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걸림이 없어 한맛이나 자취마저 떨쳐 내야 한마음
활등과 활줄이라는 소제목을 대하니 생각나는 도반이 있다. 선방을 오래 다닌 훌륭한 스님인데 요즈음 전북 임실 어느 산골짜기 조그만 절에 묻혀 살고 있다. 경이나 어록을 보는 그 스님의 안목은 대단해,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에서는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한데도 강원에서 배우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워 초심자들이 배우는 강원 과정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 나이 그 법랍에 선원장 소임을 보아도 부족함이 없을 터인데, 모르는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늦은 나이에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한 그 도반은 나한테는 어떤 선지식보다도 더 훌륭한 스승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지난 해 그 스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가귀감>에서 ‘선은 활줄이고 교는 활등’이라고 한 말의 뜻을 몰라서 오랫동안 궁금했지. 활등은 구부러졌고 활줄은 곧은 것이라고 하여, 여기에 어떤 깊은 의미가 있는 줄 알았지 뭔가. 나중에 알고 보니 활등은 휘어 있으니까 ‘천천히 돌아가는 길’이고, 활줄은 일자로 곧으니까 ‘곧장 질러가는 길’이라는 뜻이더라고. 이렇게 쉬운 내용인데도 모르고 다른 깊은 뜻이 있는 줄 알았지 뭐야. 사람이 잘 모르면 참 어리석네. 활등과 활줄이 화두인 줄 알았네 그려.”
도반 스님의 이야기처럼 부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를 바로 찾으려는 것이 활줄에 비유된 선(禪)이고, 팔만대장경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시간이 걸리지만 차근차근 부처님의 세상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이 활등에 비유된 교(敎)이다. 선은 공부의 지름길이요 교는 차근차근 돌아가는 길이다. 선과 교를 활줄과 활등에 비유한 <선가귀감> 10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碍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故云 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有底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말씀하시고 조사 스님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신다. 이 말의 뜻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 바야흐로 한맛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맛의 자취마저 떨쳐야 조사 스님들이 보인 한마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말은 용궁에 있는 대장경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활등’은 ‘구부러졌다’이고, ‘활줄’은 ‘곧다’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팔만대장경에서 구부러진 활등처럼 말씀하셨다는 것은 좀 돌아가더라도 부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했다는 것이다. 조사스님들이 선어록에서 활줄처럼 말씀하셨다는 것은 곁가지는 모두 거두절미하고 곧장 바로 부처님의 세상인 깨달음에 들어가게 했다는 것이다.
교(敎)를 통해 부처님의 마음을 알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선(禪)에서 깨달음에 들어가면 그것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다. 부처님의 마음을 알면 깨달음이고 깨달음을 성취하면 부처님의 마음이니 모두가 한맛이다. 그러므로 선이든 교이든 서로가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이를 ‘걸림 없는 법’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걸림 없는 법’이라고 하여 여기에 집착하면 이 또한 망상이 된다. 선과 교가 걸림이 없으므로 한맛이 되나 이 자취마저 떨쳐 내어야 조사스님들이 보인 한마음이 드러난다. <선가귀감> 9장에서 모든 법이 부정되어 끝내 비어 있는 자리를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이 필경공이야말로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을 나타내는 것이자 최종 목적지로서 실상을 드러내는 경지이다. 한 법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 스님은 중국에 와서 불교의 대혁신을 일으켰다. 경전이나 글이 다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였고 계율, 염불, 다라니 모든 것을 다 부정하였다. 달마 스님은 오로지 “마음을 살피는 한 가지 일에 모든 수행이 들어있다[觀心一法 總攝諸行]”라고 하고, 또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그 성품을 보면 부처님이 된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하였다.
달마 스님의 이런 법은 혜가 스님에게 전해지고 육조 혜능 스님 때에 활짝 꽃이 펴 그 문하에서 수많은 성인들이 나왔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투어 침체된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법을 배우고자 했다. 그래서 묻기를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어떤 스님이 조주(778~897)에게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묻자, 조주 스님께서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서산 스님은 이 대답이야말로 법에 집착하려는 마음을 깨부수는, 파격적인 선(禪)의 근본 뜻이 된다고 하였다. 이런 답은 용궁에 있는 팔만대장경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하면서 게송으로 말한다.
魚行水濁 鳥飛毛落
고요한 연못에 고기가 노니 깨끗한 물이 흐려지고
푸르른 하늘에 새들이 나니 가벼운 깃털이 흩날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