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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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부 34강 <금강경> 제 4장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한국학중앙연구원
삼륜청정, 세상에 공짜도 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란 제목은 “완전한 행동은 토대가 없이 행해진다”는 뜻이다. 보살은 자신을 비우고, 남을 향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늘 주고 베푸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거나, 자기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곤란하지 않을까. 그런 불순한 보시로 얻는 복덕은 제한적이거나 해롭다. 지금 붓다는 ‘자아와 그 투사에 토대를 두지 않는 보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하고 있다.
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應 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 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須菩提, 菩薩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但應如所敎住.
언해
“또 버거(*다음) 수보리야! 보살이 法에 반드시 住한 곳 없이 하여 보시를 행할지니, 이른바 색(色)에 주(住)치 아니한 보시와,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주(住)치 아니한 보시니. 수보리야! 보살이 반드시 이같이 보시하고, 상(相)에 주(住)치 아니할지니. 어찌어뇨? 만약 보살이 상에 주치 아니하고 보시하면, 그 복덕이 사량(思量)하지(*헤아리지) 못하리라. 수보리야! 뜻에 어떠뇨? 동방 허공을 어루(*가히) 사량하랴 못 하랴?” “아니이다, 세존하!” “수보리야! 남서북방(南西北方)과 사유상하(四維上下) 허공을 어루 사량하랴 못 하랴?” “아니이다, 세존하!” “수보리야! 보살의 주상(住相)없는 보시ㅅ복덕도 또 이 같아서 사량 못 하리니. 수보리야! 보살은 오직 가르침같이 주(住)할지니라.”
번역
“또 그리고 수보리야! 보살은, 어느 경우이든 반드시 ‘토대(住)’가 없이 보시를 행할 것이다. 이를테면, 형체에 토대를 두지 않은 보시와, 소리, 냄새, 맛, 접촉, 관념에 토대를 두지 않는 보시가 그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이렇게 보시해야지, ‘자아와 그 투사’에 토대를 두어서는 아니 된다. 왜 그러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자아와 그 투사에 토대를 두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헤일 수 없이 무한할 것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럼 동서남북과 그 사이 사방, 그리고 상하의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토대 없는 보시를 통해 얻는 복덕도 이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단지 이 가르침에 따라 마음을 유지해야한다.”
무주(無住), 토대가 없는 보시
‘마음의 토대(住)’란 대체 무엇인가. 예를 하나 들어본다. <프리티 우먼>이란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줄리아 로버츠는 길거리 여인의 통상 복장으로 고급 의상실을 들렀다가 차가운 시선을 뒤로 하고 물러나야 했다. 의상실의 점원으로서야 당연하다. 누가 물건을 살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를 한 눈에 파악하지 않고서야 좋은 점원이 되기는 어렵다. 바로 이 목적, 혹은 동기, 즉 ‘물건을 많이 팔아 이문을 남기겠다는 것’이, 점원이 사람을 판단하고 대접하는 토대가 된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이다. 거꾸로 다른 사람의 행동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 근저에 있는 토대를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무슨 의도로 이렇게 행동하는가.”
마찬가지로 남에게 자신의 재화나 용역을 제공할 때, 우리는 그 서비스로 하여 돌아올 보답이나 반대급부를 예상한다.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착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계산이 거의 자동적으로 작동해서, 그것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네 삶은 그 토대 위의 상호 교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에 공짜 없다
예를 들면, 우리네 일상의 교제가 ‘직업’과 사업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도 그렇다. 초등학교 동창들이나, 또 한때 친했던 사람들도 직접 ‘일’에 관련되지 않으면 조금씩 멀어진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대가족의 해체도, 그것이 보장하고 있던 이해관계의 끈이 점차 유명무실해져가고 있기 때문이라면 지나칠까.
어머님은 언제나 “세상에 공짜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입은 거지가 얻어먹는다”고도 하셨다. 옛날에 한 선비가 있었다. 고을의 원이 선비들을 대접한다기에 남루한 행색으로 나섰다가 문전 박대를 당했다. 그는 돌아와 쫘악 빼 입고 다시 갔더니 한상 거나하게 차려주었다. 그러자 선비는 술과 음식을 먹지 않고, 옷에다 들이부었다고 한다. 입성이 번듯해야 대접받는다. 입구에 선 자는 행색이 분명한 사람을 대접해야 나중에 무슨 혜택이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계산 없이 주고받는 일은…역시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태도가 보다 고차원의 전략(?)일수도 있다. 이익을 빠듯하게 계산하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전략이 아니라는 것을 삶에서 자주 경험한다. 비상한 이득은 눈앞의 이해득실을 고려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도움을 주거나, 친절을 베풀었을 때 온다. 또한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이익에 너무 이기적으로 집착하지 않는 사람을 더 신뢰하고 믿는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들, 상사에게 대하는 바와 부하에게 대하는 바가 너무 달라 두 얼굴을 갖고 있는 사람은 따돌리기 마련이다. 계산은 좀 멀리 보고, 장기적으로 해야 하는데, 조급할수록 복을 까먹기 쉽다. “장사는 긴 목”이라지 않던가.
보살의 삼륜청정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공덕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보살에 한 걸음 더 나간 사람이다. 사회의 미덕은 이런 사람들의 훈훈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학창시절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학자금을 지원받은 사람이 나중에 직장을 갖게 되거나, 사업을 운영하게 되면 그 은혜를 자신도 모르는 어느 어려운 학생을 위해 베푼다. 보시는 그래서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이 다른 것이 아름답다.’ 법정 스님은 언젠가 산 속의 토굴 생활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겨울 한 철 나려고 들어가 보면, 쌀독에 쌀이 그득한 것이다. 그는 염치없이 그것을 공양한 다음, 날이 풀려 내려올 때, 그 쌀독을 다시 채워 놓고 내려온다고 했다.
생각해보라. 우리의 주고받음은 엄격하게 경계 지을 수 없다. 작은 도움들, 협력들, 배려들은 계산할 수 없고,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 가령 하늘과 땅 등이 가장 크게 간여한다. 또 그것을 따지지 않는 문명일수록 사람 사이에 정이 있다. 가령 반찬마다 값을 매기고, ‘하나 더’를 용인하지 않는 일본식보다, 밑반찬은 얼마든지 리필이 가능하고, 또 그것을 흐뭇해하는 한국식이 더 정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국수주의적 자화자찬일까.
위의 경우는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계산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보살의 보시는 조건 없는 베풂이다. 그것은 돌아올 반대급부를 의식하지 않는 진정 순수한 활동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베푸는지를 모른다.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갚을 사람을 장부에 적어놓기 위한 것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살피는 것은 외상에 올릴 액수를 기입하는 일이니까…. 누구에게 주는지, 그리고 무엇을 주는지 모른다면, 대체 ‘누가’ 주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않는다. 그 삼륜청정(三輪淸淨)의 순수한 행동으로, 보디사바하, 무아(無我)가 완성된다.
200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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