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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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부 35강 보살의 토대 없는 보시의 복덕/한국학중앙연구원
허공을 재는 두레박

-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布施)”: 이 말은 “보시를 행한다”가 아니라 “보시에서 행한다”는 뜻이 된다. 구마라습이 이렇게 문장을 부자연스럽게 고친 이유는,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보살의 보시가 ‘목적과 대상을 의식하지 않는 순수 행동’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닐까.

토대 없는 보시
- “색성향미촉법의 토대가 없는 보시(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형체, 소리, 냄새, 맛, 촉각, 그리고 의식은 한 인격이 토대를 구성하는 자료들이다. 이들 여섯 대상이 자극을 주면, 신체는 이 자극을 향해 감정적 의지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패턴화 되면서 견해(見解)라 부르는 편견(?)이 형성된다. 성격, 혹은 인격은 이 과정을 통한 강화의 결과이다. 다시, 성격은 외계에 대한 자극을 선택하고, 거기 반응하는 양상을 결정한다. 각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지각된 형체와 소리, 냄새, 접촉 등은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법이 없다. 언제나 마음속에 흔적을 새기고, 찌꺼기를 남긴다. (이것이 업의 단초이다.) 흔적과 찌꺼기는 이들 지각에 대한 ‘마음’의 호오(好惡), 증애(愛憎), 취사(取捨)로 나타난다. 이 반응은 생명의 유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작용이지만, 그러나, 이 활동이 ‘너무 멀리 나감으로써,’ 그 무절제와 방만이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면, 형태와 소리는 마음의 고요와 안정을 다치고, 사무의 공정성을 잃기 쉽다. 그 형태와 소리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일 때는 더 없이 위태롭다.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업의 대부분은 ‘사람과 더불어’ 생기는 것이기에….
정치인들을 보라. 안타까운 것이 어디 한 둘 이랴만, 그 중 큰 것이 사적 감정과 원한에 너무 집착한다는 점이다. 자신과는 당을 달리하는 ‘꼴(色)’ 보기 싫은 사람이라고 해서, 한때 그를 비난하는 ‘소리(聲)’를 냈다고 해서, 그 사람과 개인적으로 친한 ‘인연(觸)’이 없다고 해서, 상대방을 ‘손보는데’ 정력을 쏟고 자기편을 감싸느라 급급하다.
참, 여섯 가운데 마지막에 있는 법(法)에 대해서 짚어두어야겠다. 법은 다양한 뜻을 갖고 있는데, 가령, ‘진리’, ‘가르침’, ‘세상의 참모습’ 등이고, 이들 의미는 서로 얽혀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법은 마음(心)이라는 ‘감각기관(?)’과 짝해 있는 심리적 상관물, 쉽게 말하자면, 마음속에 오가는 온갖 상념들을 가리킨다. 불교는 이들의 유용한 측면보다는 부정적 측면에 더 유의한다. 그래서 <금강경>은 이들 ‘마음의 원숭이(心猿)’들을 제어하고 항복받는데 큰 힘을 들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공(空)의 축복
마음을 항복받을 때, 우리는 실제와 만나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습성화된 자동화된 반응, 세속화된 관심 속에서는 망각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늘 거기 있었으나,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 그것이 불성(佛性)이라 불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의 미소, 쌀과 공기와 구름, 나를 존재케 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 등이다. 이 각성과 더불어 우리는 사물을 전혀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처음 1) 우리의 욕망과 그 ‘대상’물이었던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세계는, 2) 사물이 서로 서로 관계하고 있는 의타기(依他起)의 세계로 이동한다. 이것은 ‘시선의 혁명적 전향’이다. 그것은 욕망과 그 충족의 전망에서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유희와 소요의 시선이다. 그로써 돼지의 눈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과 ‘만나는’ 자기 혁명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는 전혀 다르게 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기 마음의 우상을, 토대를, 즉 상(相)을 깨트림으로써 얻은 것들이다.

그 축복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비유할 수 없다
- 그 “보살의 토대 없는 보시 복덕은 이 우주공간처럼 측량할 수 없다(菩薩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남에게 무엇을 주고 베풀 때, 위신이나 동정심, 그리고 돌아올 보상 등등의 ‘토대’를 가지면, 그 공적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받는 사람도 우선 고마워는 하겠지만, 그다지 감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욕감을 느끼고 호의를 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받기보다 주기가 어렵다! 나는 가급적 누가 무엇을 준다 하면, 긴장한다. 아니 받아도 될 양이면, 정중하게 사양하고, 그게 지나친 결벽으로 오해되겠다 싶으면 받는다. 조금 주고 많이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주고받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연예인 하나가 떴다 하면, ‘키워주었노라’는 사람이 10여명이나 나서니, 그저 실소할 뿐이다. 권력 있다 싶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잘 안다는 사람, 친구처럼 막역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인사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현실적으로 자기만족의 흔적 없이, 또 돌아올 보상의 기대 없이 베풀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은 ‘위대한 실천’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룩한 공적은 양으로 계산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질적 전회이기에, 우주를 뒤바꾸어 놓는다.
가령, 바쁜 걸음을 멈추고, 남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일. 그런 친절은 아무런 물질적 보상이 없어도, 그 사람의 수고를 덜어준 뿌듯함과 그 사람이 안도하는 모습을 기뻐하는 마음에서 온다. 그것을 불성이라 한다. 사람 속에는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놀부 심보도 있지만, 남의 기쁨을 즐거워해주는 착한 마음도 함께 있다. 악한 마음을 조복(調伏)시키고, 착한 마음을 호념(護念)해 나가는 작은 걸음이 더 큰 걸음으로 이어지고, 그 힘이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 작은 발걸음을 보듬고 키워 나가기는 어렵다. 우리는 무시이래로 아상(我相)을 축으로 세계를 읽고, 사람들 대하며, 일을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 무지와 환상을 반성하고, 그 힘을 역전시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해 나가자고 마음먹기는 정말 어렵다. 이것이 발심(發心), 즉 “보리심을 발하기”이다.

초발심, 삶의 물길을 바꾸다
이 자신 속의 잠재력을 격발시키자면 때로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삶의 루틴이 급격하게 변화하거나, 남다른 고통을 겪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거나, 혹은 직접 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런 전환의 기회가 더 많다. 원효도 “생사(生死)를 한번 겪어보아야” 불도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무한정 있을 것 같았던 시간이 실은 없다는 것의 자각이 우리가 안전하게 여겼던 삶의 토대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때 그는 거기 새로운 토대를, 토대 아닌 토대를 건설해야할 실존적 필요에 직면한다.
그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삶이 찰나이고, 대문 밖이 저승임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은 이미 이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남을 향해 의미의 시선을 던지게 된다. 여기가 초발심(初發心)이다!
초발심이 선다면, 이미 위대한 깨달음의 절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금강경> 제 9장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에는 아라한의 네 가지 계위가 나온다. 처음이 수다원으로 입류(入流), 즉 “흐름에 들어섰다”의 경지이다. 삶의 물길이 바뀌면, 이미 일은 거지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마음 하나” 바꾸면 삼계가 함께 춤을 추고 노래한다. 여래들이 둘러써서 축복하고, 일체의 인천아수라가 그를 돌며 공양을 올린다.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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