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독일 여행 중 벌어진 일이다. 독일 땅에 발 디딘 첫날이다. 밤 열시 경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오랜 비행 뒤끝이라 숙소에 짐과 소지품을 던져놓고 방 열쇠를 프론트에 맡기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한 후 낯선 현지 사람들과 수작이나 부려볼 심산으로 근처 호프집으로 갔다. 열한시 1분전, 주점 입장시간 마감직전이다. 열한시 정각이면 대통령이라도 입장불가다. 퇴장은 자유롭다. 아슬아슬하게 입장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새벽 두 시에 불쾌한 얼굴로 호텔에 돌아왔다.
프론트에 가서 열쇠를 달라고 하니 확인증을 보여 달란다. 그게 뭔데? 확인증이고 여권이고 소지품을 모두 방에 던져놓고 나왔다. 나는 조금 전 열시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고 투숙한 한국인이다. 날 모르겠느냐? 몹시 피곤하니 빨리 키를 내놔라. 그러나 그런 억지는 통하지 않는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권을 꺼내 숙박계를 또박또박 적었지만 거기 적힌 자료가 나를 증명하지 못했다. 프론트에서 지급한 작은 카드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걸 방에 던져 놓고 나왔다. 철제 로봇처럼 생긴 직원 녀석은, 이튿날 아침, 회의를 거쳐 확인되면 당신에게 열쇠를 줄 수 있다는 답변만 반복한다.
결국 나는 호텔 로비에 있는 소파에서 독일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너희들 참으로 한심하다. 서비스 정신이 형편없다. 다시 이 호텔에 오나봐라. 밤새 소파에 쪼그려 자며 잠꼬대처럼 그렇게 끙끙거렸다.
엄격, 정확, 견고, 점검, 확인 또 확인, 이것이 독일인의 특성임을 안 것은 여러 차례 수업료를 낸 이후다. 객실 출입문은 감옥의 문만큼 튼튼하다. 독일어에는 허용 오차, 융통성, 설마, 이정도 쯤이야, 대충대충, 남이 안 보는데 어때? 이런 말이 없는 듯하다.
며칠 전 롯데 월드에서 놀이기구를 타던 청년이 미사일처럼 허공으로 발사되어 석촌 호수에 빠져 숨졌다. 창창한 청춘이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여기서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의 원인은 안전 불감증 때문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자연 재해도 마찬가지다.
봄날이다. 얼었던 대지가 녹고 있다. 어디서 무엇이 터지길 기다리지 말고 주변을 살피고 엄하게 대비하자. 산불, 홍수가 기다리고 있다. 하늘 탓만 해선 안 된다. 대형 교통사고도 낌새를 감추고 대기 중이다. 설마 무슨 일이야, 이 정도는 괜찮겠지.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약간 꺼림칙한 것은 반드시 불행과 이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3일 간 묵으면서 호텔 보이 녀석에게 당한 첫날밤의 수모를 갚을 옹졸한 궁리를 하다가 드디어 한 가지를 발견했다. 로비 화장실에 가니 까치발을 해야 소변을 볼 수 정도로 변기가 높다.
키 큰 독일인만 사용할 수 있는 구조다. 지배인을 데리고 와서 시연을 해가며 따졌다. 그러자 지배인 왈, ”당장 높이에 맞게 고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배인은 “1주일의 시간을 달라”며 “대신 그 기간 동안 당신은 장애인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그 호텔에 묵는 여행객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장 공사를 시작했다.
그 때를 회억하니, 목석처럼 굳은 자세로 같은 대답만 해대던 직원 녀석이 그립다. 자기 임무에 투철한 정신이 존경스럽다. 지금쯤 동양인 체형에 맞게 화장실 공사는 끝냈겠지.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투구한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유비무환, 오래된 격언을 다시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