果報)가 다하고 나면, 다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진다.”
보살들은 이와는 달리 자기만족에서가 아니라 진정 사람들의 필요와 복지를 위해 손을 내민다. “그것을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라고 한다.”
혜능은 “여(如)에 응(應)한 무상심보시(無相心布施)”를 말한다. 이는 “‘능히 베푼다는 마음’이 없고, ‘베풀어지는 물건’도 보지 않으며, ‘베품을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이다.” 이를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여(如)에 응(應)한다’란 바로 앞의 ‘이렇게(如是)’와 마찬가지로, 주는 손과 받는 손, 주는 물건을 분별하지 않은 빈 마음(空)의 풍경을 가리킨다.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왜냐. “보살의 베푸는 마음에 아무 기대(所希)하는 바가 없기에, 그 얻은 바 복덕이 시방 허공처럼 계산 측량할 수 없다.”
보시(布施)에 대한 혜능의 새로운 해석
혜능의 구결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원문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일상과 체험의 방식으로’ 해석의 지평을 열어나가는데 있다. 그의 기지는 ‘보시’의 해석에서도 빛난다. 그에게서 보시는 ‘남에게 주는 외향적 활동’이라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수련하는 방법’으로 재해석되었다. 통째로 번역해본다.
“일설에 의하면, 보시의 보(布)란 보(普), 즉 ‘널리’라는 뜻이고, 시(施)는 산(散), 즉 ‘흩는다’는 뜻이다. 가슴 속의 망념을 싹 쓸어 없애고, 습기와 번뇌와 사상(四相)이 완전히 끊겨, 적체(積滯)된 것이 없는 것, 이것이 참 보시이다. 또 이런 설도 있다. 보(布)란 보(普), 즉 ‘널리’라는 뜻이고 (*여기서 한 구절이 망실된 듯하다. 뒷 문장으로 보건대 “시(施)란, 귀(歸), 즉 ‘돌아간다’거나, 혹은 복(復), 즉 ‘회복한다’라는 뜻이다”가 들어 있어야 한다.) 육진경계(六塵境界)에 머물지 않고, 또 유루분별(有漏分別)도 없는 것을 말한다.
“오직 늘 청정(淸淨)으로 돌아가 있고, 만법(萬法)의 공적(空寂)함을 각성한다. 만약 이 취지를 모르면, 다만 제업(諸業)을 증장(增長)할 뿐이다. 그래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貪愛)를 제거하고, 밖으로 보시를 행할지니, 안팎이 이렇게 상응해야 얻는 복이 무량하다. 다른 사람이 악(惡)을 저지를 때도 그 허물을 보지 않고, 자성(自性)에 분별(分別)을 내지 않는 것, 이것이 ‘상(相)을 떠났다’는 뜻이다. 가르침에 따라 수행(修行)함에, 마음에 나와 그 대상이라는 구분(能所)이 없으면 곧 선법(善法)이다. 수행인에 능소(能所)가 있으면 선법이 아니다. 능소의 마음이 멸하지 않으면 결코 해탈을 얻을 수 없다.”
“념념(念念)이 언제나 반야지(般若智)를 행하면, 그 복(福)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다. 여시(如是)에 따라 수행하면, 일체 인천(人天)을 감복시켜 공경 공양케 하리니, 이를 일러 복덕(福德)이라 한다. 늘 부주상보시를 행하고, 일체 생명(含生)을 널리 경배하면, 그 공덕이 가이 없고, 헤아릴 수 없다.”
무주상보시와 동서남북과의 관계
동서남북 사유상하의 우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광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인위적 구분(分別)을 위한 표지도 허여하지 않는다. 혜능은 바로 이 두 가지 특성이 불성(佛性)의 직접적 표현인 무주상보시와 닮았다고 말한다. 혜능의 말을 들어본다.
“부처는 허공(虛空)이 가(邊際)이 없고, 사량(思度)할 수 없다고 햇다. 보살이 무주상보시로 얻은 공덕도 또한 허공과 같아 잴(度量) 수 없고, 가이 없다. 세계(世界) 중 큰 것이 허공보다 더한 것이 없고, 일체의 성(性) 가운데 큰 것이 불성(佛性)만한 것이 없다. 왜 그러냐. 무릇 형상(形相)이 있는 것은 ‘크다’는 이름을 얻을 수 없다. 허공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크다는 이름을 얻었다. 일체의 여러 성(性)은 모두 한량(限量)이 있기 때문에 크다는 이름을 얻을 수 없다. 불성은 한량이 없기 때문에 크다고 이름 한다.”
“이 허공 안에는 동서남북이 없다. 만일 동서남북을 본다면, 이는 또한 주상(住相)이라, 해탈(解脫)을 얻을 수 없다. 불성(佛性)에도 본래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가 없다. 만일 이 사상(四相)이 있어 그것을 보인다면, 그것은 중생(衆生)의 상(相)이지 불성(佛性)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이는 역시 주상보시(住相布施)이다.”
“비록 망심(妄心) 가운데 동서남북이 있다고 말한다 해도, 리(理)에 있어서는 그런 게 어디 있는가. 그래서들, ‘동서는 진짜가 아니고, 남북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한다.”
“자성(自性)은 본래 공적(空寂)하고, 혼융(混融)하여 무분별(無分別)이다. 그런 까닭에 여래(如來)가 분별을 내지 않는 것을 깊이 찬탄한 것이다.”
췌언 혹은 사족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한량(限量), 즉 조건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우리의 삶이 낡았다고 느끼고, 자신이 처한 조건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들은 해탈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불순한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수업보다 게임에 몰두하고 엠피쓰리와 핸드폰에 열광하는 아이들뿐만 아니다. 공상 과학 소설도 그렇고, 개그콘서트도 그렇고, 퇴근 후 회사와 상사를 욕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방에서 악을 쓰는 것들, 그리고 어느 날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 또한, 우리가 딛고 선 ‘토대’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우리는 한편 토대를 더 강화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토대를 떠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앉았다가는 다시 일어선다. 우리네 인생은 이 사이클을 반복하다가 어느 날, 이름도 없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한심하고 남루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윤회(輪回)의 쳇바퀴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방법이 없을까. 붓다는 거기 길을 하나 제시한다. “네 삶의 일상을 토대(住相) 없이 살아보는 훈련을 해 보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붓다는 예수의 말을 인용해 줄 것이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지 않는다. 너는 그 짐승들보다 나은 생명이 아니냐.”
이 말에도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예외적 영웅들만의 삶이라고 여기고, 직접 살기를 포기하고 만다. 그 부끄러움을 저 밖의 영웅들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도배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처럼 평범한 인생도 ‘토대 없이’ 살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렇게 살고 있다. 예를 들면, 부모를 모시거나 정기적으로 용돈을 보내드리는 것도 그런 사례이다. 키움 받은 것에 대한 최소한도의 보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보답에 무슨 법적 제도적 강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속된 말로 입 닦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입 닦는 사람도 적지 않은 세상이긴 하지만….
그리고 보니, 아이를 키우는 것도 “출세한 다음 갚아라” 라거나, “이웃집 아이에 비해 못났다는 소릴 듣지 않겠다“는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모가 자식들로 하여금 건전한 사회인으로 자신의 인생을 꾸려 가도록, ‘조건 없는 지원’을 베풀고 있는 셈이 아닌가. 만일, 그렇지 않고 ‘기대하는바’가 있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은 욕심이고, 그 결과는 자식은 물론, 부모까지 황폐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무주상보시를 늘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