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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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만권거사/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겨자씨속에 수미산을 넣는다’니 무슨뜻인지?
“만권 책의 지식이 어디에 들었나” 묻자 “아~”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고 했다. 다섯수레 정도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서로 대화할만한 상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의 어원은 장자(莊子)가 친구 혜시(惠施)가 가진 책의 분량을 오거(五車)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두 사람의 수준있는 대화는 제자백가서 여기저기에 언뜻언뜻 보인다.
오거(五車)는 만권(萬卷)과 같은 말일 것이다. 만권은 많은 책을 말한다. 그래서 책 좀 있다는 서재는 흔히 만권당(萬卷堂)으로 불리었다.
대구 비슬산 어귀에 있는 남평문씨 세가(世家)에도 ‘만권당’이 전해온다. 물론 현재의 ‘인수문고’ 전신이다. 원래 인홍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폐사지다. 절집기록에 의하면 고려말의 일연선사가 11년동안 머물면서 삼국유사 역대연표를 정리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책하고 인연이 많은 터인 것 같다.
얼마 전 현대불교신문사내에 ‘종성문고’가 개원되었다. ‘사자굴 속에서 만권 책을 벗 삼았다’는 종성화상(2004년 열반, 백양사 서옹선사의 제자)의 개인도서 만 오천권 기증에 따른 것이다.
당나라 때 강주(江州:江西 九江)땅의 행정책임자인 자사(刺史)벼슬을 한 이발(李渤:773~831)은 별명이 ‘만권(萬卷)거사’였다. 만권은 현 시대에도 적은 양이 아닌데 그 당시로 말한다면 문자로 된 모든 자료를 섭렵한 대석학 즉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의미였다.
이런 그는 박학다식함과 함께 수행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당지장(마조의 수제자이면서 신라 최초로 선문을 연 도의국사의 스승)선사의 비문을 직접 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당선사 입멸이후에 ‘대각(大覺)’이라는 시호를 내리도록 황제에게 아뢴 인물이기도 하다. 신심으로 당시 선종의 외호단월로서의 의무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마조도일의 제자인 귀종지상(歸宗智常)를 자주 찾아 뵙고 법을 물었다.
하루는 경전을 열람하다가 ‘수미입개자(須彌入芥子)’ 라는 말에 막혀 귀종선사를 찾아갔다.
“경전에 ‘수미산을 겨자씨속에 넣는다’고 했는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큰 수미산을 저렇게 작은 겨자씨 속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했다. 한 티끌이 시방세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나라 때〈서유기〉의 손오공은 유사시에 자기 머리털을 뽑아 입으로 불어 수많은 원숭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요즈음은 한 개의 세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모든 유전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닌 것 같은데 그 때는 책 만권을 섭렵한 사람도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구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질문을 받은 귀종선사가 물었다.
“사람들은 그대가 책만권의 내용을 소화시켰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으쓱! 저도 한 문자 합니다. 큭큭, 드디어 걸려들었군)”
“그럼 자사는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길이를 합해도 야자(椰子)만한데 그 만권 책의 지식이 모두 어디에 들어가 있습니까?”
“?????”
만권이라는 그 어마어마한 분량의 내용이 어떻게 그 조그마한 머릿속에 다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역설적 물음에 번쩍 ‘아!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선종은 구질구질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한마디로 끝낸다. 선문답은 촌철살인(寸鐵殺人) 그 자체이다.
200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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