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철이 단단할수록 이완시간 짧아
깨달은 자, 외부자극에 흔들리는 시간 “0”
한 스님이 제자와 함께 생선가게를 지나가게 됐다. 스님은 생선이 맛이 있겠다고 말했다. 절로 돌아온 후, 실망한 제자가 스승에게 도를 닦았다는 스님이 어떻게 생선을 보고 마음을 뺏길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스님은 ‘나는 벌써 잊어버렸는데, 너는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가’라며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 초기 상응부 경전에는 부처님은 두 번 화살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에게도 화가 나는 일이 있지만, 화에 다시 집착해서 남에게 화를 옮긴다든가, 혹은 화를 더 크게 확대시키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이 두 이야기에서 집착하지 않는 깨달음의 편린을 느낄 수 있다.
실제 생활에서 큰 괴로움은 첫 화살 자체보다, 이 화살에 의해서 일어나는 집착의 결과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이웃이 나에게 섭섭한 말을 했을 때, 실제로는 그 말 자체보다도 ‘왜 그 말을 했을까. 내가 그렇게 잘 해주었는데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라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집착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
과학과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이완 시간(relaxation time)’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힘이 외부에서 가해 졌을 때, 어떤 물체가 변형을 일으킨 후 얼마나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는가를 나타내는 시간이다. 예를 들어서 용수철을 당긴 후, 놓으면 변형을 일으킨 용수철이 출렁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시간이 걸린다. 이 이완 시간은 용수철의 물성에 의해 좌우된다. 용수철이 단단할수록 이완시간이 짧다.
이렇게 간단해 보이는 사건이 실제로는 삼라만상에서 항상 일어난다. 이완시간은 물질의 성질을 추측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형광등을 끄고 나서 한동안 형광등이 약한 빛을 발하는 것 또한 형광등 표면에 칠해진 형광물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완 시간이 짧을수록 좋은 형광등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예로, 반도체 회로를 들 수 있다. 반도체 회로에 전압을 가하면 트랜지스터의 전자가 힘을 받아서 속도를 내게 되는데, 이를 외부에서 전류로 이용한다. 전압을 껐을 때, 다시 속도가 0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짧을수록, 다시 다른 전압을 신호로 가해줄 수 있으므로 빠른 회로가 된다.
우리의 감정 또한 감각을 받아들이는 신경신호에서 끊임없이 만들어 진다. 같은 사물에 대해서 반응하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른데, 이는 반응하는 방법을 저장하고 있는 유전자인 DNA 서열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유전자가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후천적인 노력이나 습관에 의해서 달라진다고 한다. 외부의 자극이 왔을 때, 이러한 감정이 지속하는 시간(이완시간)이 신경의 어떤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알 수 없다.
깨달은 자의 이완시간은 어떨까 상상해본다. 매 순간 깨어있는 그들의 삶에서 이완시간은 ‘0’이라 해야할까. 아니, 이완시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 깨달은 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