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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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깊어지면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아
오직 자기 주장자에서만 그냥 생활하세요!

새롭게 발심을 하려면…


불교에 입문한 지 5년정도 됩니다. 한때는 꽤 열심히 공부한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좌선도 열심히 하고 큰스님들의 말씀을 들으러 부지런히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로구나’ 하는 구체적인 느낌까지도 뚜렷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더 이상 발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바라볼 힘도, 그렇다고 저를 완전히 끌어안고 감싸 주고 다독여 줄 힘도 안 나더군요. 새롭게 발심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요. 계속 반복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요?

이 참나를 발견하는 이 문제는 성내는 거든 성을 안 내는 거든, 환희심이 나는 거든 환희심이 안 나는 거든 무조건 거기 맡겨 놔야 됩니다. 왜냐하면 악과 선도 다 놔야 되니까요. 그래서 안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 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되는 것도, 안되는 거라면 ‘어, 거기서밖엔 해결하지 못하겠구나. 나를 테스트해 보려고 그러는 거지.’ 하고선 거기 놓고, 잘됐으면 감사하게 거기 놓고, 이렇게 두 가지 요건이 다 그렇게 돼야 됩니다. 참 이거는 ‘아주 슬기롭게 내가 했다.’ 하는 그런 거는 없습니다. 내가 한 것도 없고, 내가 했다는 생각조차, 또 안된다는 생각조차, 빨리 하겠다 하는 생각조차도 놔야 합니다. 거기 모든 걸 일체 실험해 보십시오. 모든 걸 거기 맡겨 놓고 ‘거기서부터 감사하다. 거기서밖에 못한다. 물러서지 않는다. 믿는다.’ 이거를 꼭 하세요.
우리가 지금 시대에 옛날의 그 선지식들이 공부하면서 방편으로 해 나간 걸 고집부리지 말고 지금 현 시대에 물결치는 대로 전부가 그대로 참선인 것을 알아야 하죠. 전부가 참선이 아니라면 어디에고 걸려서, 앉아 있는 데도 걸리고 서 있는 데도 걸려서, 참선이라고 하는 데도 걸리고, 좌선한다고 하는 데서도 걸리고, 인제는 다 했다는 데서도 걸리고 모든 게 다 걸리는 거죠. 내가 해야겠다고 발심을 내는 데도 걸리고 말입니다, 공에 들지 못하면. 어떤 사람은 공에 들어서 또 편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잘한다고 그러죠. 몸으로 아무리 공에 들어서 그 앉아 있는 기술이 좋다고 그래도 그건 기술입니다. 참선이 아니라 그것은 기술이에요, 어디까지나. 몸을 단련해서 잘 앉아 있고 오래 앉아 있는 거는 기술이지, 그것은 참선이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건 걸어가면서도 내 할 일 다 하는 것이 참선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 있을 때 알아 놓으신다면 뭐든지, 올바로 눈이 뜨이고 코가 트이고 맛을 알고 귀가 트이면 어디고 모르는 데 없이 착착 가시게 되는 거죠. 만약에 여러분이 이 도리를 모르고 기복으로만 나가는 그런 분이 있다면, 살아서 모르니깐 죽어도 어딘지 몰라서 항상 그러죠. 개집도 들어갈 수 있고 뱀 소굴도 들어갈 수 있고 말입니다. 그건 어쩌다 식만 남아서, 살던 식, 그 습만 남아서 그냥 들어가는 거지 깜깜한데 어떻게 찾아 들어가나요? 그러니 살아서 눈을 뜨지 못하면 안 되고, 귀가 트이지 않으면 아니 되고 전 우주에 그 향기 냄새를 맡지 못하면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맛을 못 보죠.
그리고 본래 사람들은 신심을 쌓고 안 쌓고가 없이 그대로 부처님 법을 지금 지녀 가고 있습니다, 본래. 그렇기 때문에 본래 그렇다는 거를 알고 믿으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걸 한 군데다 뭉쳐서 놓아야만 합니다.
외국에서 하나 되어 살아가려면…


스님, 여기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입니다. 여기에서도 ‘길을 묻는 이에게’를 보고 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르다 해도 그 자리는 하나, 바로 주인공 자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서도 항상 그 진리를 가슴에 꼭 품고 왔습니다만, 현실 속 러시아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 많은 경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잘 못하고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요즘은 좀 불안해지고 7년을 계획했던 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여기 사람들과 하나 되기 위해 제가 놓치고 가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다시 점검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은 하나하나 매사에 등한시하고 살죠. 그렇기 때문에 살지 또 그렇지 않으면 못 살죠. 그런데 둘 아니게 살면 등한시 안 해도 살 수 있고 둘로 나누어서 본다면 하나하나가 어지러워서 못 살아요. 발길에 차여서 못 산다고요.
그래서 우리 이 마음공부를 해 나가는 분들이 할 일이 진짜 뭐냐. 참선이다. 참선은 어떻게 해야 진짜 참선으로 하는 것이냐. 첫째 참선으로 하려면 모든 걸 들이고 낼 때에 가서 안 오는 걸 억지로 잡지 말고 나한테 오는 거 마다하지 말라. 그리고 둘로 보지 말라. 모든 걸 들이고 이렇게 놓을 때, 그리고 그 안에서 들이고 놓을 때, 일을 하든 자든 앉아 있든 서 있든 사생이 다 모두가 참선 아닌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 문이 둥굴려져서 사방이 다 터졌는데 그 문을 어디서 찾느냐. 사방이 다 터졌는데 문을 어디서 찾느냐 이런 소리죠.
생활이 즉, 우리가 지금 모든 거를 집어넣는데 그게 문을 찾는 대도의 길이다. 그리고 근본 참선이다. 어디 하나 걸림 없이 참선이 돌아가는 동시에 요만한 거 하나도 버림도 없고 집어넣음도 없이 참선을 하고 있다. 그러니 함이 없이 바로 참선을 하고 있다. 벌써 참선한다고 틀고 앉아 있으면 그건 참선은 떠난 거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앉아 있지 말아야 된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앉아 있지 않아야 된다 이런 것도 아니고 서야 된다 이런 것도 아니고 일을 해야 된다 이것도 아니고 잠을 자야 된다 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아주 졸릴 때에 잠자는 것도 참선이요 아주 바빠서 일을 할 때 일하는 것도 행선이요, 또 아주 바빠서 가야 될 때 가는 것도 바로 참선이다. 서있는 것도 참선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앉았다 일어나고 누웠다가 일하고 이러는 것이 그냥 그냥 천연적으로 돼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인생으로 태어났다, 인생이 아니라 짐승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생명이다 하면, 앉았다 일어나고 누웠다 일하고 하는 거는 누구나 대동소이합니다. 그런 걸 아니다 기다 할 거 없이 그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참선 아닌 진짜 참선이다 이거죠. 어디 한 군데라도 막혔어야 이거를 막힌 데를 틔우고 또 막히지 않은 데를 찾아 들어갈 수 있는 거죠. 사방이 다 터졌어요. 다 터졌는데 어디를 틔우려고 문을 찾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당을 쓸 때 돌 쪼가리가 있어서 걸려서 돌 쪼가리를 집어서 이렇게 치우는 것도 참선이다 이겁니다. 그 도리를 완벽하게 절감하고 정심으로서의 그 도리를 알고 지내야만이 앉아 있을 때도 시간을, 즉 말하자면 3시간이다 2시간이다 이렇게 시간을 두고 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내가 앉아 있게 되면 앉아 있고 설 때 되면 서고 누울 때 되면 눕고 일할 때 되면 일하고,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그게 진짜 사무사유가 다 그냥 한데 합쳐져서 터져 버려서, 터져 버렸으니까 본래 진리가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게 터져 버렸으니 무엇을 생각으로 고민하고 찾으려고 애를 쓰겠느냐. 그러니깐 이렇게 방편으로 선방이다 뭐다 해 놓는 거죠.
팔방미인으로 그냥 문이 없고 문이 있고 그거를 떠나서 그냥 걸림 없이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라고 하니까 그게 이해가 가요? 이해가 안 가요? 진리를 따져 보자고요. 진리를 보고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세상을 보고. 한번 그래 보세요. 전자의 선지식들은 그 참선하는 데 앉았다가 오줌 마려우면 펄떡 일어나서 얼른 오줌 누러 가잖아요. 그럼 ‘선이 끊어지는데 오줌은 왜 누러 가느냐.’ 이러고 한방 먹였다고요. 그게 다 그런 생각을 하라고 한방 먹인 거거든요. 그럼 오줌 누지 말고 그냥 오줌 싸고 앉았어라 이런 것도 아니고, 어디로 빠져야 걸림 없이 빠질 수 있느냐 이런 도리죠. 이 마음이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항상 들어서 알겠지만 인생은 덧없이 그냥 바람결처럼 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바람결같이 가는 그 물질적인 모습에 바로 참자기가 있거든요. 참자기가 일체 모든 것을 다, 안팎을, 만법을 다 이롭게 합니다. 그러니까 육신 모습은 자기 정신계의 시자일 뿐이에요, 심부름꾼. 자기가 안 보이니깐 없는 것 같죠? 그런데 반드시 있다고요. 그래서 모든 것을 공심으로 놓고 공심으로서 살고 둘로 보지 말고, 하나하나 모두가 공체로 사니까 공생으로 살고 이 나무나 돌이나 풀, 모두가 같이 공생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 속에도 수천 명이 살고 있는데 그 살고 있는 그 생명들도 모두가 공생으로 삽니다. 그러니까 둘로 보지 말아야 된다는 얘기죠. 일체를 다 둘로 보지 말아야 된다 이겁니다.
‘삼세가 둘 아닌 노래’ 그 노래 지어 놨죠?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줄창 천년만년 살 줄 알지만 그게 아니거든요. 또 바뀌고 또 태어나고 또 바뀌고 또 태어나고. 인간으로만 태어나는 게 아니고 잘못하고 살면 짐승의 모습으로 태어나 가지고 살죠. 그러니까 여러 가지 가지를 다 알려면 내 내면의 주인공 자체를, 진짜로 그게 불성이니까, 그게 자불이자 불성이자 주장자니까 열심히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놓고 뭐든지 하세요. 상대방으로 인해서 싸우게 되고 말다툼을 하더라도 그거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주인공에다 넣고 ‘이거를 이렇게 공부시키느라고 이러는구나.’ 하고 모든 거를 다 거기다 놓고 ‘화목하고 둘 아니게 살게 너만이 할 수 있어.’ 그러고 다 맡기고 사세요.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


끊임없이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서 몸을 가눌 수가 없는 지경인데 스님께서는 그것도 주인공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하고 힘든 제 마음이 어떻게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까?

예전의 선사들은 팥 죽 한 방울 한 방울 나오는 게 전부 문수라고 그랬죠. 요놈! 이게 주자거든. 주걱이 아니라 주자거든요. 비유해서 말한 겁니다. 액면 그대로 듣지 마세요. 주걱이 주자고 바로 이 방울 방울 나오는 것이 요놈도 고놈이고 요놈도 고놈이고 요놈도 고놈 속에서 나오는 거고 전부 고놈입니다. 아니, 팥죽 속에서 다 나온 거죠, 팥죽 방울이. 그러니까 내 지금 이 살림살이 이것이 팥죽 끓듯 하는 거거든요. 이 생명들이 아주 간략하게 쳐서 15억이라고 해도 되고 16억이라고 해도 돼요. 그런데 이건 숫자로 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식 하나가 수천도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 마음 하나가 우주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거니까요.
예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죠. 어떤 사람이 구름을 타고 연애를 걸러 하도 다니기에 어느 날 사형이 보니까 아, 요놈이 또 연애 걸러 갔거든요. 그런데 몸뚱인 놓고 그게 진짜가 가는 거죠. 가짜가 가는 게 아니에요. 아, 구름을 타곤 그냥 연애 걸러 가니까 ‘요놈 또 봐라.’ 그러고선 구름을 타고 가는 거를 그냥 탁 막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살려 달라고 그냥, 사형한테 이젠 안 그럴 테니 살려 달라고 그래서 놔 줬다는 얘기가 있듯이 말입니다.
지금 이게 말입니다, 이게 죽 솥에 죽 끓듯 하는 것입니다. 그 모두가 인과로 인해서 업이 생기고 그 업이 뭉쳤기 때문에 고(苦)덩어리니까요. 거기서 그 방울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그 방울마다 나오는 대로 속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 방울을 바로 그 마음으로써 다스리고 나가야 할 텐데 다스리지 못하고는 나오는 대로 그냥 말도 해 버리고 ‘이 죽일 놈, 살릴 놈, 급살을 맞아라.’ 뭐 어쩌고. 그리고 미우면 ‘어유, 나가서 죽지 않나?’ 성가시게 하면 그런다고요. 그러나 그것이 죄업이 벗어져서 잘되는 게 아니라, 고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욕을 하니까 ‘이 둥우리는 냉랭한 둥우리구나. 추워서 못 들어가겠다.’ 이러고는 거리로 나돌다가 점점 더 하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도둑질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나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공부를 안 한다 하더라도 들어오면, 자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외박을 한다 하더라도 “얘, 너 어디 가서 춥지나 않았니?” 또 더울 때는 “덥지나 않았니? 뭐라도 좀 먹었니? 얘, 너에게 해 주기 위해서 냉장고에 이렇게 음식을 해 놓고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고 여기다 맡기고 부드럽게 해 주고, 또 자기가 나갈 때는 거기다가 그렇게 뽀뽀 한번 해 놓고 “당신을 사랑해!” 또 “너를 사랑해!” 이러고 종이에다가 요렇게 해 놓고 나가면, 그거 조금만 노력하고 조금만 이해력을 가지고 넓게 쓴다면 그 보금자리가 너무나 따뜻하기에 바로 화목해지고 딴 데로 이탈이 되질 않아요.
맷돌에 심봉을 딱 끼우고선 돌리다가 거기다가 물건을 넣으면 잘 갈려 나오지만 심봉을 잘 꽂질 않고 하면 그냥 그게 맷돌이 이탈이 되죠. 그리고 그 물건도 갈아지질 않아요. 인간도 그렇게 살면 이탈이 되고 잘 갈리지 않고 그러니까 죽네 사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심봉만 딱 이탈되지 않게 꽂아 놓고 그대로 잘 돌린다면 뭐라도 넣어서 갈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갈아지는 게 어딨습니까. 안되는 게 어딨습니까. 내가 생각하고 하는 게 그대로 법이요, 중용입니다. 인간이라면 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삶의 보람도 가져야만이 인간이 산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부처님께선 항상 안에도 노예가 되지 말고 바깥도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망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한번 뒤집어 볼 생각을 하세요. 망상이 일어난다 하지만 망상이 아닙니다. ‘망상을 망상이라고 끊지 않고 가는 자는 그게 열반으로 직결하는 지름길이니라.’ 그랬습니다. 망상은 바로 보살도를 이루는 데에 과정을 이끌어 주는 길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망상이 아닙니다. 왜 망상이라고 이름을 지어 놨겠습니까? 여러분은 망상이라면 그걸 끊으려고 애를 쓰시는데 그러지 마시고 그냥 놓을 생각을 하십시오.
마음이 요동을 쳐서 펄펄 뛴다 하더라도 펄펄 뛸 게 없어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져서 산산조각이 난다 하더라도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그러니 ‘에이, 죽는 것도 너로 인해서, 사는 것도 너로 인해서!’ 아, 이러면 펄펄 뛸 게 뭐 있습니까. 거기다가 모두 여러분을 공부 가르치려고 주인공이 외려 딴 사람을 시켜서 쿡쿡 찌르게 만들고 일을 벌여 놓고 그럽니다. 그러면 거기에 속아 가지고 바깥으로 온통 야단이 나죠. 그럭하지 마시고 ‘아하, 이게 거기서 나 공부시키느라고 이렇게 온 거로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 ‘아이구, 알았구나!’ 그러고선 그냥 없어져요. 팥죽 솥에 팥죽 끓는 것 탁 치면 없어지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방울이 올라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생활 속에서 오는 대로 거기다가 그냥 그 주자로 쳐서 거기다 놓으십시오. 그런다면 여러분이 진짜 그 무명을 벗고 또 남도 동시에 무명을 벗겨 줄 수도 있는 그런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거, 그저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든 바깥에서 다가오는 거든 그 마음 한자리에서 모두 일어난다는 거만 놓치지 않고 가시면 내 인생의 주인으로 제대로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사십시오.

자식위해 어떻게 놓고 관해야 하는지


스님께 삼 배 드리옵니다. 저는 마음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초심자입니다. 제게는 31개월 된 예쁜 아들이 있는데요, 성장 발달이 많이 느립니다. 그래서 많이 걱정되고 안타깝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당장 죽는다 해도 주인공이 있기에 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님, 정말 자식 일은 왜 이리도 놓기가 힘이 드는지요? 열심히 공부하다가도 자식 일에 부딪치면 꽉 막힙니다. 그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인공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한바탕 우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스님, 이 못난 어미가 자식을 위해 어떻게 관하고 놓아야 되는지요. 이 어리석은 중생을 위하여 스님의 마음 한번 내 주시길 간절히 원하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그대로 진행하면서 실천을 하면서 체험하면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지 이 자체를 가만히, 자기를 좀 보세요. 내가 욕심이 있는가 없는가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자기를 검증해 보세요. 내 자식이 금방 차에 치여 죽는다 하더라도 내가 눈 하나 꿈쩍 안 하겠는가. 한번 그거를 생각해 보세요. 자식을 가지고 너무나들 애착하기 때문에, 이걸로 한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식이 금방 차에 치여 죽었다 이런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가슴에다가 넣고 지지고 볶겠습니까, 가슴에다 묻어 두겠습니까, 그 영혼을 그냥 승천시키겠습니까?
자식이란 인연이 있어서 만난 거예요. 그런데 자식의 인연이 우리가 전자에 어떠한 과정을 살아나갈 때 악으로 맺어진 인연이라면 악으로 나와요. 예를 들어 부모에게 아주 극진히 잘하고 있다가 탁 없어져 가지고 부모에게 뼈아픈 고통을 주듯이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자식도 자식이 아니에요. 매미가 자기 몸 하나 꺼내려고 자기 몸을 그냥 막 갈갈이 찢죠. 자기 몸을 찢어서 자기를 꺼냅니다. 자기를 꺼내서 나와도 자기입니다. 그럼, 자식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건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면 나한테 넣어도 그저 착이 없고 항상 같이 하면서 같이 살죠. 그렇게 돼서 우리가 회향을 할 때는 그냥 일체 만물만생이 다 한마음으로 흡수가 돼서 회향을 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보살행이죠. 그렇게 모두 둘이 아니게 보고 둘이 아니게 행해야 하고 둘이 아니게 아픔을 거두어 줘야 하고, 자기 몸이니까. 둘 아니게 이끌어 가야만 그 지위가 그대로 보살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또. 잘못 알아듣지 마세요. 사랑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할 것 다 하시되 착을 두지 말라 이런 거죠. 부모한테도 그렇고 자식한테도 그렇고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착을 두고 기복으로 자꾸 바깥으로 끄달리면, 예를 들어서 어떻게 걸리다 보면 소도 되고 말도 되고 그런단 말입니다. 회향할 때 그렇게 돼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중세계라는 것은 잘못하면 짐승으로 갔다가 또 잘하면 사람으로 오고, 이렇게 뒤범벅이 되는 굴레바퀴 같아요. 수레바퀴 같단 얘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잘하는 거냐. 오직 자기 주장자, 자기 주인공에서만 생활을 그냥 하세요. 주장자에 의해서만 생활을 하세요.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니니까요. 주장자의 시자니까요. 심부름꾼이란 얘기예요. 자기 주장자의 심부름꾼이에요. 자불의 시자죠. 입산한 사람들은 자불의 시자라고 할 수 있고 여러분한테는 자불의 심부름꾼이라고 할 수 있죠.
그전에도 만날 말했죠. 부처님께서는 방편으로 몸뚱이를 배로 비유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몸뚱이가 배라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들은 중생이라고 비유했어요. 그리고 내 주인공을 선장으로 비유를 했고요. 그럼 선장이 이끌어 가는데 가만히 거기다 맡기고 있어야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 배가 뒤집히지 않고 가는 데까지 가죠. 그런데 이거는 바람이 불면 바람 분다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뭐, 별거 다 찾죠. 이렇게 하면서 서서 날뛰고 난동을 부리니까 배가 뒤집히지 않고 견딜 수가 있나요? 그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있는 사람은 선장한테 맡기고 배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배도 뒤집히지 않고 저절로 그냥 잘 가고 또 선장과 둘이 아니게 되고, 얼마나 좋으냐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파도가 일고 생활할 때 어떠한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는 원력이 있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원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원력이 없으면 그렇게 안되죠. 원력이란 건 뭐냐? 믿음이에요. 믿음이 깊어지면 어떠한 것도 무섭지 않단 말입니다.
이 도리는 모르지만 믿음이 진실한 어떤 분이 있었어요. 연세가 좀 많은 보살이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죠. 그런데 이 도리는 하나도 몰라요. 그러나 믿음은 있어요. 그분은 오직 믿음으로써 사는 분이에요. 그런데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노인은 눈 하나도 깜짝거리지 않아요. 다 죽는다 하더라도 ‘죽게 되는 거니까 죽는 거지.’ 그냥 이래요. 믿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데 오히려 자식들이 잘되고 몇 십 년씩 앓다가 나중에는 병이 깊어져서 죽게 된 남편도 그냥 쓱쓱 털고 일어나게 됐죠. 그러니까 그 믿음이 원력이에요. 믿음이 얼마나 강했으면 모두 그냥 그렇게들 일어납니까. 벌써 보면 알잖아요. 가정을 보고 그 사람 살아나가는 걸 보면 벌써 ‘어, 저 사람은 원력이 벌써 어떤 단계에 갔구나.’ 하는 걸 알게 돼요.
어떤 회사를 크게 해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고 그냥 턱턱턱턱 해내고 가는 것도 믿음이거든요. IMF 세상이 돼서 이렇게 살기가 어렵다고 그러지만 잘하고 나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가르쳐 준 은혜를 어떡하면 다 갚을 수 있겠느냐는 거죠. 머리를 깎아서 신을 삼아 드려도 다 못 갚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랬어요. “나한테 갚으려고 하는 생각도 버려라. 바로 네가 나고 내가 너라면 그대로 네가 하는 건데 뭘 어디다 갚고 어디다가 주고 하느냐. 어디다 갚을 게 있느냐. 그러니 너와 모습이 둘이 아니요, 생명이 둘이 아니요, 바로 마음이 둘이 아니요, 어려움이 둘이 아니요, 아픔이 둘이 아니니 둘이 아닌 그 사람이 어려워하걸랑 좀 나누어 주면서 살아라. 그게 갚는 거다. 일부러 내가 모르는 사람을 쫓아다니려고 애를 쓰지 말고 내 앞에 그런 사람이 보이거든 서로가 서로를 도와 가면서 사는 게 바로 그 빚 갚는 거다.” 그러니 공부는 더더욱 증장이 되고 공덕도 더더욱 증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200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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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