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아집과 오만의 행태들
중생들을 발생의 차이가 아니라 무지의 유형에 따라 분류한 혜능이, 사상(四相)이라고 교과서에 나온 대로, 원어에 의존해서 해석했을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설명은 파격적이다. 그는 콘즈처럼 사상을 ‘존재’, ‘자아’, ‘시간’ 등의 추상적 철학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다만, 주변의 ‘실제 삶’에서 보이는 중생 군상들의 수많은 아집과 고집들을, 그 ‘아상’의 양상들을 쪽집게처럼 집어나간다. 듣는 사람은 “이거, 내 얘기 아냐” 하고, 찬물을 맞은 듯, 잠이 확 달아난다. 혜능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호사를 누리기로 한다.
원문 번역
衆生佛性本無有異, 緣有四相, 不入無餘涅槃. 有四相卽是衆生, 無四相卽是佛. 迷卽佛是衆生, 悟卽衆生是佛.
迷人恃有財寶學問族姓, 輕慢一切人, 名我相. 雖行仁義禮智信, 而意高自負, 不行普敬, 言我解行仁義禮智信, 不合敬爾, 名人相. 好事歸已, 惡事施人, 名衆生相. 對境取捨分別, 名壽者相. 是謂凡夫四相.
修行人亦有四相. 心有能所, 輕慢衆生, 名我相. 自恃持戒, 輕破戒者, 名人相. 厭三塗苦, 願生諸天, 是衆生相. 心愛長年而動修福業, 諸執不忘, 是壽者相. 有四相卽是衆生, 無四相卽是佛.
“중생들에게 있어 불성은 다르지 않다(*누구나 불성을 갖고 있다). 다만 사상(四相)이 있어, 그래서 무여열반에 들지 못하는 것이다. 사상이 있으면 즉 중생이고, 사상이 없으면 즉 부처이다. (어둠을) 헤매면 부처가 중생이 되고, (진실을) 깨달으면 중생은 부처이다(*중생과 부처의 종자는 따로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그런데 (이 진실을 모르고 어둠 속을) 헤매는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들이 있다. (‘헤맴’에 여러 유형이 있는데) 1) 재산을 자랑하고, 학식을 뻐기고, 가문의 영광에 기대, 주변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함부로 하는 행태를 이름 하여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2) 인의예지신, 즉 유교 사회가 덕목으로 치는 행동 몇 가지를 따라하는 걸 대단하게 여겨, 주변 생명에는 고개 숙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요컨대 내가 “유교의 최고 덕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노라”면서 ‘사람에 대한 예의’를 합당하게 표하지 않는 행태를 ‘인상(人相)’이라고 한다. 이 뿐인가, 3) 좋은 일은 자기가 챙기고, 나쁜 일은 남에게 떠맡기는 이런 인간들을, ‘중생상(衆生相)’에 빠졌다고 하며, 4) (저대로 완전하게 흘러가는) 세상을, 자기 기준에 따라 구분하고 호오를 매기는 이 ‘대략 난감한(?)’ 버릇을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한다. 이 넷은 범부 중생들이 늘 빠지는, 그리고 빠져 있는 함정이다.
“이 마음의 폐단을 고쳐, 윤회의 고리를 끊겠다고 발심한 수행자들에게도 그러나 또 다른 사상(四相)이 똬리 틀고 있다. 1) 자기 밖과 자기 안을 한사코 갈라, (수행을 안 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 이것을 아상(我相)이라고 하고, 2) 내 행동이 곧 법이고, 표준이라는 오만에 계율을 부수기를 마음대로 하는 것, 이것을 인상(人相)이라고 한다. 3) 이 세상의 고통과 윤회가 지긋지긋해서 저기 신선들이 사는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 그것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한다. 이와 달리, 4) 이 사바를 떠나기 싫어, 복될 일을 부지런히 닦고, 그게 집착인 줄 모르는 것, 그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한다.
“(기억하라. 범부나 수행자나 이런 사상을 갖고 있는 한 열반, 그 종국적 자유와 평화에 이를 수 없다.) 요컨대 사상이 있으면 중생, 그게 없으면 부처이다.”
부연 설명
직역으로 시작했다가, 성에 안차 아예 의역에다 화장까지 해 보았다. 이런 파격에 눈살을 찌푸리고 화를 내시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글이란 메시지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 호소력이 기준이므로, 나는 애매함을, 또는 반쯤의 번역을 극도로 싫어한다.
사상에 두 세트가 있다고 했다. 범부들의 그것과 수행자들의 그것, 모두를 걷어내도록 수행하자! 너무나 리얼한 충고인데, 각자 깊이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 요점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범부들의 사상(四相)
1) 아상: “재산이나 학식, 가문을 믿고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것.”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다. 이들 위세를 얻기 위해, 그 인정을 위한 가열한 투쟁이 우리네 삶의 질펀한 일상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불교는 이 근원을, 니체의 말을 빌리면 권력의지를 뿌리 뽑고자 한다. 돈교는 “네 자기 속에 그것은 없다. 그리고 너는 그것 없이 완전하다”고 조용히 말한다. “더 뭘 할 것은 없고, 그저 이 마음을 쉬고,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2) 인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실천하지만, 그 행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것.” *대체로, 도덕가나 종교가, 설교자들에게 이런 유형이 많다. 범부들이 모두 부처들이라, 누구나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는데, 자기가 배운 도덕을 앞세우고, 설교로 들이대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발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이 상습적 태도가 자기나 남에게 실은 가장 나쁜 독이기 쉽다는 것을 우리 모두 깊이,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한다. 니체의 말을 다시 빌리면 ‘대지를 경멸하는’ 자들이 번성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3) 중생상: “좋은 일은 자신이 가지려 하고, 나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 *우리 모두 과실과 열매는 즐기되, 거기 수반되는 노력이나 희생은 회피하고자 한다. 그 습성을 뿌리 뽑거나, 최소한 유보하는 노력을 조금씩이라도 하자. 그래야 뭔가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4) 수자상: “한 상황을 대면할 때, 그것을 자기 관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취사(取捨)하고 분별(分別)하는 것.” *사상(四相)의 근본 뿌리가 이것이다. 인간 내부의 무의식적, 자동 발휘적 습성으로 이 활동이 불타듯 치열해질수록 마음의 안정은 흔들리고, 사회의 건강도 훼손된다.
- 수행인의 사상
위의 범부들의 사상을 뿌리 뽑더라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또 다른 유형의 사상이 존재한다.
1) 아상: 수행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아직 나와 남의 구분이 있는 사람. 나는 수행자니 높고, 너는 한심한 중생이라고 내리까는 고약한 버릇” *수행자로서의 자부심이 너무 강해 불교의 근본을 망각한 위태로운 유형이다. 나는 수행자들의 수준을 이 병통 여부로 판단하는 버릇이 있다.
2) 인상: “규율은 내 속에 있다면서, 파계를 가볍게 여기는 것.” *‘내가 곧 부처’라는 말에 취해, 술을 마시고, 색을 범하는 등 행동거지를 함부로 하는 유형을 가리킨다. 특히 돈교의 수행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3) 중생상: “지옥, 아귀, 축생 등 천하고 고통스런 세계는 싫고, 오직 즐거운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 *이 고해의 땅을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누군들 없으랴. 그러나 그럼에도 이 땅에 우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고, 살아야 한다. 혜능은 말한다. “저 너머의 세상은 없다. 네가 발 디디고 선 곳, 그곳이 전부이다.”
4) 수자상: “오래 살기를 바라, 복업을 닦는 사람들로서 아직 집착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형.” *앞의 유형과는 달리, 이 땅에 아주 눌러앉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역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가 보다. 수행자는 오고 감에 걸림이 없어야 하고, 머물고 떠남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좋다. “있으니 있고, 문득 없으니 없다”의 무심(無心) 공부를 더 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