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案, 수행자들이 따라야 할 법
깨달음 방편·공부 점검 등 의미
화두를 참구할 때는 오로지 한 생각으로 화두만을 참구해야 한다. 화두를 챙길 때는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말’을 참구하는 것으로써 생사의 몸을 벗어날 수 있는 살 길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과 어깨를 견주면서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것이요, 죽은 말에서 깨쳤다고 착각하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할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 있는 말’을 참구해야 할까? <선가귀감> 13장에서 그 방법을 말한다.
凡本參公案上 切心做工夫 如鷄抱卵 如猫捕鼠
如飢思食 如渴思水 如兒憶母 必有透徹之期
본디 공안을 참구하는 자리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잡듯
굶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어린아이가 엄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확실하게 깨칠 때를 맞게 된다.
공안(公案)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공안은 관청에서 시비를 판결하는 공문서라는 의미이니 요즘말로는 모든 국민들이 이의없이 따라야 할 ‘나라법’이다. 이 뜻을 빌려 선종에서는 역대 고승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가져다 참선하는 사람들이 이의없이 따라야 할 지침으로 삼은 것을 공안이라고 했다. 이런 종류 기록들은 한결같이 정부에서 정식으로 포고하는 법령과 같아서 그 권위가 준엄하여 침범할 수 없다. 오로지 수행하는 사람들이 늘 따르고 의지해야 할 법으로서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뿐이다.
이런 풍습은 당대(唐代)에 제기되고 송(宋)나라 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일천칠백 공안이라고도 하는데, 천칠백이라는 숫자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실려있는 일천칠백 명이 법을 전해받게 되는 특별한 인연이 된, 그들의 전법(傳法) 기연(機緣)의 숫자에서 왔다. 그러나 공안이 정확히 일천칠백 개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통상 쓰이는 것은 약 오백 개이고 그 나머지 것들은 중복돼 쓰이거나 참구할 가치가 적다고 한다. 선종에서 처음에는 개인에 관한 어록이 있을 뿐이었지만 뒷날 어록에 관한 책들이 많아지고 마침내 그 어록들을 편집하여 공안에 관한 책들이 완성되었다. 그 결과 <벽암록> <종용록> <무문관> <정법안장> <경덕전등록>과 <인천안목> <지월록> <속지월록> 같은 책들이 만들어졌다.
공안 가운데 대다수는 ‘한 자’ 또는 ‘한 마디’로써 학인 참구용으로 제공되었는데 이것을 ‘화두(話頭)’라고 한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무(無)”라고 대답할 때, 이 ‘무(無)’ 자가 곧 화두이다. 그러므로 공안은 화두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참선할 때 화두를 붙잡고 공부하면 화두를 참구한다고 한다. 또한 화두를 조사스님들이 학인들에게 언어로 보여주는 공안을 ‘화두공안’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공안은 어떤 내용을 짜 맞추어 추리하거나 일반 상식을 가지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언어들은 대개 선가의 정신으로서 말의 논리나 논리적 사고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큰스님들은 매번 공안에 있는 이런 특성을 가지고 학인들의 분별 의식 밖에 있는 심층을 바로 깨닫도록 촉발시켜 그들의 참성품을 직접 보게 한다.
공안이 갖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화두는 깨달음을 가져오는 방편이 된다. 둘째, 화두는 학인의 공부를 점검하는 방법이 된다. 셋째, 학인이 믿고 따를 수 있게 하는 권위의 잣대가 된다. 넷째, 큰스님이 학인의 공부를 인가해 주는 믿음의 증표가 된다. 다섯째, 수행자가 마침내 깨달아야 할 깨달음을 제시한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조사의 공안은 일천칠백 개나 된다. ‘개에게는 부처님 성품이 없다(狗子無佛性)’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 서 근(麻三斤)’ ‘마른 똥 막대기(乾屎木厥)’와 같은 것들이다. 닭이 알을 품어 따뜻한 온기를 끊임없이 지속시킨다는 것은 ‘끊임없이 화두를 챙겨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 한다는 것은 ‘마음먹은 목표가 흔들리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굶주린 이가 밥을 생각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며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 한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다 간절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간절히 화두를 참구하라는 것이다. 억지로 만든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니, 참선에서 이 간절한 마음이 없이 ‘확실하게 깨쳤다’는 것은 옳지 않은 소리이다.”
어떤 스님이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조주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였고, <벽암록> 12칙에서 어떤 스님이 동산에게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라고 물으니, 동산 스님은 “삼 서 근”이라고 하였으며, <무문관> 21칙에서 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님입니까?”라고 물으니, 운문 스님은 “마른 똥 막대기”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