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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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살리기와 죽이기/김규칠(언론인)
보도에 의하면, 얼마 전에 서울 강남의 기독교계 모 대학에서 ‘종교간 벽 허물기’와 ‘이웃종교 이해하기’의 취지로 강의 해오던 이 모 교수가 방송 프로그램제작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방송관계자들과 불교계 사찰을 함께 방문하는 기회에, 남의 집 예방시 그 집 주인이나 집안 어른에 대해 인사하는 것처럼 예의로서 본존불에 경의를 표한 것을 이유로 삼아 이번에 교수재임용을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을 어떤 학교와 한 사람의 교수에 관한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수 있을지 모르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학교 방침의 잘잘못을 가리거나 어떤 교수를 두둔하고 안하고의 차원을 떠나 그냥 넘길 수만은 없다.
학교는 학교대로 방침과 기준이 있을 것이고 해당 교수는 교수대로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또 표면적인 구실과 내면적인 이유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차원에서 이 일에 참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사고경향이 횡행하는 세태의 하나로서 이번 사례가 인식될 소지가 없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독선과 아집이 지구촌을 갈가리 찢어 놓으려 하는 정세에 돌입해 있다. 겉으로 드러낸 문명과 종교와 신념의 충돌이라는 이름 하에 실은 속에 감춘 이익과 교만과 지배욕이 송곳처럼 튀어 나와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며 세계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크고 작은 여러 사회세력들의 입은 민주와 관용과 평화공존을 주장하면서도 내심은 나와 내 편이 살아남아야 하고 이겨야 하고, 나와 내 편의 생각과 이익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집착으로 꽉 차 있다. 남을 향해서는 이해와 관용을 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자기의 아집과 이익과 핏대는 조금도 완화시킬 마음이 없는 것이 그들, 관념과 허위의식의 노예들이다.
지금 지구 마을 곳곳에서는 이중 잣대, 자기기만과 타자기망을 일삼으며, 표방하는 관념을 팔아 이익을 챙기는 관념의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대중을 사로잡고 있지나 않은가, 아니 대중 스스로도 자기들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 올 피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한데 어울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 나라의 안팎을 불문하고 관념적 종교와 문명의 실상이 아닌가 한번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진실한 종교인들의 진지하고 순수한 믿음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력과 조직과 이해관계의 타산으로 닳고 닳은 무리들이 관념적 종교와 문명의 탈을 쓰고 실제로는 야만의 행세를 하고 있는 점은 없는 가 자문도 하고 타문도 해보자는 말이다.
이른 바 계몽의 시대가 새벽을 열기 직전에 독일의 극작가 ‘레싱’은 “진리는 소유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색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릇 인간이 표상하고 표현하는 진리란 아무리 고상하고 성스러워도 조건적 세계의 형상과 언어와 형식을 통할 수밖에 없는 한, 거기에 집착하거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 그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면서 겸허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어설픈 반(半)계몽사상의 시대가 아니라 이미 이천오백년도 더 전에,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진정한 ‘온’ 계몽의 사상이 이 세상에 출현하였건만, 아직도 크고 작은 세력들의 세상에서는 그 진의가 요익중생의 실천 차원에 까지 이르지 못하고 관념의 유희 차원에 머물고 있다. 이제는 정말 관용과 중도의 종교인 불교가 앞장서서 실천 차원의 ‘참다운 계몽의 새 시대’를 열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도들 끼리, 우리들 자신부터 ‘서로 다름’에 너그럽고 부드러워야 할 것이다. 단,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겉으로만 부드러울 것이 아니라, 안으로 진정 그 속내가 부드러워야 할 것이다.
위 예의 해당 교수가 참여한 방송사의 프로그램 제목은 ‘똘레랑스(관용, 이해의 여지)’였다. 마침 그 프로그램의 취지가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었다고 한다. 만일 이러한 취지에 대한 이해가 수박 겉핥기식이거나 일회용으로 그치고 말 그런 것이 아니라면, ‘종교 간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란 어떤 것이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관용인가’에 관해서도 차제에 불교가 앞장서서 사회통념상 동의할 수 있는 공감대 비슷한 것을 한번 이룰 수 있도록 종교간 논의를 제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 까 한다.
200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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