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악한 백성들 교화하러간 10대 제자
가르침 들려주려 애썼으나 줄줄이 실패
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데다 인구수도 적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품성이 너무나 거칠고 사나워서 온갖 나쁜 일들이 끊이지 않고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마하목건련이 부처님에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그 나라에 가서 사람들을 교화해 보겠습니다.”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 그 나라로 들어간 목건련은 이내 자신이 배워온 진리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착한 일을 하십시오. 나쁜 일을 저지르면 그 죄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은 귀 기울이기는커녕 좋은 말을 들려주는 그를 때리고 오히려 더 심하게 욕을 퍼부을 뿐이었습니다. 목건련은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리불이 말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교화시키려면 똑똑한 척 하지 말고 못난 체 하면서 가르침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역시 사리불도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 그 나라로 들어가서 자신의 방식대로 사람들에게 일깨움을 주려고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하가섭을 비롯한 제자들이 잇따라 차례로 갔으나 역시 오히려 무시와 비난만 받고 돌아왔습니다. 덕이 높은 스님들이 실패를 하고 돌아오자 아난이 부처님께 말하였습니다.
“아라한 한 사람을 욕하여도 그 죄가 작지 않는데 이토록 많은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거슬렀으니 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흉악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자들의 가르침을 저버린 죄가 무겁다고는 하지만 보살이 보면 그들은 모두 죄가 없고 깨끗한 사람들이다.”
이에 문수사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로 들어간 문수사리보살은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의 장점을 찾아내어서 그것을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당신은 참 용감합니다.”
“당신은 참 건장한 몸을 갖추었습니다.”
“당신은 부모님에게 잘 하는군요.”
“당신은 기백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혜롭습니다.”
자신들은 원래 포악하고 못된 백성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그때까지 몰랐던 자신들의 장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봄눈 녹듯 풀어졌고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상대방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칭찬을 들은 사람들은 이번에는 문수사리보살을 칭찬하기까지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우리가 못된 사람이라고 지적만 하려 들었는데 이 분은 어쩌면 그리도 우리 속마음을 잘 알아주실까? 이 분의 말씀을 들으면 참 행복해.”
사람들은 그제야 부처님이라는 성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서둘러 그분께 귀의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부처님은 아난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대가 말한 그 흉악하고 무거운 죄라는 것이 대체 어디 있는가?” (구잡비유경)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하고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아무도 입을 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질문의 방향을 슬쩍 돌려보았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참 재능도 많고 기발하고 아이디어도 신선해. 그런데 너희들의 그 신선하고 힘이 넘치는 세계를 구세대와 공감하려면 어떤 점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잠잠하던 아이들에게서 대답이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할아버지들에게 대화를 걸어야 한다.”
“그 분들도 우리 같은 신세대를 지내온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세대만의 문자를 몰라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문수사리보살이 그들에게 없던 장점을 새삼 만들어서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 중생은 내가 가르쳐야만 해”라는 생각이 아니라 “저 사람에게는 내게 없는 뭔가가 있다”는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본 것이 주효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다가가고 그 사람을 내편으로 만드는 아주 멋진 방법, 그것은 바로 ‘칭찬’이라는 것을 경전에서도 확인한 하루였습니다.